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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특집/노지영/사라져가는, 살아져가는 방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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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593회 작성일 13-03-18 19:18

본문

특집|현대시의 구술성과 문자성

노지영|사라져가는, 살아져가는 방언들

 

 

1. 그 방언을 생각하며

김수영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산문에서 “소생하는 말보다는 없어져가는 말이 더 많”은 현실에 개탄스러워한 바 있다. 단순한 ‘회고미학’의 향수나 “미·소 세력의 대칭어에 지나지 않는” ‘민족주의’ 언어가 아니라 “문화의 밑바닥의 정밀경精密鏡”을 통해 “진정한 시의 테두리 안에 살아있는 낱말들”을 상상해내자는 것이다. 그는 “서울의 아래대의 장사꾼의 말”을 배웠던 유년을 기억하며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같은 낱말 등을 가장 아름다운 말들로 꼽고 있다. 그의 시의 「거대한 뿌리」에 열거되고 있는 ‘무수한 반동’들은 급속한 언어의 변동 속에서 ‘사라져가지만’, 동시에 문화의 밑바닥에서 뿌리를 엮으며 ‘살아져가는’ 이러한 언어들일 것이다.

이 산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김수영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을 언급하면서 ‘서울의 아래대의 장사꾼의 말’을 분명히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서울이라는 중심을 하나의 ‘지역local’으로 보고 있으며, ‘아래대’라는 계급성을 인식하고 있고, ‘장사꾼’이라는 직업성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공간 안에서 특수하게 체험되고 발굴된 언어를 통해 시의 현대성과 영원성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지역방언regional dialect과 사회방언social dialect 속에 철저히 속해 있는 민중의 언어가 구호로서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정밀경’의 아름다움을 선사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방언이 전경화 된 시들은 문화자본의 침투가 명백한 오늘날의 시들에서 더욱 문제적인 경향으로 논의되고 있다. 계층의 분화에 따라 더욱 발달하는 사회방언은 오늘날 여러 논자들을 통해 이미 다양한 정치·사회학적 개념으로 조명되고 있기에 각종의 비평적 프레임을 통해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지역방언들이 차용된 시들은 도시 문화 중심의 사회 안에서 눈에 띄게 퇴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시는 관심의 불모지대에서 말라가면서 그 가치가 온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김수영이 살았던 시대만큼, 아니 그보다 “언어의 로우테이션”이 빠른 박자로 일어나는 시대에서 우리는 시에서 사라져가는 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최근 시인들의 발화에서 사라져가고, 심지어 삭제되어 가고 있는 지역방언들은 김수영이 차마 잊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애틋하게 하나하나를 호명했듯,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방언을 생각하며’, 우리 시에 표현된 지역방언의 감각과 그 역사적 의미를 오늘날의 시를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2. 인쇄자본주의의 중심어가 주변으로 추방한 것들

먼저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지역방언들이 적극적으로 차용된 오늘날의 시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음을 고백해야 되겠다. 국어 교과서에서 그토록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방언들이, 여전히 화용상에서 쓰이고 있는 지역의 방언들이 도대체 언제부터 시의 영역에서 주변화 되어 그 근거를 찾기조차 어려워진 것일까.

방언이 주변화 되기 시작한 것은 어문 민족주의의 방향 속에서 언문일치의 노력이 본격화되는 30년대 전후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 초기, 신문이나 문학잡지 등의 매체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인쇄물을 통해 세계의 시공간을 이해하고 동시대적 감각을 획득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전혀 접촉이 없었던 타지방의 소식을 인쇄물로 접하면서 하나의 민족적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표준말을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정의내린 이후, 이러한 근대 민족국가의 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인쇄자본주의print-capitalism 속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민족 공통의 활자어national print-language’는 지방방언에 불과했던 경성어를 ‘세력어languages of power’로 만들어 ‘표준’으로서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물론 ‘수도어’를 표준어를 제정하는 것은 ‘서울지상주의’이자 닫혀 있는 ‘계란주의鷄卵主義’로 비판되기도 하였지만, 활자 문어체의 확대로 인해 중앙으로서의 ‘서울말’은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인쇄체로서 정립되지 못한 지역방언들이 자연스럽게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도 방언을 문학에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표준어와 방언을 병행해서 사용하려는 시적 움직임들을 우리는 식민지 시기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근대적 표준어가 일본 대동아의 지역방언에 불과했던 식민지 시기에는 하나의 언어적 통일을 향하는 것은 근대 제국의 정책에 공모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본의 문화통치에 있어서 “방언을 타파하고 국어의 통일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어의 통일 정책을 거부하고 시에서 표준어와 방언을 병행하여 사용해온 시인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시사는 그렇게 빈곤하지 않다. 김소월, 김영랑, 백석, 서정주, 이상화, 이용악, 한용운 등이 보여준 미적 성취가 이를 대표한다. 의도적이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이들 시인의 작품들은 지역방언의 사용을 통해 표준과 통일의 문법에 저항하는 시로 존재해 왔다. 언어의 사물성과 물질성이 더욱 중요한 시 장르에서는 그러한 언어적 통일에 위반하는 방언의 시편들이 선취하는 의미가 남다르기에, 이들의 작품이 현재에까지도 변함없이 애송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시 안에서의 방언을 살피는 작업은 국어학자들의 학술적 연구와 문학 연구자들간의 조업助業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주로 객관적 거리를 두고 학술적인 검증을 할 수 있는 작고 시인들이나 식민시기 전후의 시인들 정도에 한정되어 이루어졌다는 한계를 갖는다. 또한 70~80년대에 지역방언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민중적 삶의 구체성을 반영해온 시들이 점차 퇴조하고, 이후 인쇄 자본주의의 출판 권력이 중앙 문단에 집중되면서부터는 시인들이 시에서 방언을 사용하는 빈도도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하나의 경향으로 묶어 연구하기도 어려워졌다.

