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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집중조명/해설/장이지/우기雨期의 소년들은 자란다―서윤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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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해설/장이지|우기雨期의 소년들은 자란다―서윤후론
1. 머리말
서윤후의 시에는 ‘아직’ 소년티가 남아 있다. 그것을 퇴행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매우 어리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2000년대의 마지막 2년 동안에 소년 시인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서윤후는 다른 소년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조합원」의 김승일이 그의 ‘조합원’들을 거느린 개구쟁이였다면, 서윤후는 “교복에 보라색 물이 들어가는 병”(「곰팡이, 첫사랑」, ≪시사사≫, 2012, 5~6)으로 인해 수군대는 친구들을 의식해야만 했던 학창시절을 보낸 조숙한 소년이었다. 「조합원」의 소년이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은 소년이었다면, 서윤후는 비록 언제나 따뜻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아갈 집을 의식 한편에 남겨두고 싶어 하는 소년이 아닌가 싶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도 여전히 소년으로 남아 있는 소년과 집을 떠나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의 구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언젠가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소년이라는 단서를 붙여두어야만 온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티가 남아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서윤후 시의 때 묻지 않은 순진성을 지시하는 말임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감정의 진폭이 크게 드러나지 않고, 그의 시에 나타난 세계는 비록 학교라는 판옵티콘적인 알레고리가 버티고 있음에도 심각한 환부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 환부의 디테일들이 아직 환상의 장치 바깥으로 흘러넘치지 않고 있는 것은 서윤후 시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고, 그의 또래들이 공유하고 있는 연령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공포는 한편으로 다정하며 가족은 우울하면서도 친밀한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에는 “군침을 흘리는 네가 그을린 얼굴로” 이쪽을 향해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는, 사뭇 정감 있는 장면이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스와힐리의 썸머」). 그런 따뜻함은 그의 또래들에 비해 그가 더 돋보이는 점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보았다.
2. 익숙한 것들의 피안
가령 「다정한 공포」는 일견 그리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고급 독자들은 이 시를 읽고 공포영화의 사회학을 떠올릴 것이다. 다시 말해 공포를 스크린 안의 것, 텔레비전 수상기 안의 것으로 한정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공포를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싶어하는 경향 말이다. 그러나 반복은 항상 차이를 만들어낸다. 영화 「링」이 텔레비전 수상기를 통해 외부세계로 기어 나오는 공포를 그린 것처럼 서윤후도 그런 ‘피’의 예감에 사로잡힌다. “여름은 자꾸 빨라지고 있다”고 말할 때, 서윤후는 시간의 뒤틀림이나 사건의 전조를 체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봤던 공포영화 비디오를 되감기 하면서
귀신들이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장면을 본다.
더위를 꺾기 위해
나란히 이불을 덮으면 다시 시작하는 영화
다가올수록 섬뜩해지는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너의 옆에 있어준다.
어른스럽지만 손에 땀이 나면 어떡하지, 스스로 끈 형광등 불빛을 초조하게
걸린 옷을 의심하며 성장하는 동공.
망설이다가 줄거리를 헤매게 될 때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 무서워지는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너의 옆에 있어준다.
어둠을 필요로 할 때 본 영화를 다시 볼 때
덜 무섭게 예고된 장면을 먼저 말해주는 착하지만 착하지 않은 옆자리.
눈 가린 두 손 뒤로 길어진 속눈썹
끝난 뒤 시시하다고 생각하면 사라지는
너의 옆에 있어준다.
비디오는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데
여름은 자꾸 빨라지고 있다.
정지 버튼을 누른 손에서
피가 나기 시작한다.
―「다정한 공포」
공포영화의 귀신들은 그 자체로 비일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귀신들은 낯선 것이기 때문에 공포를 유발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포영화는 일상적인 것들을 클로즈업하면서 묘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오히려 진정한 공포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낯익은 것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낯선 것들이 사실은 낯익은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프로이트 식의 경이를 뒤집어놓은 형국이다. 만약 ‘여전한 것’들이 공포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 가장 무서운 것들이라면, “너의 옆”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자리가 아닐 수 없다. ‘너’야말로 유령, 혹은 괴물적인 존재이다. “있어준다”라는 반복되는 일상적 행위야말로, 유령이나 괴물적인 존재를 내면에 떠안고 있는 ‘나’의 일상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서윤후는 그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온전하게 어둠의 영역으로 밀어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밀감으로 채색한다. “너의 옆에 있어준다”고 하는 소년의 언표는 ‘너’가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라는 것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애초에 ‘너’는 없었고 ‘너’는 ‘나’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매우 정감 있고 달콤하게 들린다. 이 친밀감이 되감기를 반복하는 일상적 시간에 ‘나’를 더욱 결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 일상적 시간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나’는 떠나야 한다. ‘나’는 공포영화의 반복과 결별해야 한다. 아니,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그 친밀감으로부터의 탈주이다. 그래서 ‘피’의 예감은 기분 좋은 전조는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서윤후는 그 탈주, 혹은 가출의 ‘시작’에, 스타트 라인에 정확하게 서 있다. 그의 시는 “시작한다”는 말을 신호로 동결된다(「야생교육」, 「다정한 공포」).
