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7호(가을호)집중조명/서윤후/스와힐리의 썸머 외 4편
페이지 정보

본문
서윤후
스와힐리의 썸머 외 4편
해변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네가 키우는 개의 이름을 상상했다.
그것은 여름, 여름의 목에 줄을 매고 달렸다.
여름이 헐떡이면 열대어의 아가미가 부러웠다.
울긋불긋한 숨들이 많은 곳엔 항상 더위가 찾아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여름을 쓰다듬어 주는 일.
넌 왜 개에게 한국말을 할까? 개는 어느 나라 말을 할까? 외국어가 흥건해지면 여름은 어느새 돌아서있고
해변은 위험해서 여름을 데리고 노는 너를
집에 돌아가자고 보채는 부모님이 낳았고 여름을 낳은 건 어떤 잠이었을까. 어떤 사고였을까. 발정 난 햇빛들이 사나운 벌이 되어 등껍질을
등껍질을 자꾸 벗겨냈다.
그 자리를 핥아주는 여름의 혀에는 백태가 내렸다. 여름에 눈이라니 생각만 해도 발가락이 촉촉해졌다.
소라게의 집구석이, 파라솔이 꽂혔다. 빠진 구멍이, 불꽃놀이를 관람하는 즐거운 방관이
여름의 털갈이를 핥아주었고, 시원한 젖을 내주었다는 속설.
네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여름의 염색체가
네 눈에서 알록달록해지면 하나씩 터지는 실핏줄
해변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폭설이 막 지난 모래 위에서
여름과 여름이 술래잡기한다.
파블로프의 실험이 틀렸다는 종소리가 해변 가득
소금기를 머금고 반짝이면
군침을 흘리는 네가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스와힐리어로
안녕.
참수형 요리
목에 숨이 달려있었을 텐데, 맛있는 음식엔 자꾸 손이 가. 피는 무섭고 빨간 것이라서 불현듯 돌아서면 내일을 울어 줄 닭이 없단다. 씨가 마른 모가지마저 비틀겠다고 선생님이 그랬어. 왜 화가 났을까?
닭고기를 뜯으며 생각해보자. 돼지의 목은 어디로 갔을까? 소리가 나지 않는 곳에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 목젖이 막 튀어나오려고 해.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많아지면 칼을 가는 요리사들이 바빠진다. 끄덕일수록 위험해지는 대답은
철창 가득 흔들리는 목을 가누며 팔려가는 꼴. 앵무새가 되자. 그러니까, 모르는 말을 따라하면서 신기한 것을 보여줘야, 그제야 포크를 내려놓을 사람들. 우물쭈물하다 날아오르는 방법도 잊으면
들숨과 날숨을 섬벅섬벅. 칼 가는 소리. 조련된 목은 질겨진단다. 잘린 부근에서 태어나는 목소리는 최후의 발성. 들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비명을 맛있게, 식탁 위에. 학교의 모든 닭들은 어디로 갔을까? 교정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에 걸린 저 밧줄.
숨길 수 없는 목, 만찬을 먹기 위해서 만찬이 되기 위해서 자꾸 길어지는 목. 달아나기 쉬운 부위는 없지만, 맛있는 부근에서는 그래도 계속 소리가 난다. 아무도 울지 않아 늦잠 잔 뒤에 목이 너무 말랐어. 그러니까, 목을 들키지 마.
스무 살
음악은 나오는데 아무도 춤추지 않았다. 1인분의 음식이 먼저 식어 가면 그거 알아? 내가 키운 앵무새들은 이름 짓기 전에 먼저 죽었어. 배고픈 고백, 죽는 것이 무서워 2인용 게임을 혼자 번갈아가며 했다. 목숨을 갖고 잃는 일이 쉽다는 건 아버지가 키우던 열대어들을 보고 배웠다. 아가미는 나의 배꼽과 같은 것이니까, 들숨보다 날숨이 더 어려운 호흡의 곤란. 따분한 오후는 자꾸 재방송 되고, 집엔 손님이 많이 와 있었다. 수 켤레의 운동화들이 현관에 놓여있는데 더 이상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에게서 작아진, 나의 모든 운동화들. 빨래 널기 좋은 날 나에게서 길어지는 것들을 잘라내는 연습을 했다. 그림자가 다리를 절고 불장난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끝나는 폭죽을 샀다. 목숨처럼 아끼는 겉옷을 두고 온 바다, 물가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던 할머니를 여기에 흩뿌렸다. 거짓말을 용서하게 되었다. 이제 발을 담가도 되나요? 그제야 소라게는 제 집을 떠났고 나는 누군가를 데리러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야생교육
가둘수록 달아나고 싶은
단단할수록 부러지기 쉬운
돌아가라고 말했다.