특히 최근에 출판된 시집들에서는 시인이 기법상 한두 편의 시를 지역방언으로 창작해보는 경우는 종종 살필 수 있으나 지역방언이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시 안에 차용된 예를 찾기란 더욱 힘들다. 이러한 시 쓰기의 풍조를 안타까워하며 한국시인협회 창립 50주년에는 한국의 사투리를 보존하는 운동으로 한국의 시인 101여명이 각자 자신이 태어나서 성장한 지역의 방언으로 시를 써서 사화집을 묶기도 하였으나 지역별로 시인을 선정한 인원의 편차가 크며, 101명의 대표시인을 선정한 기준도 잘 드러나 있지 않아 강력하게 대표성을 띤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전반적인 퇴조의 경향 속에서도 지역방언의 시적 기능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시편들이 존재한다면 이는 중앙의 표준어로 환원될 수 없는 공통어로서의 자산이자 문화적 공공재로서 유의미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음에서는 지역 사회의 역사적 사건과 방언의 미학적 의미가 긴밀히 상입되어 있는 황지우와 문충성의 시를 대표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방언의 시적 기능과 그 방향에 대해 감각해 보고자 한다.

 

3. 화인에서 화엄으로, 이방에서 십방으로 : 황지우의 광주 방언

 

우리는 모른 체했습니다. 우리는 불면의 밤을 잤습니다. 지친 사람들은 꿈을 꾸고 흉몽의 별똥들이 폭죽 쏘는 태평성대 국경 근처 다른 나라의 방언을 방청한 풀과 꽃이 자꾸 어떤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그 신호의 푸른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우리 허리에 걸친 기압골이 남단으로 내려갔습니다.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1」 부분(밑줄 필자)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지역방언은 우리가 공통어로 함께 사용해야 할 문화적 자산임에도 단수 표준어 정책에 밀려 끊임없이 주변화 되어 왔다. 특히 지역별로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한화 된 우리나라에서는 지역성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도 지대하였다. 해당 지역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시를 쓸 때 외부인이냐 내부인이냐의 위치에 따라서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어조와 태도가 상이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문학에 지각변동을 몰고 온 동시에 지금도 여진의 파동을 감각하게 하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이를 대표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움직였던 4·19와 달리 5·18 민주화 항쟁은 군부 정권의 봉쇄 정책에 영향 받았기에 그 무엇보다 한 지역이 국지적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이 컸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광주’라는 기호는 내·외부의 무수한 문학인들의 펜 끝에서 소재화 되었고, 광주의 지역성과 공간성은 곧 역사성과 시간성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또한 인터넷 시대인 오늘날도 ‘광주’는 지역성을 상징하는 기호이자 사회적 경향성의 상징인 다양한 사회방언들로 분화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시 안에서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는 어조와 태도는 당대의 시인들에게는 특히나 상이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위의 인용시에서 볼 수 있듯이 “태평성대 국경 근처 다른 나라의 방언을 방청한 풀과 꽃”이 보내는 절규의 ‘신호’는 이성복이나 기형도와 같은 타지 출신 시인들에게는 온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방청’하는 것이자 ‘다른 나라의 방언’을 듣는 것과도 같다. 같은 광주라는 지역을 이야기할지라도 그 아픔을 온전히 알 수 없는 타지의 시인인 이성복이나 기형도는 광주에서 겪는 고통의 나날들을 ‘그날’, ‘그해 여름’ 등과 같은 전이사shifter로 지칭한다. 발화자의 화용 상황과 맥락 정보에 따라 의미 내용이 달라지는 이러한 전이사들을 광주 지역 외부의 시인들이 ‘광주’를 말할 때 텍스트에 상당한 비중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시 쓰기는 광주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재현적인 묘사를 경계하면서, 광주의 외곽에서 미처 내부인과 함께 하지 못한 외부인의 죄의식과 거리감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형식이다. 또한 함께 겪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연대의 책임으로 이야기하되 함께 겪지 못한 물질적 고통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 윤리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 광주 지역이나 전라도 태생의 문인들은 동일한 의미의 지시어를 쓰면서도 지역방언의 언어적 특성과 기능을 적절히 활용하기에 광주의 시대적 고통에 실감을 부여한다. 