3. 가족 안의 우울
‘다정한 공포’로 명명된 친밀감의 원천은 서윤후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가족’이 아닐까 싶다. “잠든 걸 후회해 본 적 있는 문고리와 자꾸 커지는 발과 디딜 곳을 내줄 수 없는 바닥과 자꾸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압정들의 무질서 이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는 방”에서 그는 “누군가 방문을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감과 아무도 오지 않으리라는 불안감을 동시에 경험한다(「방물관房物館」, ≪시와 환상≫, 2012, 여름호). 누군가 자신을 찾아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혼자 하는 숨바꼭질은 외롭다. “괘종시계가 무서웠다”(「메종 드 앙팡」, ≪시와 문화≫, 2012, 여름호)고 하는 고백에서도 드러나듯 집은 그를 외롭게 그냥 방치해둔 장소로 어둡게 그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무심한 집, 혹은 방, 혹은 가족과의 투쟁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당장은 집을 떠날 수도 없고, 떠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파피루스가 마당에서 자라나고, 너는 그것을 먹었네
부스럭거리는 잎사귈 먹고 가시나무를 낳았네
자초한 일들만 앙상하게 남았네 하지 못한 말들이
화석의 테두리처럼 부스러기로 쌓이고
뼈에 바람이 차올라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혼자서 제 집을 나가지 못했다
―「에고 사우르스」 부분(≪시평≫, 2012, 여름호)
‘집’은 이야기의 원천이기에 서윤후는 집을 떠나지 못한다. 떠나지 않는다면 발을 다칠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반짝거리기 시작한 압정들의 무질서”(「방물관」)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자아를 버려진 ‘공룡 인형’에 투사하면서 스스로를 수동적인 자리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반드시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 인형 놀이에서 서윤후는 인형을 조작함으로써, 혹은 행방불명된 인형을 찾아 나섬으로써 역설적으로 능동적인 위치를 회복한다. 「스무 살」의 시적 화자가 ‘할머니의 죽음’을 거치면서 “나는 누군가를 데리러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고백한 것은, 어쩌면 상처뿐인 빈 집으로 돌아갈 용기, 그곳에 버려져 있을 자기 자신의 유년과 대면할 용기를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윤후는 ‘빈 집’의 재건, 관계의 회복을 도모한다. 그는 보통의 가족을 상상하면서 집 나간 형제들을 다시 집으로 불러 모은다. 불러 모은 것은 정작 어머니지만, 그것은 사실 그도 원하던 일이었다.
누나가 왔고 형도 뒤늦게 왔다. 다시 모인 집은 여전했지만 여전하지 않은 구석을 가졌다. 밤낮으로 부대끼던 곳에서 머쓱하게 앉아 안부를 묻는 사이. 떨어져 있는 만큼의 누적된 거리로 벌어져있는 사람들. 집 열쇠 대신 고장 난 초인종을 연신 눌러댔다. 텅 빈 자기 방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 했다. 말의 부스러기만 내뱉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푹 꺼진 소파라도 눕고 싶은 자리가 아니겠는가. 오래 익은 식구들의 눈에는 아직도 철없는 막내이지만 저녁거리를 생각하고 스스로 청소도 한다는 것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었다. 각자의 청바지가 맞지 않는 것이 어째 개인적인 문제일까. 폭식을 유발하는 뉴스도, 거식을 일으키는 흥미로운 소문도, 부모자식 관계도 피로한 육체가 되어 등에 업히고, 또 등에 업히고. 무너질 때쯤에야 내뱉을 수 있는 말.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왜 하지 않았나 기다렸던 그런 말. 좋은 감정이나 나쁜 경향이나 어느 쪽으로 침을 뱉을 수 있는지는 더 살아봐야지 알겠다고.
