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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하종오의 연작시/님시경 제2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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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722회 작성일 13-03-1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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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제2시경 제1작품 외 11편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반지하방에서 겨울 내내 얼지 않으려고 웅크리고 지내야 하는 처지가 그 님께서는 서글퍼지셨습니다. 고향집 뒤란 구덩이에 묻어 둔 무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 님께서 무를 뽑아 리어카에 싣고 몰래 집집마다 헛간에 갖다놓고 떠난 지 한 철도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웃들이 자신을 잊진 않았겠지만 무를 꺼내 먹으려고 하진 않을 것입니다. 반지하방에 홀로 있는 자신이 구덩이 속의 무와 다르지 않는 신세임을 그 님께서는 알아버리셨습니다. 이불 덮어쓰고 누우신 그 님께서는 봄이 올 날들을 짚어보셨지만 그럴수록 눈보라에 덮이는 논밭만 자꾸 아른거렸습니다.

 

 

 

 

제2시경 제2작품

 

 

자식이 찾아오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반지하방에서 추위에 떨면서 그 님께서는 자식에게 쟁기질 하는 법과 흙 고르는 법과 씨 뿌리는 법을 가르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 님께서는 땅에서 움이 돋아날 때면 기운이 솟고 꽃이 필 때면 주름이 펴지고 열매가 맺힐 때는 몸이 가벼웠지만 잡초 없애는 일과 해충 죽이는 일과 새 쫓는 일이 지긋지긋하여서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자식만이라도 그 님께서 배워 오신 농사와는 다른 일을 배워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손발에 흙 묻히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자식을 대견해 하신 그 님께서는 논밭을 팔아서 자식에게 넘겨주셨고, 챙겨 떠나간 자식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반지하방에 몸져눕고 나서야 그 님께서는 자식이 쟁기질하는 법과 흙 고르는 법과 씨 뿌리는 법을 몰라서 생긴 사태라는 걸 어렵게 아셨습니다.

 

 

 

 

제2시경 제3작품

 

 

반지하방에서 잠드신 그 님께서는 눈보라 치는 밭에 서 있는 농부를 보셨습니다. 겨울에는 밭을 가만히 쉬게 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농부가 어째서 밭에 나갔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 님께서 다가가셨더니 홀연히 농부가 사라지고 눈보라도 그친 밭에는 작년에 뽑지 않은 배추들이 꽃을 피웠습니다. 그 순간 밭에 봄기운이 넘쳤습니다. 한 해 농사를 잘 마무리하려면 씨앗부터 챙기고 한 해 농사를 잘 시작하려면 씨앗부터 받아놓는다는 것을 아시는 그 님께서는 배추들이 씨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런 동안 다른 밭에 여전히 눈보라가 치고 있어 그 님께서 걸어가셨더니 그 순간 눈보라가 그치고 작년에 뽑지 않은 고추들이 꽃을 피웠습니다. 또 다른 밭에도 여전히 눈보라가 치고 있어서 그 님께서 걸어가셨더니 그 순간 눈보라가 그치고 작년에 뽑지 않은 콩들이 꽃을 피웠습니다. 그 님께서 걸어가는 밭마다 순식간에 봄기운이 퍼져나가기에 아예 들판까지 나가시니 논마다 논물이 찰랑거렸습니다. 그 님께서 신이 나 모내기를 하려고 모판 찾아 두리번거리시니 홀연히 농부가 나타나 그 님에게 욕을 해대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그 님께서도 마주 욕을 하다가 잠에서 깨시었습니다. 자기 땅을 버린 자는 남의 땅에 들어가면 안 되는 법이었습니다.

 

 

 

 

제2시경 제4작품

 

 

이제 노쇠한 그 님께서는 문득 젊은 아버지가 그리워지셨습니다. 비 오고 개는 때를 아는 법과 바람 불고 그치는 때를 아는 법과 볕이 뜨거워지고 식는 때를 아는 법과 눈 내리고 녹는 때를 아는 법을 그 님께 가르쳐 준 젊은 아버지는 또한 나이 들면서부터 논에서 빗물을 받고 빼는 법과 바람이 다니는 고랑의 너비를 만드는 법과 볕의 양과 온기를 아는 법과 눈을 보며 흉년풍년을 짚는 법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여서 해마다 대풍을 이루신 그 님께서는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세상을 만드는 분이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아버지한테서 양식을 스스로 기르고 거두고 먹는 살림살이를 배운 그 님께서는 많이 기르지 않는다면 더 많이 거두어서는 안 되며 많이 거두지 않는다면 더 많이 먹어서는 안 되며 많이 먹지 않는다면 더 많이 남겨서는 안 되는 세상살이를 스스로 터득하셨습니다. 봄에 노쇠한 아버지가 소에게 여물을 먹이면 정정한 그 님께서는 쟁기질을 준비하셨고 여름에 노쇠한 아버지가 그늘에 들면 정정한 그 님께서는 풀을 매셨고 가을에 노쇠한 아버지가 먼산바라기를 하면 정정한 그 님께서는 타작을 하셨고 겨울에 노쇠한 아버지가 군불을 지피면 정정한 그 님께서는 장작을 패셨습니다. 노쇠한 그 님께서 젊은 아버지를 떠올리실수록 차가운 반지하방에서 온몸이 자꾸 훈훈해졌습니다.