아래 황지우의 시가 그러한 매력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워어메 요거시 머시다냐/요거시 머시여/ 응/머냔 마리여/사람미치고 화완장하것네/야/머가 어쩌고 어째냐/옴메 미쳐볼것다 내가 미쳐부러/아니/그것이 그것이고/그것은 그것이고/뭐/ 그것이야말로 그것이라니/이런/세상에 호랭이가 그냥/캭/무러갈 볼 놈 가트니라고/야/너는 애비 에미도 없냐/넌 새끼도 없어/요런/호로자식을/그냥 갓다가/그냥/캭/워매 내 가시미야/오늘날 가튼 대멩천지에/요거시 머시기다냐/응/머시여/아니/저거시 저거시고/저거슨 저거시고/저거시야말로 저거시라니/옛끼 순/어떠께 됫깜시 가미 그런 마를 니가 할 수 잇다냐/응/그 마리 니 입구녁에서 어떠께 나올 수 잇으가/낫짝 한 번 철판니구나/철판니여/그래도 거시기 머냐/우리는/거시기가 거시기해도 거시기라고 미더부럿게/그런디이/머시냐/머시기가 머시기헝께 머시기히어부럿는디/그러믄 조타/조아/머시기는 그러타치고/요거슬어째야 쓰것냐/어째야 쓰것서어/응/요오거어스으을

―「1983년/말뚝이/발설」 전문

 

우리나라의 가면극, 마당극에 등장하는 말뚝이가 화자로 설정되어 있는 이 시는 ‘열린’ 대화적 마당에서도 홀로 ‘독백’할 수밖에 없는 말뚝이의 심정적 고통이 잘(심지어 해학적으로) 드러나 있다. 광주에 대해 묘사한 외부인들의 시와 같이 이 시에서도 차마 세계에 말해지지 못하는 내용을 ‘발설’할 때에 다양한 전이사가 사용된다. 그러나 인칭대명사나 지시 대명사, 지칭어와 같은 전이사들은 명확하게 서술된 문장이나 고유명사와 병행되지 않아 그 의미가 보류되고 있다. 모조리 ‘요것’, ‘머’, ‘그것’, ‘이런’, ‘저거’, ‘거시기’, ‘머시기’, ‘그러타’ 등의 다른 전이사와 연쇄되면서 이들은 지시대상을 지칭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거시기’라는 명사도 되고 서술어도 되고 감탄사도 되고 비속어도 되어 다양한 감정과 모든 상황을 포괄할 수 있는 표현은 지역방언과 함께 쓰이면서 광주 출생의 내부인이 느꼈던 감정적 혼란이나 정확한 지시 언어로 발화될 수 없는 고통까지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비구체성의 언어들 속에서 의미는 지속적으로 지연되고 구술적인 리듬이 전체 시를 장악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의미의 구체적인 확정이 없음에도 “오늘날 가튼 대멩천지에”나 “그 마리 니 입구녁에서 어떠케 나올 수 잇으가”, “낫짝 한 번 철판니구나”와 같은 분노의 표현들이 결합되면서 ‘요것’들의 실체가 전체적으로 드러난다. 상대의 말의 내용이나 구체적 행동의 양상은 전혀 지시되지 않지만, 1983년에 펼쳐진 말뚝이의 독백은 지역방언들을 통해 발화되면서 그 분노의 대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마당극의 열린 대화형식을 차용하여 타인과의 대화적 상황을 설정하고 있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 화자의 전라도 방언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시의 구성도 80년대 광주의 분위기를 시화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광주의 지역방언과 1983년이라는 단서, 말뚝이와 같은 약호를 통해 독자들은 말해지지 않음으로써 ‘광주’의 사건을 말하고 있는 최적의 시적 궁합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방언의 사전적 의미는 ① 표준어와는 다른,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나 ② 한 언어에서 사용 지역 또는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 ③ 성령을 받은 신자가 습득한 일이 없는 언어를 무아의 상태에서 하는 말을 동시에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황지우의 시를 방언이라는 틀로 설명할 때 매우 흥미롭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위의 시에서처럼 방언 ①, ②, ③의 사전적 의미가 그의 시를 해명할 때 함께 연루되면서 시적 ‘화엄’을 이루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시인은 광주의 지역방언을 직접 도입하여 시를 생생하게 구술하기도 하고, 다양한 언어와 사회 계층들로 분화된 사회방언을 시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하며, 시 안에서 관습적으로 습득되지 않았던 이질적인 이방의 표현들을 다양한 형태의 해체시들의 형식 속에서 새롭게 방언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여기서 방언의 세 번째 의미는 주로 종교적인 틀에서 사용되지만 시가 발생되는 메커니즘을 비유하는 하나의 예시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종교적 방언’이란 자신의 한과 고통이 영적 황홀 상태로 변환되어 표출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롭고 이질적인 언어를 통해 신과 소통되는 체험의 순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참담한 삶의 고통을 유마적으로 견디며 이방의 언어를 열어가는 황지우의 시 쓰기 자세와도 유비될 수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의 방언을 통해 의도하지 않은 미지의 의미로 나아가는 존재의 체험을 그의 시가 언제나 열망하고 있듯이 말이다.