간밤에 열린 풋사과를 몰래 따는 꿈을 꿨는데 우리가 뿌리였을 야생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싱싱한 변명
동화책을 만들려고 베어놓은 나무
말뿐인 그림책도
공휴일의 환경보호 표어 공모도 이곳에서
예쁜 조화만 사다가 심어놓은 화단
장학사 오는 날 화장실에 침을 뱉었다.
더 반짝이는 일
숲이 모르는 일을 하는 것은 범죄니까
과학의 날에 쏘아올린
나의 물로켓이 나의 프로펠러들이
추락해 떨어져 있는 우듬진 언덕
날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오래 날려버린 친구에게 상을 주는 일을
사육된 것은 살 수 없어요.
죽은 둥지를 보고 잠잘 곳을 찾아 헤맸다. 풀벌레 사는 일은 주관식인데
왜 우는지에 대한 보기 찾기 문제
속눈썹이 짧아졌는데,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 혼내는 것 없다.
궂은 날씨가 젖은 곳에서 마르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꼭 다문 입속에
그건 교육이었고
다문 입을 벌려 자백하게 만드는 일
그건 사육이었고
쓰지 않은 근육들이 팽팽해진다. 간밤에 훔친 덜 익은 사과가
조금씩 울긋불긋 해진다.
학교 종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다정한 공포
봤던 공포 영화 비디오를 되감기 하면서
귀신들이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장면을 본다.
더위를 꺾기 위해
나란히 이불을 덮으면 다시 시작하는 영화
다가올수록 섬뜩해지는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너의 옆에 있어준다.
어른스럽지만 손에 땀이 나면 어떡하지, 스스로 끈 형광등 불빛을 초조하게
걸린 옷을 의심하며 성장하는 동공.
망설이다가 줄거리를 헤매게 될 때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 무서워지는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너의 옆에 있어준다.
어둠을 필요로 할 때 본 영화를 다시 볼 때
덜 무섭게 예고된 장면을 먼저 말해주는 착하지만 착하지 않은 옆자리.
눈 가린 두 손 뒤로 길어진 속눈썹
끝난 뒤 시시하다고 생각하면 사라지는
너의 옆에 있어준다.
비디오는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데
여름은 자꾸 빨라지고 있다.
정지 버튼을 누른 손에서
피가 나기 시작한다.
시작메모
짧은 손톱으로 단어를 깎는다
나는 더 이상 물어뜯을 손톱이 없으면 무척 불안해진다. 무색해지는 시간이다. 짧은 손톱으로 시를 쓰고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내가 가진 공포는 온전히 시에게로 전이된다. 나의 감염된 세계는 사실 모두가 지나친 적 있는 일상이며, 겪어온 일들의 전말일 것이다. 조금만 더 다정해질 순 없어요? 항상 불친절했던 모든 대상은 나의 고아들에게 왼손을 내민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오른손잡이로 태어났는데, 그리고 악수는 왼손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짧은 손톱으로 한 단어를 깎는다. 그리고 갈변된 껍질과 오려진 알맹이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 단어가 내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나에겐 이름 없는 고아들이 너무나 많다. 온전히 불러도 다정하지 않은 괄호 속으로 작명하는 시간이다. 또다시 이름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 별명을 발명하고 잠들 때까지 불러도 끝나지 않는 기나긴 이름을 떠올린다. 누군가가 이름을 호명하면서 그 사람의 테두리는 선명해졌다. 이름 없는 사람이 이름 없는 사람을 위해 스탠드를 켰다.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불빛으로 어둠을 깎아내는 일이란 부러지고 찢어진 단어에게 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이었다.
손톱이 다시 자라는 시간 동안 나는 불러보지 못한 이름을 훔칠 궁리를 한다. 다른 세계를 살면서 같은 세계로 감염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공동 감염체라는 사실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협동심이라는 것을 잘 느낄 수 있다. 언젠가 당신은 이제 오른손을 내밀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악수를 하고 통성명 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말해줄 이름이 없고, 어느 손을 내밀어야 할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괜찮다. 괜찮아질 필요가 있다.
서윤후∙2009년 ≪현대시≫로 등단.
- 이전글47호(가을호)집중조명/해설/장이지/우기雨期의 소년들은 자란다―서윤후론 13.03.19
- 다음글47호(가을호)하종오의 연작시/님시경 제2시경 13.03.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