 

 

 

 

제2시경 제5작품

 

 

밤새 눈이 동네를 덮었습니다. 아침 일찍 그 님께서는 빗자루를 들고 나와 누구도 밟지 않은 눈을 쓸어 치우셨습니다. 가가호호를 이어주는 골목에서 그 님께서는 이웃들이 오가며 가가호호에서 출발하여 가가호호에 도착하는 모든 길을 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대문을 열고 나오는 이웃들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그 님께서만 골목을 오가며 모든 길을 보셨습니다. 고향에서 폭설이 내리면 터놓는 고샅길도 마을마다 이어지고 이어져서 도시 변두리 이 동네 골목길까지 오겠다 싶어서 그 님께서는 마침내 자신도 이웃들도 그 좁은 길로 온 같은 사람들이라고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이웃들은 대문을 닫아걸고 내왕하지 않았으며 저마다 너른 길로 온 다른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아침햇빛이 내리는 골목에서 눈을 쓸어치우고 혼자 걷던 그 님께서는 남의 논으로 가더라도 제 논에 닿고 제 논에서 떠나더라도 남의 논을 지나가는 들길로 가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하셨습니다.

 

 

 

 

제2시경 제6작품

 

 

눈이 온 날엔 나가보나마나 그 님께서 일거리를 찾으실 순 없었습니다. 일하고 싶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 시골에서 일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는 도시로 나오신 뒤로 그 님께서는 또 하나 더 아셔야 했으니, 시골에서는 나이 적든 많든 늘 품삯이 같은 일감이 주어지지만 도시에서는 젊으면 품삯 많은 일감이 주어지고 늙으면 품삯 적은 일감이 주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그 님께서는 새벽에 인력시장에 나가 모닥불을 쬐며 기다렸지만 공사장 잡부로 뽑히지 못하셨습니다. 고랑을 타던 삽질로는 아스팔트를 닦을 수 없었고 풀 매던 낫질로는 건물을 쌓아올릴 수 없었고 농구 다루던 솜씨로는 공구를 만질 수 없었습니다. 시골에선 일이 사람을 기다리지만 도시에선 사람이 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겪은 후부터 맥 빠지셨으니, 눈이 쌓인 오늘 그 님께서는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제2시경 제7작품

 

 

해토머리 때 갈 수 있을까, 곡우 때 갈 수 있을까, 땅 갈기 전에 돌아가겠지, 씨 뿌리기 전에 돌아가겠지, 그 님께서 자문자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반지하방이 환해졌습니다. 종일 그 님께서는 생각만 하셨습니다. 찬바람 소리를 들으며 고향 뒷산 우거진 상수리나무숲을 생각하셨습니다. 발짝 소리를 들으며 고향 앞산에 사는 청설모를 생각하셨습니다. 눈석임물 소리를 들으며 고향 뒷강을 생각하셨습니다.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향집 처마를 생각하셨습니다. 아이들 눈싸움하는 소리를 들으며 고향의 동무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곤 되풀이 생각하다가 더 생각할 거리가 없으면 고향의 들녘만 생각하셨습니다. 거기에 눈이 쌓이면 가물지 않아서 대풍 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자, 반지하방은 어두워졌습니다. 그 님께서 다시 자문자답하셨습니다. 낮이 길어지면 갈 수 있을까, 밤이 길어지면 갈 수 있을까, 해가 뜨겁기 전에 돌아가겠지, 달이 차갑기 전에 돌아가겠지,

 

 

 

 

제2시경 제8작품

 

 

그 님께서는 행복했던 날들을 떠올려보셨습니다. 젊을 적에 그 님께서는 야산비탈에 터 닦아 다지고 등성에서 소나무 베어와 기둥 세우고 서까래 얹은 다음, 논에서 진흙 구해서 벽돌 찍어 벽 쌓아올리고 볏짚으로 지붕 얹어 혼자 처음으로 집을 지으셨습니다. 그 초가집에 어린 아내를 맞아들이시고 나서 그 님께서는 나흘거리 논매기를 이틀 만에 마치고 이틀거리 밭매기를 하루 만에 마치셨습니다. 아내는 마당에 살구나무 심고 뒤란에 감나무 심고 장독대 옆에 능금나무 심고 두엄더미 가에 배나무 심고는 쌀 씻은 물도 주고 설거지한 물도 주었습니다. 그 초가집에서 제 철에 과실들을 따먹으며 늙어온 아내가 그 과실나무들이 늙어 과실들을 열지 못하던 해에 저 세상으로 떠나고 나서 그 님께서는 하루거리 풋벼바심을 이틀 만에 마치고 이틀거리 늦사리를 나흘 만에 마치셨습니다. 그 님께서는 그런 지난날을 기억해 보는 일을 엎치락뒤치락 여생을 살아내는 한 가지 방편으로 삼으셨습니다.

