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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특집/신진숙/대중가요와 시-말해진 시와 쓰여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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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107회 작성일 13-03-1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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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현대시의 구술성과 문자성

신진숙|대중가요와 시-말해진 시와 쓰여진 시

 

 

시적 언어를 말과 문자로 나누는 것은 가능한가. 그것은 마음과 언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실존적 현상학자로서 메를로-퐁티는, 언어를 마음이라는 내적 삶을 표현하는 부수적이고 외피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고전적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 코기토는 신체적인 것이다. 신체적 공간성이 없다면, 주체는 없다. 그래서 주체는 언제나 이미 신체적 주체로서, 주체와 타자 ‘사이’, 경험과 이성 ‘사이’, 마음과 몸 ‘사이’에 존재한다. 즉, 메를로-퐁티는 사이라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제3의 실존을 상상한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가면, 말을 즉각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문자를 해독해야 할 이차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순수 사고 역시 단어들로 가득 차 있는 하나의 독백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문자든, 말이든, 결국 그것은 마음과 몸,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상호 얽힘, 즉 상호주체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구체적인 실존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시 역시 마찬가지다. 즉, 시는 모호한 상태로 존재한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불확정적인 상호 주체성에 의해 구성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화자/글쓴이의 의도를 해독하는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해독의 준거 또한 투명하게 제시될 수 없다. 시의 실존은 읽는 행위, 바로 그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화자와 청자(독자) 사이에 상호작용이 없다면, 시는 실존할 수 없다. 시적 의도 또한 이러한 상호작용에 앞서 존재할 수 없다. 감각의 장에서 발생하는 느낌에 따라 사고의 흐름은 얼마든지 다르게 전개될 수 있다. 의미는 감각적 느낌에 따라 무한히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구술성과 문자성은 이러한 상호 작용에서 어떤 차이와 공통점을 지니는가. 말해진 시와 쓰여진 시는 느낌과 성찰의 강도가 같은가 다른가. 기실 말은 문자와 달리 과잉될 경우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말은 문자에 비해 자연적 발화 행위에 가깝고, 몸짓과 표정,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다차원성을 띤다. 따라서 의미 생성 과정 자체를 일원화할 수 없다. 반면 문자는 이러한 구술적 발화행위의 혼란을 감소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일상적으로 문자는 무질서한 구술적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말과 문자 모두 주체(나)와 타자(너) 사이의 상호 작용 안에 놓일 때 비로소, 말 혹은 문자가 된다. 의미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서적 뉘앙스들을 통해 비로소 실재한다. 사고란, 느낌보다 선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소통의 과정은 시와 노래를 비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시와 노래 모두 정서적 소통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시는 노래이지만 노래이기를 멈춘 노래이다. 특히 대중가요가 추구하는 정서적 몰입 행위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노래이면서 노래가 아닐 수 있게 된 것일까.

 

서정과 신체적 공간

소리들이 지닌 감성적 표현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음악이다. 음악은 보편적인 언어이며, 말이 행할 수 있는 혹은 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보여준다. 음표들의 반복과 흐름을 따라 가다보면, 소리는 어느 순간 마음과 몸 안에 각인된다. 소리라는 물리적 실존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다. 음악이 주는 감각적 울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초대된다.

원시 시대에는 음악이 주는 효과가 더욱 자명하다. 인간의 말과 음악의 결합은 주술적이고 신비한 존재를 향한다. 그것은 원초적 소리에 리듬을 부여하고 반복함으로써 일상적인 공간을 해체한다. 일순간 감정들이 폭발하듯 불가해한 말들이 터져 나와 인간을 금기로부터 해방시킨다. 감정을 정화하고, 무질서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집단과 개인, 세계와 자아는 음악을 통해 하나가 된다. 음악적 주술에 걸린 언어를 통해 비일상적 공간이 축제처럼 개봉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매우 폭력적인 경험이 될 수도 있었다. 시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대의 시 역시 음악을 제거할 수는 없다. 여전히 시는 세계를 문자화하는 만큼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음악화하기를 희망한다. 차가운 기호에 리듬과 운율을 부여하고 이야기와 감정을 불어 넣고자 노력한다. 음악적 계기를 통해 시적 언어는 타자와 주체가 맺었던 가장 원시적 동일성을 회복하려 한다. 그럴 때, 시는 오래된 음악적 공명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해내곤 한다. 시인은 자연적인 표정과 음색을 지닌 구술적 행위를 통해 타자와 소통한다.