―「자화상」 부분(≪현대시≫, 2012, 2월호)
「자화상」에는 근친 살해와 같은 자극적인 환상이 나오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가족의 성원도 나오지 않고, 떠났던 가족의 일부가 집으로 돌아와 엉엉 우는 장면도 없다. 「자화상」은 부모의 속옷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자식의 이야기도 아니고, 가족끼리 말로 상처를 주고받는 이야기도 아니다. 시라고 하기에는 분행도 없고, 특별한 시적 장치가 눈에 띄는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진술의 집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화상」은 일기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시로서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시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 차라리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둘이 포개지는 쪽에 나는 주목하고 싶은 것일까.
많은 시인들이 가족에 대해 썼다. 가족을 떠난 사람들, 가족을 파괴한 사람들, 가족과 싸운 사람들, 가족과 화해한 사람들, 가족에게 돌아간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 등 그 목록은 아직도 계속 길어지고 있다. 가족을 파괴하고 가족을 떠난 사람들조차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가족을 떠나는 사람은 가족의 음영을 어깨에 지고 길을 떠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가족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한편으로는 가족의 음영을 등에 업고 세상과 맞대면하고 있다. 가족은 그저 제도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오래된 제도와 아무 상관도 없는 곳에서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독신자도 페미니스트도 동성애자도 히키코모리도 가족에 대해 매순간 쿨할 수는 없다. 쿨하게 가족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의 시는 믿을 수 없다. 차라리 집 기둥에 도끼질이라도 하고 떠나는 사람의 시를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가족이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족은 정적이라기보다는 동적인 관계인지도 모른다. 서윤후는 “다시 모인 집은 여전했지만 여전하지 않은 구석을 가졌다”고 말한다. 「다정한 공포」에서 그가 무섬증을 느꼈던 것이 ‘여전한 것’이었음을 환기할 때, 이 ‘여전하지 않음’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든다. 식구들은 매일 보는 사이기 때문에 그 성원들의 작은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막내는 어제의 막내가 아니다. 결국 가족이란 이 변화들을 용인하면서,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면서 지속되는 것이라고 서윤후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가족이라는 동적인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은 어쩌면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누군가를 데리러 갈 수 있는 용기”와 「가족」(≪시현실≫, 2012, 여름호)의 “식물원에 함께 갈 수 있는 용기”에서 보듯이 집을 떠나는 일도 집을 지키는 일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화상」이 미학적인 층위에서는 범용한 것에 머물고 있음에도, 한 편의 훌륭한 시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이 고민의 선함이 아무런 장신구를 걸치지 않고 독자의 마음에 직접 전달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시를 ‘선함’ 위에 올려놓고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 아쉬울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윤후의 시를 우리가 기억해 두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4. 세계 재건의 방식―편집증적 방식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시인들에게서 다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1970년대생 시인들은 의도적으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피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생 시인들이 정말로 그랬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반면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시인들이 ‘가족’에 대해 많이 쓴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발견이 아니다. 그들은 10대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족이나 학교 이외의 세계를 많이 경험해 보지 않았다. 그들이 가족이나 학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정직한 것이다. 1990년생인 서윤후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서윤후의 시 세계에서 가족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세계에서 가족의 위기는 세계의 위기이다. 「방물관」, 「에고 사우르스」, 「메종 드 앙팡」 등 일련의 어두운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화상」에서처럼 가족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이해할 만하다. 가족을 재건함으로써 폐허가 된 자기 세계를 복원해야 할 내적 필연성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윤후의 시에는 복원의 의도가 엿보이는 징후가 자주 등장한다. 그 중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조어 형태의 제목이다. 「풋사과 주스 열차」(≪시와 미학≫, 2012년 봄호), 「방물관」, 「에고 사우르스」, 「참수형 요리」 등 조어 형태의 제목은 해체된 세계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들을 편집증적으로 그러모은 것들이다. 이런 편집증적 방식은 세계를 재조립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며, 그 자체로 회복을 위한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조어 형태의 제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환상일 것이다. 환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환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을 범주화하려는 시도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령 학술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세계 질서의 재편에 기여하는 환상과 그렇지 않은 환상으로 나누는 구분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서윤후 시만 하더라도 환상은 균질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참수형 요리」는 학교 교육의 문제점이라는 다소 식상한 프레임이 우선 눈에 띄지만, 사실은 ‘거세불안’이 환상의 외피를 뒤집어 쓴 시이다. 이 시에서 ‘참수’와 ‘요리’의 기괴한 조합이 빚어내는 환상은 세계 질서의 재편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스와힐리의 썸머」와 같은 시에 나타나는 환상은 「참수형 요리」의 환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환상이다.