 

아무리 아무리 놉히,

놉히

날아도 새는

따 우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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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려앙근다

새가 나려앙거 자기 발자국을 [KUK, KUK] 찍는 지상,

자기의 화인火印 거튼 지상,

우로 나려와 새는

밥 먹고 잠자고 새끼 낳고, 죽는다

자기는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그런디 자기 형질을 물려바든 새새끼 새끼들이

다시,

아무리 아무리 놉히,

놉히

날아도 새들은

따 우로

나려와 앙근다

떠날 수 없나

―황지우, 「착지」 전문

 

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는 영화관에서 새 떼들이 날아가는 영상을 목격하지만 애국가가 끝나고 ‘각각 자기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티프가 방언을 통해 변주되고 있다. 지역방언이 중세 언어의 고어체와 함께 사용되면서, “아무리 아무리 놉히,/놉히/날아도” ‘따 우로/나려와 앙’글 수밖에 없는 이들의 길고 지속적인 역사가 더욱 생생히 체감되고 있는 것이다. 구술된 언어를 음성적 표기에 맞춰 그대로 전사하는 경우, 그 언어의 현장성과 직접성이 증가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표기 원칙과 다른 연음 표기로 인해 동음이의적 효과가 발생될 때가 있다. 이 시에서도 지상을 의미하는 ‘따 우’로라는 표현은 새들 ‘따위’의 비하적 어감이 추가되어 ‘화인’이 찍힌 채 날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좀 더 실감나게 보여준다. 시인에게 ‘광주’라는 지역의 사건은 그 어떤 화인보다 더욱 육체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러한 화인을 화엄을 통해 이겨내려는 시도는 다음의 시에서 구술적 말투로 묘사되기도 한다.

 

전남대학교 정문

문짝 없는 문, 해탈했네

아구탕처럼 입 쩍 벌리고 털난 철치鐵齒

아수라 아귀, 울퉁불퉁 종기난 쇠방망이 들고

무문 앞에 서 있고, 어?

없는 것들이 있네,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문 앞에는

어째서 꼭 나쁜 것들이 있을까?

(···중략···)

어메, 저 잡것들, 헛것들이 힘쓰네이

헛것들아, 헛것들아, 문 한 번 지나간다고

해탈할까마는 이 문은 지나가는 것이제

빠져나가는 구멍이 아니랑게

선남선녀들, 아름다운 설음舌音과 모음母音으로

일렀으나 아귀들, 헛것들인지라

―황지우, 「화엄광주」 부분

 