이러한 구술성은 서정적 언술체계와 특히 조화롭다. 구술성은 무표정한 기호 속에 표정을 담는 역할을 한다. 즉, 구체적인 성대를 가진 문자들의 체계를 제공한다. 음색과 강도, 느낌과 감정을 지닌 하나의 살아 있는 신체적 공간으로서의 언어.

그렇다면 언어가 만들어내는 신체적 공간이란 무엇인가. 메를로-퐁티는 몸이란 정신의 외부에 연결된 부분들의 결합이 아니며, 몸은 “능력들의 자발적인 종합, 신체적 공간성, 신체적 통일성, 신체적 지향성”을 펼쳐 보이는 주체 자체라고 말한다. “표현과 이해는 신체를 통하여 최초로, 제일 먼저 달성된다.” 즉, 언어 사이의 신체적 공간이란 단어에 각인된 경험의 흔적과 뉘앙스 등이 청자(독자)의 감각체계와 연결되어 형성되는 몸적 공간을 일컫는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체적 공간은 그 자체로 추상적 개념의 표현이 아니라, 의미 그 자체라는 점이다. 의미의 깊이는 신체적 공간의 두께와 직결된다.

 

잊지 못해 너를 있잖아

아직도 눈물 흘리며 널 생각해

늘 참지 못하고 투정 부린 것 미안해

나만 원한다고 했잖아

그렇게 웃고 울었던 기억들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져 지워지는 게 난 싫어

(반복)어떻게든 다시 돌아오길 부탁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랄게

기다릴게 너를 하지만 너무 늦어지면은 안 돼

멀어지지 마 더 가까이 제발

―대중가요 「제발」의 가사 부분

오늘 나는 가난해야겠다

그러나 가난이 어디 있기나 한가

그저 황혼의 전봇대 그림자가 길고 길 뿐

사납던 이웃집 개도 오늘 하루는 얌전했을 뿐

우연히 생겨난 담 밑 아주까리가

성년이 되니 열매를 맺었다

실하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어디 또 그런 데 가서 그 아들 손주가 되겠다

거짓마저도 용서할

맑고 호젓한 가계家系

오늘도 드물고 드문 가난을 모신,

때 까만 메밀껍질 베개의

서걱임

수壽와 복福의

서걱임

―장석남, 「가난을 모시고」(<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가요와 시를 같이 예로 든 것은, 동일한 구술체계이지만 소리를 운용하는 방식이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가요 「제발」은 후렴구의 반복과 어미의 반복을 통해 상실의 슬픔을 강조하고 있다. 반복은 멜로디와 결합하면서 더욱 더 강렬한 슬픔을 자아낸다. 장석남의 시 「가난을 모시고」 역시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단어와 어미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 반복의 원환은 처음과 마지막이 다르다. 말하자면 가요는 헐벗은 반복, 즉 감정의 동일한 것만을 반복한다. 슬픔은 즉자적이다. 반면 시의 반복은 시간의 흐림이 공간과 신체 안에 기입된 ‘차이의 반복’이다. 슬픔이 다른 느낌으로 변환된다. 즉, 시간의 반복된 흐름 속에서 하나의 씨앗이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듯, 다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는 발화된 단어들이 청자聽者의 감각 장場과 결합하여 하나의 구체적인 신체적 공간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난해야겠다”라는 독백은, 화자가 깊은 밤 고요 속에서 듣는 청각적 영상, 즉 “서걱임”과 그 정서적인 뉘앙스를 통해 구현된다. 시인이 ‘가난을 모시는 호젓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아와 세계 사이에 신체적 공간을 마련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대중가요와 서정이 비슷하지만 결코 동일할 수 없는 이유이다. 대중가요의 거의 모든 가사는 일방적인 의미 회로 안에서 반복함으로써 의미의 새로운 생산이 차단한다. 가요는 의미 생성을 위한 모험을 수행하지 않는다. 차이를 봉합하고, 세계와 자아를 동일한 하나의 정서 안에 포섭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가요의 거의 유일한 목표처럼 보일 때도 있다. 새로움의 차이는 성공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지만, 가요의 본질은 아니다. 대중이 원한다면, 무한히 같은 것이 반복되어도 상관없다. 자본의 이성이 시적 이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말해진 시는 화자와 청자, 세계와 자아 사이에 신체적 감각 장을 마련함으로써 닫힌 회로를 뚫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이는 현대세계의 범람하는 언어 속에서도 시가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지탱하는 토대 중 하나이리라. 서정이 지닌 구술적 가능성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이한 문자들의 음역音域

