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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집중조명/최향란|물기 사라진 건어 꿈을 꾼다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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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최향란
물기 사라진 건어는 꿈을 꾼다 외 5편
내가 따라가지 못할 당신 생에는 방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까지 무심히 털어낸 별이 창가에 가득 엉겨있어 멈춘 세월처럼 있어 한 사발쯤 떠내어 흐르게 할 수도 있을 그 방, 먼지가 풀풀거리는 책을 읽다가 잠들어도 좋아서 마당가 떨어지는 비는 곡선으로 마른 지느러미를 흔들어 깨우고.
당신에게 꽃나무 한 그루 선물할 게요. 떨어진 꽃잎 돌돌 말아 나무 아래 가지런히 꽃길 만들어요. 따라가지 못할 길 새로이 만드는 사이 당신 목소리라도 등 뒤에서 느낄 수 있다면, 따스한 온기도 훅 들어와 비늘이라도 떨어지면 좋겠어요.
가끔 세월이 지루하여 바람도 일지 않고 꽃잎조차 떨어지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허공을 가르네요. 별 한 사발씩 간절히 떠내다 보면 오랜 수형을 벗어 살점이라도 돋을까요. 한 사흘쯤 당신이 장대비로 찾아와 누렇게 시든 꽃길 위로 생긴 물길 열린다면, 한 마리 반짝이는 물고기로 그 방에 갈 수 있을까요.
그믐 반달
하화도에 다시 올라요?
그믐날, 고동도 잡고, 맘대로 다 잡아도 돼요.
보름이 지나고 그 남자 자갈도래에 선다.
다시 여드레가 지나면
밤 열두 시 동쪽 그리운 방향에서 뜨고,
해 뜰 무렵이면 남쪽 하늘에 동쪽 절반만 보이는
한 쪽으로만 바라보는 그 남자의 반 접힌 몸이다.
봄이 다시 오고, 곳곳에 동백꽃 진달래꽃 피고 져도
그 남자 기다림은 늙지도 않고 지는 꽃잎 몇 장
밀물 드는 물속으로 잠기는 바위섬에 숨어
그 여자 따뜻한 감각이 있는 바깥세상 엿보는데,
남은 이레
저 먼 뭍 더듬더듬 찾아가고 싶어도
그 여자 혹여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봄꽃 하염없이 내리는 사이 배는 섬을 빠져나가고,
끝끝내 미련한, 깻넘고개에 반 접힌 그 남자.
배롱나무
중심이라 믿었던 팽팽한 줄을 놓친다.
힘껏 줄 당기다가 놓친 자국 손바닥에 선명하다.
사방으로 흩어진 줄에 발 걸려 기우뚱거리는데
유리창 너머로 기우뚱 바라보시는 늙은 배롱나무,
기우뚱기우뚱 웃으신다. 반질반질 윤나게 웃으신다.
날카로운 고양이 발톱으로 세상을 엿보면서
얽혀 옴짝 못해 몇 자락 햇살로 주저앉은 나를
기우뚱 웃으시며 발그레 내려다보신다.
이 쪽 허공에서 저 쪽 허공으로 줄 던지는
저 굽은 등의 자유로운 줄타기
기우뚱하게 비틀어진 것도 평화로울 수 있구나.
깊은 물관을 타고 우주가 기우뚱거리며 올라온다.
무위사
이제는 옛날이지만 아픈 너를 기억한다.
잘 여문 배추가 튼실히 입구를 지키는 저 배추밭에는,
흰 눈이 제 집인 양 소복소복 쌓이고
눈 헤치고 나온 민들레 아슬아슬 네 발끝 비켜가기도 했지.
네가 좋아하던 토마토 둥그렇게 익어가던 때였다.
천불전 앞까지 걸어가던 별처럼 빛나는 기억이다.
겨울 봄 여름이 지나고
다시 겨울 봄 여름이 지나고 이상하다, 아름다운 풍경들.
애기단풍 뚝뚝 떨어져 소복히 쌓이는 천불전 앞
부처님도 뛰쳐나와 붉은 단풍과 놀고 있다.
뒤안 시누대 사이로 힘겨운 생들이 잠시 머무는 순간,
단풍 된 부처님이 남은 생 흔들며 노래한다, 와글와글.
먼 곳의 그도 더 이상은 슬프지 않다, 와글와글.
여기에 너를 둔다.
반성
감이 뾰족하게 잘도 자란다.
두 해 내리 열매 맺지 못하고 그냥 잎만 무성했던 감나무다.
저놈의 밑둥 싹둑 잘라버려야지 안달했는데
둥근 초록 앞에 참으로 무색하다.
늘 반 박자 빠르게 가슴 철렁이며 성급했던 나를
그냥 안 본 듯 기다릴 수는 없었느냐,
고요하게 꾸짖는 소리를 엮으니 한 바구니다.
움찔하는 부끄러움.
문주란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곳을 이제야 다독인다.
얽히고 설킨 뿌리가 땅 밑 물기를 세차게 잡아당겨
화들짝 하얀 꽃대를 밀었다.
제 몫도 못할 풀쯤이라 단정하고 먼저 등 돌렸는데
잎 사이로 오른 꽃대에서 기다림을 엿본다.
묵은 습관처럼 고개를 떨구기만 했다면
이렇게 또렷한 꽃 피워 올렸겠는가.
밝은 곳으로 애써 고개 내밀어 순 틔웠으리라.
저 햇살 닿는 곳이 수백 번 스쳐간 자리일지라도
나 오늘은 처음인 듯 황홀한 향기에 가슴 두근거린다.
시작메모
낯선 시에 관한 꿈
시와의 연애에 빠진 채 살았다. 시에 빠져 시의 근처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세월이 가도 발 하나 시에 걸쳐두고 나는 시의 연인이라 우긴다. 시가 버거운 적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끝내 발을 빼지는 못했다. 아니면 나는 달아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고도 서로의 위치를 알 만하다. 습관처럼 붙어 있었던 탓일 게다. 그러나 너무 익숙하게 습관처럼 붙어 있었구나. 서투르지 않고 능숙하고, 오랫동안 되풀이 하여 몸에 익은 채로 굳어진다면 그건 너무 무서운 일이다.
습관처럼 굳어버린 이 시의 얼굴을 이제는 떼어낸다. 운명의 두 줄을 엮어 불멸의 꿈을 간절히 원하지만 새로움이란 늘 두렵다.
불안한 나를 뚫고, 낯설은 얼굴의 새로운 시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꿈을 꾼다. 너무 낯설어 깜짝 놀라고 마는, 이런 생각만으로도 나는 눈물이 돈다.
최향란∙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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