황지우의 시에서의 ‘화엄광주’는 “하늘과 땅을 용접하는 보라색 빛”이며, ‘전남대학교 정문’, ‘공용터미널’, ‘광주공원’, ‘광천동’을 거쳐 ‘끝없이 북으로 뻗친 비단강’과 ‘도청’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여기서 아귀들에게 이르는 선남선녀들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설음과 모음”의 지역방언으로 발화된다. 하나의 구호적 메시지로서가 아니라 화엄을 이루며 세계를 감싸는 ‘설음’과 ‘모음’의 언어는 파열음이나 파찰음과 대비되는 세계이다. 연속되는 이 시의 뒷부분에서는 금남로의 끝에서 끊긴 실을 찾고 있는 윤상원의 누이가 “오빠, 아직 이 실 끝에 있능가.”를 물으며, 언젠가 노동자 보살이 끄집어낸” “형광등 아래의 빛실”을 이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불의 화인火印을 ‘빛실’의 화엄華嚴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이 시의 일부에는 ‘아귀’와 ‘헛것’에게 고통당한 피투성이 시신들의 사진 두 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지역 경계 외부에서 광주를 바라보던 독자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은 살덩이들의 사진을 시각적으로 목격하면서 광주의 목소리를 지역방언으로 동시에 듣는 다감각적인 독서 체험을 하게 되며, ‘이방異邦’ 언어를 통해 “십방十方으로 큰 우레 소리 두루 내는 강처럼 흘러들고 흘러나오”는 광주를 상호주관적인 몸의 통각들을 통해서 기억하게 된다. 빛을 되먹이며 지금도 그 이름의 역사를 쓰고 있는, 즉 빛고을 광주의 ‘그날’을 함께 몸으로 살고 있는 존재들을 온전히 실감하면서 말이다.

 

4. 사라져가는 방언을 사라지지 않는 증언으로 : 문충성의 제주 방언

외부 지역에서 온전히 시화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을 내부인이 시화할 때 방언의 역할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황지우의 시에서처럼 지역이 품고 있는 고립적 사건과 상처를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시화하고 있는 또 다른 시인으로는 제주의 시인 문충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근작 시집 <허물어버린 집>(2011)에서는 황지우의 5·18보다 더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말투로 4·3의 흔적들이 노래된다. 그것도 지역의 방언을 통해서 말이다.

‘광주’의 역사적 사건이 언론과 군부에 의해 봉쇄되어 외부와 내부를 구분한다면, 제주는 “섬 하나가 딱 감옥이었주마씸(「섬 하나가 딱」)”이란 표현처럼 정치적 봉쇄는 물론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 속에서 이중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립된 환경에서 겪은 4·3은 지금도 현지 원주민들의 공포와 신경증을 가중시키는 현재적 외상trauma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외상과 대결하기 위해 문충성 시인은 제주의 모어母語를 놓지 않는다. 그리하여 제주 지역의 방언이 광주의 방언보다 더욱 가독성이 떨어지고 이질적인 느낌을 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서시격인 「4·3의 노래」를 비롯하여 시집의 상당수의 시편들을 제주 방언으로 발화하고 있다. 그는 시집의 후기에서 “제주어(제주 토박이말)가 사라져가”고, “제주인도 사라져가”는 오늘날, 이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 언어로 제주 4․3사태 등에 대한 몇 편의 시를 썼다”고 밝히며 ‘증언’으로서의 ‘방언’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힘어서도 그 무섭던 4·3때

군인들신디 분풀이 대상이 되어 죽는다는 건

참으로 눈감을 수 없는 일이여

무더기로 빨갱이로 몰아놩 총 쐉 죽였덴

하르방 할망 예펜 아이 헐 거 어시

의귀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놩 딱

죽은 어멍 죽은 줄도 모르고

젖 먹던 물애기도 있었덴 라라

4.3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크라!

―「현의합장묘玄義合葬墓」 부분

 

“딱”이라는 방언은 문충성의 시집에서 매우 자주 쓰이는 방언 중 하나이다. ‘모두’라는 표준어보다는 아무 이유도 없이 싹쓸이하여 죽어버린 억울한 주민들의 상황을 우리는 ‘딱’이라는 방언의 질감으로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또한 “어멍이 죽은 줄도 모르고 젖 먹던 물애기”의 모습이 묘사된다. 이러한 정경은 4·3의 비극성을 강렬하게 현상하고 있으며, ‘어멍’이나 ‘물애기’와 같은 방언이 시에 적절히 사용됨으로써 지역어가 주는 슬픔의 정조가 더욱 배가되기도 한다. ‘어머니’나 ‘엄마’를 좀 더 구어적인 어감의 ‘어멍’이라고 호칭할 때, 젖에 의존하고 목말라하는 갓난아기의 상황이나 언어 상황에 선행하는 주체의 어떤 심적 상태의 의미가 추가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어머니를 필요로 하고 젖에 갈급해하는 아이의 상황이 더욱 절실하게 전달될 수 있다.