근대 이후 시의 문자성은 구술성보다 강조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인쇄술과 시대와 사회관계 구조의 변화와 연관된다. 구술적 단순성은 현대인의 복잡한 감정과 세계성을 구현하는 데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쓰여진 시는 직접적인 감각들을 성찰함으로써 세계와 자아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자 한다. 자연적 감성과 경험의 불투명성을 투명한 것으로 만들어 나간다. 쓰여진 시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신체적 공간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경험의 장을 뛰어 넘어 자유로운 지적 사유를 촉구하기 위해서이다. 음성이 아닌 기호, 소리가 아닌 울림이 시작된다. 이제까지 듣지 못한 기이한 문자들의 음역이 개봉된다. 기이하고 낯선 문자들이 조합되고 또 실험된다. 한때 시는 문자와 소리를 연주함으로써 음악에 도달했지만, 이제 그것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환영으로 느껴질 뿐이다. 우리 시대의 시들은 대부분 조화가 아닌 불화의 방식으로 세계와 소통한다. 자본의 저속한 합리성과 대중의 무한한 욕망 사이에서 시는 화음이 아닌 불협화음을 선택한다.

 

눈동자를 여러 개 눌러놓은 맛이지

어제와 오늘이 기분 나쁘게 손을 잡는다 흰 접시 유리잔은 나와 상관없는데 깨진 미래가 있는데

정말 나는 먹고 마시고 흔들고 해야 하는가

목구멍이 아직도 좁고 검다

많은 표지판이 사람들을 가리킨다

명령대로 하면 배가 너무 부를 텐데

기분이 뒤늦게 도달하는 곳이어서 머리카락을 씹는다 순서대로 접는다면 목은 나중에 꺾이고

혀는 가장 먼저 고부라진다

감정을 생산하느라 오늘도 다이어리 지갑을 잃어버렸다 종이비행기의 자세였다 거대한 손에 들려 있었고 믿지 못할 손이었지만

어제의 눈동자가 사람들의 입속에서 터진다

미래는 이런 맛이 아니지 중얼거린다

―이근화, 「디어초콜릿」(<차가운 잠>)

 

이근화의 시 「디어초콜릿」은 구술적인 시에서 볼 수 없는, 문자적으로만 존재하는 단어의 시각적 환상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말하자면, 단어는 신체적 공간성을 지니지 못한다. “눈동자를 여러 개 눌러놓은 맛”이란 시각적일 뿐만 아니라 결코 감각할 수 없다. “어제의 눈동자가 사람들의 입속에서 터지”는 풍경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시인은 감각의 현재성마저 부인한다. 감각은 “미래”에 속한다. 초콜릿이지만 달콤하지는 않은 초콜릿처럼. 아마도 그것은 구술성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낯설고 기이한 감정의 영역 때문일 것이다. “기분이 뒤늦게 도달하”고, “명령대로 하면 배가” 부르지만, 불복한다면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 실재로서의 이 삶은 감각의 미혹을 벗어날 때에만 비로소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이고 원시적인 형태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신체적 공간은 의심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신체적 지향성이나 통일성도 가장된 것일 수 있다. 하여 이근화의 이 시는 허용된 소리가 아닌 불가능한 시각에 의존한다. 화자와 청자 사이에 환상에 의한 새로운 감각의 장을 형성한다. 보이지 않고 감각할 수 없는 것들을 통해 오히려 현재적 삶을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로 쓰여진 시가 걸어가고 있는 일반적인 길이기도 하다.

또 다른 시 김승일의 「우리 시대의 배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주인은 셔터만 올려놓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4열 횡대로 스무 개씩 쌓인 아시바, 비쩍 마른 사람의 팔뚝만 한 철사들 거리의 어느 가게에도 주인은 없다 나라고 알 수 있나 그런데도 쇠가 조용히 넘치고 있는 이유를

자 이제 나는 연탄난로 뒤에서 낮잠을 잔다 내가 누울 때면 꼭 꼭 이웃 가게에선 고속 절단기를 돌리기 시작하지 옆집 아저씨가 왔나? 나는 입에 단내를 풍기며 달려가지만 한 번도 그가 돌아온 적은 없다 붉은 굴렁쇠 하나가 저 혼자 입구로 굴러오다 철퍼덕 넘어질 뿐