 

 

 

 

제2시경 제9작품

 

 

그 님께서는 갑자기 그 초가집에서 놀던 참새가 궁금하여 귀를 후비고 그 안방에서 내다보던 떡갈나무가 안 잊혀서 눈두덩을 문지르셨습니다. 그 님께서 논밭에 나가셨을 때엔 자식을 멀리 하셨으니, 논일밭일을 따라하지 못하게 된 자식도 혼자 남겨질 때엔 그 님을 멀리 하였습니다. 그 님께서 들로 나가셨던 날엔 자식은 산으로 갔고 그 님께서 뙤약볕 받으며 풀 매셨던 날엔 자식은 나무그늘 덮고 낮잠을 잤고 그 님께서 흙바닥 보며 가뭄을 걱정하셨던 날엔 자식은 샘물 퍼와 멱을 감았습니다. 자식이 다 커서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자 재산을 주어 떠나보냈고, 자신도 떠나신 그 님께서는 그 초가집 아궁이에 지폈던 장작불을 그리워하고 그 안방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놓았던 밥 한 그릇을 떠올리셨습니다.

 

 

 

 

제2시경 제10작품

 

 

그 님께서는 무슨 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상수리나무에서 잎사귀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논물이 물꼬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나고 아버지가 무녀리 등때기를 싸리비로 쓸어주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님께서는 무슨 냄새가 나서 코를 벌렁거리셨습니다. 항아리에 담아놓았던 머루술 냄새가 나고 가마솥에 달이던 간장 냄새가 나고 자식이 헛소리 지껄일 때 풍기던 술 냄새가 났습니다. 그 여러 소리 그 여러 냄새 때문에 그 님께서는 반지하방에서 잠 못 이루고 뒤척이셨습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가 간 길과 영영 돌아오지 않을 아들이 간 길이 자신이 가는 길과는 너무 다르므로 누구도 돌아오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의 세상으로 뒷걸음질해서 가지 못하고 아들의 세상으로 잰걸음으로 가지 못하시는 그 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세상을 찾아가야 한다고 마음 다잡으셨습니다. 그 누구한테도 속하지 않는 세상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님께서는 무슨 소리도 무슨 냄새도 나지 않을 그곳에서 한잠 깊게 자고 싶으셨습니다.

 

 

 

 

제2시경 제11작품

 

 

한밤중에 눈이 내렸습니다. 그 님께서는 눈 쌓이는 거리를 터벅터벅 걸으셨습니다. 앞길도 눈에 덮이고 옆길도 눈에 덮이고 뒷길도 눈에 덮였습니다. 갑자기 가야 할 곳이 없어져서 그 님께서는 하늘을 쳐다보셨습니다. 허공도 눈에 덮이고 중천도 눈에 덮이고 천상도 눈에 덮였습니다. 그 님께서는 어디에도 자신의 세상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이렇게 눈 쌓이는 겨울밤의 거리가 일생 살아와서 다다른 곳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더 이상 갈 데가 없었으므로 그 님께서는 되돌아서 터벅터벅 걸으셨습니다. 눈은 그 님께로 내렸습니다. 앞길에 내리던 눈도 옆길에 내리던 눈도 뒷길에 내리던 눈도 그 님께로 내렸습니다. 그 님께서는 눈에 덮여 걸어가셨습니다. 허공에 내리던 눈도 중천에 내리던 눈도 천상에 내리던 눈도 그 님께로 내렸습니다. 그 님께서는 눈에 덮여 걸어가셨습니다. 그 님께서 하염없이 걸어가실수록 눈도 하염없이 내렸습니다.

 

 

 

제2시경 제12작품

 

 

그 님께서 스스로 어디로 가셨는지 그 님을 누가 데려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눈 내린 거리에는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껴입고 직장으로 나갔습니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잘 구분되는 도시에서는 누구나 다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 님께서는 남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랬으므로 님께서는 자신을 남으로 만들지 못하였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는지도 모릅니다. 님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들 눈이 녹으면 지워지고 사람들은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님께서 사라지신 도시에서 사람들은 오로지 일거리를 위하여 남을 만났습니다. 그 님께서 스스로 어디로 가셨는지 그 님을 누군가가 데려갔는지 몰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이미 그 님께서도 그것을 꿰고 계셨을 것입니다. 도시에서 그 님께서는 그 님이시고, 남은 남이었습니다.

 

 

 

 

시작메모

 

이 『님 시경』의 제2시경에는 농경사회가 붕괴되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늙은 농민의 삶을 담았다. 도시의 주변인으로 전락하여 살아가는 님은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남과 교류하지 못한다. 도시적 삶은 님과 남을 엄연하게 개별자 또는 특수자로 존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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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님 시편>, <님>, <님 시집>, <반대쪽 천국>,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타운>, <입국자들>, <제국諸國 또는 帝國>, <남북상징어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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