이처럼 중앙의 표준어와 달리 지역방언은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의미의 잉여를 품는 경우가 많다. 개념적인 언어로 설명하자면 이러한 방언은 크리스테바가 언어의 육체적이고 생성적인 측면으로서 강조한 ‘코라chora’와 더욱 가까운 언어라 할 수 있다. 전상징계적인 언어의 육체를 일컫는 ‘코라’라는 개념은 “상징화되거나 재현될 수 없지만 여전히 주체에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라깡의 실재계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단순한 상징 기호로서 분절화되지 않는 이러한 언어의 속성은 어머니 자궁같이 의미를 낳으면서, 동시에 단일한 의미meaning를 부정·추방한다.

위의 시에서 사용된 ‘물애기’라는 표현에 집중해서 위 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이는 ‘갓난 아이’를 지칭하는 지역방언에 해당하지만, ‘갓난아기’라는 의미만으로 단순 귀착되지 않는 언어적 울림이 있는 표현이다. 마치 ‘물애기’는 소월 시의 ‘아우래비’(「접동새」)처럼 ‘오랍동생’과 ‘아홉 오래비’의 의미를 모두 품고 있는 설화적인 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소월 시의 ‘아우래비’에서 ‘아홉 오래비’를 둔 누이의 설화를 연상하면 그 ‘접동’이라는 음성적 울음이 더욱 처연하게 들리듯이, ‘물애기’는 물 많아 사연 많을 것 같은 제주의 설화들을 상상하게 하고, 눈이 시리도록 휘영청한 넓은 바다에 엮인 무수한 바닷사람의 사연들을 애처롭게 연상할 수 있게 하는 음성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 또 ‘물’과 ‘애기’의 조합은 어머니의 양수와 어울리고 있는 아이와 같이 태곳적의 심상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죽은 어미나 죽은 줄도 모르고 어미의 빈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기는 ‘현의합장묘’의 무덤에 함께 ‘합장’된 존재로 묘사된다. 어멍과 물애기, 즉 삶의 근원과 그 속에서 탄생되어 의존하는 대상 모두가 한 데 합장되어 있는 묘를 통해서, 무덤이자 감옥인 제주 전체의 이미지가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역 주민들은 근대 국가 교육의 기초를 제공하는 ‘국민학교’라는 공간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토벌 당했다. 그렇기에 “제주 섬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 중앙에 토벌되어온 제주 지역 주민의 역사는 교육된 ‘국민의’ 표준어로는 온전히 “번역할 수 없”(「그렇게」)다. 따라서 중앙의 표준어(다수어)를 통해 발화하기보다는 지속적인 소수어의 노래로 증언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라는 시의 제목처럼, 통합되었다고 상상하는 수평적 공동체로서의 “우리” 국가가 위계관계의 국가권력으로서 작용하여 다시 “우리” 지역을 토벌하는 유년의 체험은 시인에게 쉽사리 잊히지 않는 외상이 된다. 이로 인해 “10대 나의 소년은 낯선 겁에 질려 말조차 잃어버”(이 문장은 비문법적 통사로 구성되어 있어 오히려 말을 잃어버린 소년의 심경이 잘 드러난다.)릴 정도인 것이다. 그리하여 외지인에 의해 상업적으로 도시화되고 중앙 문단에 의해 언어가 ‘토벌’되는 상황에서, 시인은 도시적 에토스로 걸러진 문자적 언어보다는 실제로 역사 현장의 중심에 있었을법한 구술 언어를 통해 지역적 파토스를 노래하기를 택한다. 즉 사라지는 지역에서, 사라지는 언어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기억을 노래하는 것이다.

 

어버버어버버······, 어느 말몰레기 비바리는 두 손

맞대고 뺨에 옆으로 대어

잠자는 흉내 내며 사랑했다고

어버버어버버······, 볼록 나온 배 가리키며

침 흘리며 질질

바보 웃음 지으며

어버버어버버······ 무슨 말 하는 것일까

어멍 아방도 어시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우리 동네 곳곳을 왼발 절며 절룩절룩

왼손 못 쓰는 이 말몰레기 비바리는 누구와 사랑을 한 것일가 말은 못하지만

어버버어버버······ 웃으며 손짓으로

사랑해서 애 뱄다고

어디에 살고 있을까 절룩절룩

한 달도 못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애 아빠 될 사람이 육지에서 온 사람이라느니

죽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말몰레기 비바리여! 과연 죽었을까 4·3 터져

한창이던 때 60년도 더 지나갔는데

하늬바람은 섬을 뒤엎을 듯이 불어오는데 아아!