토이 스토리에 나오는 몰래 움직이는 이야기들처럼 철들은 가만히 있다 날마다 빈 트럭이 와서 저들의 친구들을 한가득 싣고 갈 때에도 그들은 참고 있다 파이프들에게 친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 수 있는 것 도시는 어차피 주인이 부재한 파이프들을 따라 한 몸으로 맴돌고 있는 것이지

아마 주인도 친구를 사귀러 갔을 거야 나는 쉽게 생각하기로 한다 바퀴가 한 개뿐인 구루마를 밀어보면서 문이 떨어져 나간 새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낮잠을 잔다 불 꺼진 유곽의 창문이 그렇게 하듯 검고 단단한 돌멩이가 될 때까지 동그랗게 동그랗게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김승일, 「우리 시대의 배후」(<에듀케이션>)

 

어떤 삶, 어떤 감정은 서정적 구술성과 음악적인 계기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신체적 감각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불가해한 감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어로 표현될 수 없다. 호명은 불가능하다. 실체가 없는 이상한 감각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있다. 일상적 공간 이면에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쇠-파이프로 상징되는 직선적 감각들은 실제로 “동그랗게 동그랗게” 오무린 감각과 조화할 수 없다. 이 둘을 결합한 둥근 굴렁쇠는 금세 쓰러진다. 불화만이 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정서다. 세계는 쇠 감옥과 같다. 이곳에서 나는 다만 “검고 단단한 돌멩이”일 뿐이다. 어떤 효용적 가치도 이익도 설득시킬 수 없는. 때문에 “주인”으로서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도시인에게 해당된다. 도시의 주인은 없다. 도시는 기의로부터 해방된 기표의 공간으로 변한다. 그것은 타자를 현상할 수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타자는 분명 거기 있지만 만날 수 없다. 존재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옆집 아저씨”처럼. 따라서 소통의 방식 역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소통을 위한 화자와 청자 사이의 신체적 공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된 서정의 악기들은 음악을 멈춘다. “친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어지지만 ‘느낌’은 생겨나지 않는다. 대면을 통한 구체적인 관계, 정서적 친밀감과 깊이는 중요하지 않다. 화자와 청자(독자) 사이에는 감각의 장을 공유할 수 없다. 세계는 “빈 기쁨”으로 충만하다. 불화는 결코 봉합되지 않는다. 기이한 환영들이 감각을 대신한다.

 

느낌의 성찰성

그러나 시의 구술성과 문자성은 하나이다. 시적 울림에서 본다면, 구술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구술성과 문자성은 현대시의 두 가지 실존적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악이지만, 음악이 될 수 없는 시의 고유한 모순에서 비롯한다. 시와 세계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공명 관계를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구술성과 문자성은 분할할 수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정서적 공명과 지적 성찰이 평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즉, 시는 감각 장 안에 머물며, 따라서 의미보다 앞서는 것은 느낌이다. 시적 의도 이전에 느낌의 장이 존재한다. 만일 신체적 느낌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시적 성찰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느낌과 성찰은 분리될 수 없다, 느낌이 자랄수록 성찰할 수 있는 정신 또한 자라난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즉 그는 정신과 몸은 하나의 실체의 두 양태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신과 몸이 동시에 존재한다. 정신은 사물과 인간의 몸에 대한 타당한 인식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외부 물체의 자극을 받을 때 비로소 정신이 작동한다. 이것은 시적 소통에 대한 중요한 암시이다. 구체적인 느낌의 장이 사유의 장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말해진 시와 쓰여진 시, 느낌과 성찰은 분리될 수 없다. 사고와 신체 사이에는 내적이고 본질적 연관이 존재한다. 메를로-퐁티 또한 이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는 말한다. “모든 의미는 신체 안에 거주한다.”라고.

이 때문에 대중가요가 지닌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느낌의 영역은 시적 공감의 본질과 동일할 수 없다. 물론 예외적 상태는 있다. 아름다움과 성찰을 동시에 들려주는 노래들. 그러나 일반적 맥락에서 대중의 감정을 위로하고 욕망을 주입하는 대중가요에서 성찰의 지속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단 몇 초 안에 대중을 사로잡아 상품의 구매력을 확인받으려는 자본의 논리는, 가요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늙은 고양이 한마리가 아름답게 무뎌진 발톱으로 분리수거된 비닐을 뜯자 구름과 모래가 뒤섞인 저녁이 툭 터져나왔다. 오래 자란 수염을 태운 혹독한 냄새를 풍기며

오랜 정전 속에서 매일 우리는 함께 모여 촛불을 불었다. 훅 태양이 한쪽으로 길고 까맣게 누운 사이, 우리집에는 검은 모자를 뒤집어쓴 이방인처럼 어젯밤이 찾아와 뜬눈으로 묵어갔다. 꺼진 줄 알았던 촛불은 되살아났다.

