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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권두칼럼/권경아|해석의 다수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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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849회 작성일 13-03-08 18:45

본문

권경아|해석의 다수성을 위하여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인 것이다. 통일 일원론은 타성惰性의 욕구이며, 해석의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 된다.―F. 니체, 권력에의 의지―모든 가치의 가치전환의 실험

2000년대 이후 다양성의 시대는 시작된다. 2000년대의 시들은 그 동안 비평의 담론에만 머물러 있던 문학의 탈중심화 경향이 시적 감수성으로 내면화되어 형상화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적 감수성은 이론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써가 아닌 담론을 내면화하며 시적 형상화에도 완성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라 불리는 2000년대 이후의 시인들은 소비 대중문화 시대, 정보화 시대, 이성과 이념보다는 감성이 중시되는 시대, 총체성이 거부되는 탈중심적 다원화 시대를 살아가며 이론이 아닌 생활, 곧 삶 자체로 다가온 포스트모던적 사유와 인식을 기반으로 시적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이들이 포스트모던적 사유와 인식을 몸으로부터가 아닌 이론으로 체득한 90년대의 시인들과 변별되는 지점은 여기이다. 이러한 현대의 시를 읽어내는 비평의 목소리 또한 다양성에 주목해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의 시들이 보여주는 다양성에 비해 이 시대 문예지들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문예지들. 그 많은 문예지들이 어떠한 색을 내며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각 문예지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색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들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문예지들의 노력은 분명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서로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문예지들에 대한 비판의 소리보다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그들의 시도에 주목해야 하며,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다양성의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시대는 이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새로운 모색에 격려의 시선을 보낼 때이다.

 

장 금 : 홍시입니다.

정상궁 : 어찌 홍시라 생각하느냐?

장 금 : 예?

저는… 제 입에서는…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TV드라마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과 정상궁의 대화 일부분이다. 음식을 맛본 후 그 맛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장금은 ‘홍시’라 한다.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는 물음에 당혹스러워하며 장금은 “그냥, 홍시맛이 나서…”라 말한다. 그렇다 홍시맛이 나는 것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홍시맛이 난다는 말밖에는. 그러나 문학은 왜 홍시라 생각했는지, 왜 홍시맛이 나는지, 홍시맛이 어떻게 나는지, 홍시는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말하는 것. 문예지들이 이 작업을 수행하는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홍시는 어떻게 찾아가는가. 그러나 홍시맛이 어떻게 나는지, 달달한지, 달짝지근한지, 그냥 단지, 달콤한지, 그것은 그야말로 말하기 힘들다. 그 오묘한 맛을 어느 하나로 정의 내리기 힘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문예지들이 어떤 하나의 색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 각자가 느낀 맛이 있을 것이다. 문예지들 또한 그들이 느낀 문학을 말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사소하고/우리는 사소하지 않다./신호등에 붙잡혔다가/풀려나 다시 걸어가는 나는 누구?/어둠의 사이사이 피흘리는 불빛 속에/등을 보이며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서울 市民의 一部?/그리워라, 한국인인 나의 이복형제들./지금 그 얼굴들 다 어디로 숨고/燈火管制의 어두운 窓들만 떠 있나./즐거워라, 소화불량의 거북한 위에 투입하는/정제 소화제 두 알의 효능에 거는 확신./나는 그 확신의 끝에 피는 希望?/그 희망에 목숨을 거는 사람?―장석주, 「나는 꽃을 피우고 싶어 타는 몸?」, 완전주의자의 꿈

 

이 시에서 서울의 밤거리를 걷고 있는 시인은 사소한 우리의 삶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산다는 것이 진정 사소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실핏줄처럼 뻗어나간 골목으로 사라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누구에게든지 연결될 수 있다는 “공중전화는 계속 통화중”이듯 시인은 그들과 소통할 수 없다. 신호등에 의해 붙잡혔다가 또 다시 신호등에 의해 풀려나 걸어가고, 어둠이 내리면 일제히 귀가를 서두르는 도시인의 삶을 살아가는 시인 또한 현실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서울 市民의 一部?”이다. 이러한 도시의 일상 속에서 “뱉지 못한 몇 마디 말”로 괴로워하고 절망하면서도 그가 견딜 수 있는 것은 “고통의 줄기에서 매달려 웃는 꽃인 사람?”이고 싶은 소망 때문이다. 화려하고 거대하기만 한 이 세계에서 “삐걱이는 목조계단의 영혼과 무겁고 무거운 돌의 육체”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사소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살아가는 것은 ‘희망’에 대한 믿음 때문인 것이다. 그 희망이 비록 “소화불량의 거북한 위에 투입하는 정제 소화제 두 알의 효능에 거는 확신”처럼 사소한 것일지라도 시인은 “그 희망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다. “돌처럼 어둡게 돌처럼 무겁게 아무 발길이나 걷어채여 함부로 굴러도” 시인은 “꽃을 피우고 싶어 타는 몸?”인 것이다.

이 시는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알 수 없는 회의와 의문과 분노가 쌓이던 젊은 시절에 유독 절실하게 다가왔던 시이다. 이 시가 수록된 햇빛사냥의 재판 서문에서 이 시집을 “청춘의 시집”이라 회고하는 시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는 ‘뜨거운 젊은 피의 시’라 할 수 있다. 이 시를 보면서 필자가 느꼈던 피의 소용돌이가 지금은 조금씩 무뎌지고 있지만 그래도 그때의 전율과 감동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 문학은 언제나 “뜨거운 젊은 피”라 할 수 있다. 그 뜨거움을 기억해야 한다.

니체는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라 말했다. 통일 일원론은 타성惰性의 욕구라 하지 않았는가. 타성에 젖지 않는 언제나 “뜨거운 젊은 피”. 현재의 문예지들이 이러한 뜨거운 용솟음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리토피아≫가 보여주는 여러 작업들은 다양성의 “꽃을 피우고 싶어” 하는 하나의 시도일 것이다. ≪리토피아≫가 이 뜨거움의 한 면을 보여줌으로써 ‘해석의 다수성’이 되기를 희망한다.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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