그 바람 속 살아오는 소리 절룩절룩

어버버어버버······ 어버버

―「병든 사랑」 전문

 

이 시에서도 ‘말몰레기’라는 지역방언은 ‘벙어리’라는 중앙 표준어의 표현보다 ‘말을 못하는 이의 사연’을 더 아름다운 어조로 전달한다. 비바리가 ‘어버버’하면서 미처 언어로 발화하지 못한 ‘사랑’의 감각은 ‘말몰레기’라는 방언의 의미 속에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 이것은 문자어로서는 ‘사랑’으로 표현되지만, 벙어리 처녀를 애 배게 하고 망가뜨리는 사랑의 실체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성도 이름도 알 수 없으며, 엄마 아빠도 없이 혼자서 절룩대며 돌아다니던 벙어리 처녀는 육지에서 온, 마찬가지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존재에게 강간당한 후 마을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은 벙어리 처녀의 삶은 4·3의 참상을 경험하고도 어버버하며 절룩거리고 있는 우리들의 ‘병든’ 모습을 비유하고 있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사회에서 최하위의 약자로 존재했던 비바리조차 4·3을 전후로 하여 마을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 이후 말몰레기의 ‘어버버’거리는 소리는 섬을 뒤덮을 듯 불어오는 하늬바람과 “바람 속 살아오는 소리”에 상입相入되어 제주 도서 지역의 모든 방향에서 불어온다. 황지우의 시에서처럼 ‘십방’의 모든 자연이 흘러들어와 ‘이방’의 방언에 깃들면서 한 편의 시를 이루는 것이다.

 

할로산과 흐르지 않는 남수각 시내/개떡 같은 초가 마을이/살았어요 검둥개와 조랑말/복숭게낭/돔박낭과 돔박생이/밤주리와 독수리/머쿠슬낭과 머쿠슬생이/름가메귀/종다리와 장꿩/고치밤부리아 왕밤부리/심방말축과 말축/왕재열과 재열/삥이/삼동낭과 멩게낭/사움과 퉤끼/설문대할망과 영등할망/탑바리/깅이/보말과 구살/구젱기와 점복/락과 우럭/게들레기/물꾸럭과 코셍이/각제기와 고등에/자리와 어엥이/오토미/테우/톨과 /메역과 감태/제주 바당과 이어도/서축항과 동축항/사라오름과 벨도오름/청비와 문도령/도새기와 능구렝이/두테비/게염지와 벌들과 이따금/반쪽짜리 무지개 걸리는 찢어진 거미집과/파란 하늘 허연 구름들/반짝반짝 흘러가는 길 잃은 별똥별과 은하수/초집 처마 아래 양왜들과/할망과 하르방/어멍과 아방이 살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언제 딱 잃어버렸는지/남문통/4·3 때 죽은 동네 사람들/기억나지 않네요 이제 와/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 없어요/모두 저 세상 가서/만날 수 없는 건가요/아무것도 없어요/아무것도 노란 빙애기도/보랏빛 개똥벌레들 롱이도/조리조리 알몸뚱이 돌킹이도

―「회귀」 전문(/표기는 필자)

 

구연동화처럼 ‘~가 살았어요’로 시작하는 이 시는 “할망과 하르방/어멍과 아방이 살았”던 시대의 삶의 조건들을 제주의 방언과 제주의 정경들로 나열하고 있다. 다양한 세목들이 불규칙한 호흡과 자유연상에 의해 병렬되어 나타난 이러한 단연체 시에서는 의미의 수직적 위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과 어울린 자연의 세목들이 위계 없이 일일이 열거되어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뽐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초가와 어울려 살고 있는 ‘집’과 삶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김수영이 시와 산문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과 그 ‘무수한 반동’들을 열거했듯이, 문충성 시인도 가장 아름다운 제주어들을 기억 속에서 잊지 않겠다는, 또 현실 속에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물목들을 시 안에서 일일이 호명하는 것은 그의 시가 빈번히 취하고 있는 전략이다. 이질적인 세목의 호명을 통해 언어의 리듬과 억양이 전경화되고, 단어 하나마다 품고 있는 미지의 의미와 에너지의 운율적 기운이 시를 비옥하게 한다. 문자어가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기호생성적 과정이 구연적 시 형식 속에서 돌출되기도 한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아름다운 리듬들과 감각적 에너지를 깨워주는 존재들이 4·3을 통해 단절되고 ‘딱 잃어버’린 상황과 만나면서 소기의 시적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생명의 에너지와 리듬을 긴 호흡으로 느끼다가 그것이 추방된 현실을 돌연 맞닥뜨리게 되는 시적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이 시에 묘사된 역사적 상흔을 매우 절박하고 애처로운 현실로 공감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제주 방언들은 단순히 하나의 대상물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학살이 머물렀던 자연이자 사연이 깃들었던 장소로 기능한다. 무질서한 형식으로 언급된 듯 보이는 이 다자의 세목들은 모든 것이 동시에 사라져버린 제주의 섬 전체의 역사적 사건과 복잡성의 질서로 얽혀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어원과 기원들을 상상하게 하는 에너지 넘치는 방언들을 일일이 호명함으로써 잃어버린 존재들을 역사와 사연의 굿판에 다시 불러낸다. 시인의 구술을 통해 ‘저 세상’으로 추방된 죽은 언어들은 위로되고, 그리하여 ‘여기’의 생명을 얻어야 하는 존재들은 더 이상 잃지 말아야 할 것들로서 분명히 기억된다. 이처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중앙어에 의해 시각적으로 관찰되던 ‘말몰레기’의 언어를 육체성을 지닌 방언들로 새롭게 열어나갈 때, 시는 구체성과 상상력을 동시에 부여받는 장소이자 지역의 역사를 편편이 증언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5. 공통어와 공공재로서의 지역방언