 

촛불과 촛불 사이에 놓인 침대

입술과 입술 사이로 빼문 허연 혀처럼

흘러나와 있는 단 한 조각의 미명

수북한 음모는 우리를 길 위에 그려넣던 그가

너무나 지루해서 연필을 쥔 채 깜박 졸았던 흔적

 

창문이라는 맨홀 속으로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서로 뒤섞이며 떨어진다. 지붕 위로 촛농처럼 비가 떨어진다. 떨어지던 비가 허공의 줄기를 확 잡아 채 피운 나무 잎사귀들. 빗줄기를 잔뜩 거머쥔 가로수 가지마다 차갑게 젖은 말줄임표가 밤새 빼곡히 돋아 있다.

내 머릿속에는 쓰러진 모래시계 하나 있다. 창문을 등지고 모로 누워 뒤척이면, 망자가 원탁 위에 뒤집어놓고 간 모래시계처럼 그제야 한쪽 귀에서 한쪽 귀로 흘러들어 쌓이는 구름.

 

머리맡에 죽은 향유고래 한마리가

거대한 느낌표처럼 떠밀려와 있다

늙은 고양이의 무뎌진 발톱이 아름다운 정식처럼

온몸에 박힌 구름 한마리가

창문까지 떠내려와 있다

―김중일, 「불면의 스케치」(<아무튼씨 미안해요>)

 

이 시는 느낌과 사유의 궤적이 평행하다. 느낌의 두께만큼 사유의 과정이 존재한다.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신체를 토대로 하는 공간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사유의 공간 역시 새롭게 마련된다. 그러나 어떤 감각도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고백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의 독백에 가깝다. 상실에 대한 슬픔이 존재하지만, 명명할 수 없기에 그것은 실체가 없다. 따라서 화자와 청자가 상호 소통할 수 있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린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 마련된 협소한 환상의 감각 체계를 통과해야 한다.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감각들이 부유하는 특이한 신체적 감각 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이 시에서는 실체로서의 시간은 없으며, 청자는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 시가 추구하는 소통에 참여할 수 있다. 유일한 삶의 근거로서의 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규칙적으로 규준화된 시간적 공간 역시 표현되지 않는다. 내 머릿속 “모래시계”와 망자의 “모래시계”는 동시에 흘러간다. 산 자의 시간과 죽은 자의 시간이 공존한다. 특히 불면이란 시간의 혼란 속에서 모든 존재의 정립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속성을 지닌다. 불면은 감각들을 일상적인 공간 속에 배치하지 못한다. “허공의 줄기를 확 잡아 채 피운 나무 잎사귀들”은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모호한 공간 속에서 피어난다. “늙은 고양이의 무뎌진 발톱이 아름다움 장식처럼/온몸에 박힌 구름 한마리/창문까지 떠내려와 있다”라는 문장은 실재하는 감각들을 바탕으로 기술되었지만, 실체는 없다. 시각적이지만 시각을 벗어나는 기이한 느낌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 복잡한 느낌과 함께, 그것을 통해 세계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실재와 마주한다. 감각기관 없는 느낌들, 공간 없는 움직임들, 만질 수 없는 신체들(가령 “머리맡에 죽은 향유고래 한 마리”)을 통해 해답 없는 사유의 흐름이 개방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문제의 초점은 언어의 개방성이 되어야 한다. 말 혹은 문자를 통해 무엇이 개방되는가. 시가 무엇을 열어 놓는가. 어떤 것이 시작되는가. 그것은 대중가요와 시를 비교할 때 더욱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어떤 것이었다. 물론 대중가요와 시를 직접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가요들은 언젠가 유행이 지나면 폐기될 것이다. 그 휘발성의 언어들을 시의 운명과 견주는 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진단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되는 언어 과잉의 시대를 검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구술성과 문자성을 넘어 전자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언어의 변화와 현대시가 벌이는 불가능한 싸움에 대해 언급할 기회를 가질지도 모르겠다. 만일 자본주의의 맥락 안에서 2000년대 시가 만드는 불가해한 파열, 상품이면서 상품이기를 거부하는 기이한 행위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신진숙∙2005년 ≪유심≫으로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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