해변은 위험해서 여름을 데리고 노는 너를
집에 돌아가자고 보채는 부모님이 낳았고 여름을 낳은 건 어떤 잠이었을까. 어떤 사고였을까. 발정 난 햇빛들이 사나운 벌이 되어 등껍질을
등껍질을 자꾸 벗겨냈다.
그 자리를 핥아주는 여름의 혀에는 백태가 내렸다. 여름에 눈이라니 생각만 해도 발가락이 촉촉해졌다.
소라게의 집구석이, 파라솔이 꽂혔다. 빠진 구멍이, 불꽃놀이를 관람하는 즐거운 방관이 여름의 털갈이를 핥아주었고, 시원한 젖을 내주었다는 속설.
네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여름의 염색체가
네 눈에서 알록달록 해지면 하나씩 터지는 실핏줄
해변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폭설이 막 지난 모래 위에서
여름과 여름이 술래잡기한다.
파블로프의 실험이 틀렸다는 종소리가 해변 가득
소금기를 머금고 반짝이면
군침을 흘리는 네가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스와힐리어로
안녕.
―「스와힐리의 썸머」 부분
「스와힐리의 썸머」에서 ‘해변’은 일종의 경계선 구실을 한다. “집에 돌아가자고 보채는 부모님”이 있는 한 ‘해변’은 집의 연속이다. 그러나 ‘해변’은 ‘여름’으로 불리는 ‘개’를 낳은 우발적인 ‘잠’, 우발적인 ‘사고’가 있는 한 하나의 탈주선임도 분명하다. 이 시의 후반부에서 ‘너’는 또 하나의 ‘여름’으로, 다시 말해 개로 변신하여 해변을 종횡무진 달린다. 그 순간 해변에는 과학과 이성의 세계가, 즉 식사 종을 울리면 개는 주인에게 돌아와야 한다는―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비록 그런 내용은 아니지만―규율의 세계가 허구임을 폭로하는 신호가 종소리로 반짝인다. 그리고 ‘개’로 변한 ‘너’는 어른들의 말이 아니라, 그 세계의 부정성에 물들지 않은 외국어로 ‘내’게 인사를 건넨다. 이 시에서 서윤후는 인간계와 동물계를 가로지르는 환상을 통해 어른들과 파블로프와 일상어의 세계를 교란하고, 아이들과 개와 외국어(시)의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 서윤후 환상의 묘미는 「참수형 요리」와 같은 환상에서보다는 「스와힐리의 썸머」와 같은 환상에서 더 돋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5. 맺음말
아마도 서윤후는 미래의 자신과 자신의 시에 대해 걱정과 함께 기대를 품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걱정과 기대를 숨기지 못하고 들키는 이 젊은 시인을, 시를 조금 먼저 쓰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역시 걱정과 기대를 품은 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는 가족에 대해 쿨할 수 없는 사람, 그러나 풋사과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르익어가듯이(「풋사과 주스 열차」), 언젠가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집을 떠나더라도 변해가는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다정한 사람, 집을 떠나는 일에도 가족을 유지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막 ‘용기’를 내보려고 마음을 낸 사람이다. 그의 발심發心에 “먹구름”이 먼저 도착한다. “아직도 비를 맞고 있니?/비가 막 그쳤고 모래성은 무너졌어./먹구름이 먼저/도착했어.”(「방사능비가 내리고 우리는」, ≪시와 환상≫, 2012, 여름호) 그렇다고 해도 우기雨期의 소년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나아가려는 찰나의 표정이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시들(「야생교육」, 「다정한 공포」)에 포착되어 있다. 나는 ‘먹구름’이 도착하고, 빗속으로 전진하는 소년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는 이제 막 ‘반짝이는’ 것들에 눈을 뜬 사람. “파블로프의 실험이 틀렸다는 종소리가 해변 가득/소금기를 머금고 반짝이면”(「스와힐리의 썸머」)이나 “자꾸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압정들”(「방물관」)에서처럼 눈부신 빛의 감각, 혹은 어둠의 폐부를 찌르는 통증의 감각에 눈을 뜬 사람. 시의 환희와 시의 고통에 나란히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 스와힐리어로 인사를 건네지나 않을까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어제의 막내’는 아닌 사람! “피가 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막내 시인이 이 ‘피’의 의미를 어떻게 돌파하면서 자기를 갱신해갈 것인지 벌써부터 보고 싶다.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연구서로 <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보>, 번역서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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