지금까지 역사적 상흔이 있었던 지역에 방언이 연고되면서 문학적 의미를 획득하는 시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황지우와 문충성이 자신의 출신 지역이자 정신적 기원이 되는 광주와 제주를 역사적 사건 속에서 지역의 말로 구술해온 과정은 말해지지 못한 것을 시화하는 방법적 전략이자, 우리 시의 지경을 확대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지역방언을 사용한 시들이 보여주는 문학적 성과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오늘날 시의 영토에서 지역방언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문단의 권력화 문제나 시인들이 현대적이고 세련된 감각을 선호하는 경향이 주요한 원인이 되겠지만, 이러한 경향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 장르의 형식적 특질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시 장르는 전통적으로 1인칭 화자의 자기고백에 근거한 짧은 형식을 취하는데, 오늘날 그러한 1인칭 화자의 삶이 지역 사회보다는 근대 도시의 삶에 천착해 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도시문화가 삶의 표준이 되므로 자기고백의 내용도 이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형식적 특성상 시는 소설 장르에 비해 지역 문화가 깃들인 방언 사용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운 편이다. 소설이나 희곡, 영화와 같은 장르에서는 발화 형식이 각자의 역할에 따라 분담되기 때문에 주인공은 표준어를 쓸지라도, 그 외의 조연이나 단역들은 개성적인 방언을 사용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의 자기 발화’가 주요한 형식인 짧은 분량의 시에서 사투리의 말투나 공감력이 떨어지는 어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표준어 활자체가 인쇄자본주의에 완벽히 점령된 오늘날에는 타 장르보다 위험 부담이 큰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변동과 분화가 이루어지는 오늘날의 세계 속에서는 지역방언보다는 사회방언의 특성들이 시에 더욱 많이 발견될 수밖에 없는 추세이다. 일상어와 시적 언어의 구별이 더욱 줄어든 현대 사회의 시에서는 도시 문화가 다수 문화가 되어 문화의 대부분을 주도,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통신 언어나 집단의 은어, 속어, 외래어, 외국어 등을 통해 사회 계층성이나 성별성, 세대성, 인종성 등의 표지를 드러내는 사회방언들이 나타나며, 이러한 현상은 해체적이고 분열적인 시를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시에 더욱 더 전면화된다.

이러한 지역방언의 퇴조 속에서 시는 더욱 난해한 형식으로 향하고 있다. 이전의 근대시에서는 지역방언이 시어로 사용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낯설게 하기의 기능을 하여왔지만 이러한 시들이 점차 퇴조하면서 젊은 세대의 시에서 낯설게 하기의 기능은 통사적 새로움을 추구하는 차원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시어 자체를 통한 낯설게 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낯설고 새로운 느낌을 주기 위해 문법적 해독이나 통사적 이해가 어려운 문장 구성 형식을 띤 자아분열의 시가 급증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하게 분화된 사회방언이 이를 대체한다고 해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역방언이 갖는 특유의 문학적 기능도 간과할 수는 없다. 표준어와의 관계를 통해 공통어의 자산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증언하는 ‘정밀경’이 되는 지역방언은 시의 영토 안에서 공공재로서 더욱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점차 방언학자들의 학술적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방언에 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노력은 많은 것이 신속히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는 무엇보다 필수적인 작업이다. 또 지역방언이 우리 시에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맛을 부여하고, 기존의 축소된 의미 영역들을 보수하며, 또 이를 넘어서는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인쇄자본주의 속에서 지역의 방언 문학과 연계된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문제도 앞으로 시급하게 고민할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노지영∙1979년 서울 출생. 2010년 ≪시인≫과 ≪내일을 여는 작가≫로 평론 활동 시작. 반년간 ≪리얼리스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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