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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집중조명/고인환/해설/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꿈의 언어―최향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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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023회 작성일 13-03-1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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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고인환

해설/고인환|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꿈의 언어―최향란론

 

 

2000년대 이후 이른바 ‘미래파’로 지칭되는 새로운 시적 경향이 출현해 한동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흐름이라는 진단과 더불어 소통부재의 난해시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쟁에 대해 왈가왈부할 할 생각은 없지만, 새로운 시들의 흐름이 전통 서정의 질서를 갱신하는 전복적 미학을 얼마나 함축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새로움을 강조하기에 급급하다보니 서정의 본래적 요소가 너무 가볍게 취급되었던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새로움은 전통적 관습을 타고 넘어야 한다.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재구성을 위한 해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오래된 미래’로서의 서정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최향란의 시가 반갑고 믿음직스럽다. 인간은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을 통해 스스로의 본질을 되새김질해 왔다. 여기에서 서정은 단순히 자연을 노래했다는 사실을 넘어, 자연이 지닌 다양한 속성을 통해 인간의 세속적 삶을 성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단독자로 세상에 던져진 인간의 고독한 운명은 끊임없이 타자와의 소통을 꿈꾸게 한다. 죽을 때까지 타자와 완전한 소통 혹은 하나됨을 성취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사랑의 서정을 통해 타자와의 하나됨을 꿈꿔왔다.

이번에 내놓은 최향란의 신작들은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전통 서정의 본령에 충실하다. 우리들이 근대적 일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연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혹은 타자와의 소통을 갈구하면서 질퍽질퍽한 사랑의 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전통 서정의 영역은 여전히 건재하다.

최향란의 시는 전통 서정의 현주소를 투명하게 비춰준다. 에둘러가는 법이 없이 우직하다. 이를테면 그 첫 단계는 다음과 같다.

 

감이 뾰족하게 잘도 자란다.

두 해 내리 열매 맺지 못하고 그냥 잎만 무성했던 감나무다.

저놈의 밑둥 싹둑 잘라버려야지 안달했는데

둥근 초록 앞에 참으로 무색하다.

늘 반 박자 빠르게 가슴 철렁이며 성급했던 나를

그냥 안 본 듯 기다릴 수는 없었느냐,

고요하게 꾸짖는 소리를 엮으니 한 바구니다.

움찔하는 부끄러움.

―「반성」 전문

 

제목도 직설적이다. ‘반성.’ 자연물(감나무)을 관찰하며 인생의 의미를 곱씹어본다는 전통 서정의 기본 구도다. “두 해 내리 열매 맺지 못하고 그냥 잎만 무성했던 감나무”를 두고 “저놈의 밑둥 싹둑 잘라버려야지 안달했는데” “둥근 초록 앞에”서 “참으로 무색하게” “감이 뾰족하게 잘도 자란다.” “감나무”는 “늘 반 박자 빠르게 가슴 철렁이며 성급했던” 화자를 “고요하게 꾸짖는”다. 이 “소리” “엮으니 한 바구니다.”

이렇듯, 최향란의 시는 자연이 고요하게 꾸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와 공명共鳴하며 “움찔하는 부끄러움”을 직조하여 “한 바구니”의 성찰을 담아낸다. 우리가 “늘 반 박자 빠르게 가슴 철렁이며 성급”하게 “안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이러한 전통 서정의 풍경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깨달음은 늘 “반 박자” 늦게 온다. 이 늦은 깨달음에 대한 자각이 서정의 ‘오래된 미래’를 구축하는 든든한 토양이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곳을 이제야 다독인다.

얽히고설킨 뿌리가 땅 밑 물기를 세차게 잡아당겨

화들짝 하얀 꽃대를 밀었다.

제 몫도 못할 풀쯤이라 단정하고 먼저 등 돌렸는데

잎 사이로 오른 꽃대에서 기다림을 엿본다.

―「문주란」 부분

 

“제 몫도 못할 풀쯤이라 단정하고 등 돌렸는데” “문주란”의 “얽히고설킨 뿌리”가 “땅 밑 물기를 세차게 잡아당겨” “화들짝 하얀 꽃대”를 민다. 그제서야 화자는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곳”을 “다독”이며 “기다림을 엿본다.” 이 ‘늦음 혹은 기다림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인생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아닌가.

그럼 최향란의 시에 투영된 전통 서정의 다음 단계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앞에서 살펴본 시편들이 자연(객체)을 응시하는 주체(자아)의 내면 풍경을 길어 올리고 있다면, 아래의 작품에서 자연은 ‘나/세상’을 관찰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몸을 바꾸고 있다.

 

중심이라 믿었던 팽팽한 줄을 놓친다.

힘껏 줄 당기다가 놓친 자국 손바닥에 선명하다.

사방으로 흩어진 줄에 발 걸려 기우뚱거리는데

유리창 너머로 기우뚱 바라보시는 늙은 배롱나무,

기우뚱기우뚱 웃으신다. 반질반질 윤나게 웃으신다.

날카로운 고양이 발톱으로 세상을 엿보면서

얽혀 옴짝 못해 몇 자락 햇살로 주저앉은 나를

기우뚱 웃으시며 발그레 내려다보신다.

이 쪽 허공에서 저 쪽 허공으로 줄 던지는

저 굽은 등의 자유로운 줄타기

기우뚱하게 비틀어진 것도 평화로울 수 있구나.

깊은 물관을 타고 우주가 기우뚱거리며 올라온다.

―「배롱나무」 전문

 

“날카로운 고양이 발톱으로 세상”을 엿보다가 “중심이라 믿었던 팽팽한 줄”을 놓치고 “사방으로 흩어진” 세속의 그물망에 “발 걸려” “기우뚱거리는” 화자의 모습이 전경화되어 있다.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시인은 “배롱나무”의 “기우뚱”한 관점에서 ‘나/세상’을 다시 본다. 이 지점에서 세상의 중심이 “기우뚱” 흔들린다. “늙은 배롱나무”가 “유리창 너머로” “기우뚱” 바라보며 “기우뚱기우뚱” 웃는다. 순간, 우주가 “기우뚱거리며” “깊은 물관을 타고” 올라온다. 이윽고 “기우뚱하게 비틀어진 것”들이 “중심이라 믿었던” 세상의 “팽팽한 줄”을 끊고 새로운 평화를 안겨준다. “기우뚱”의 이미지를 전용하는 경쾌하고 발랄한 감수성은 물론, “배롱나무”(자연)의 “발그레”한 웃음을 통해 ‘나/세상’을 “반질반질 윤나게” 닦는 언어적 연금술이 돌올하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에 음각된 자연의 풍경은 어떠한가? 내면을 돌아보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 시적 대상(자연)은 몸을 낮추어,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그리움의 언어로 시 속에 녹아든다.

 

내가 따라가지 못할 당신 생에는 방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까지 무심히 털어낸 별이 창가에 가득 엉겨있어 멈춘 세월처럼 있어 한 사발쯤 떠내어 흐르게 할 수도 있을 그 방, 먼지가 풀풀거리는 책을 읽다가 잠들어도 좋아서 마당가 떨어지는 비는 곡선으로 마른 지느러미를 흔들어 깨우고.

 

당신에게 꽃나무 한 그루 선물할 게요. 떨어진 꽃잎 돌돌 말아 나무 아래 가지런히 꽃길 만들어요. 따라가지 못할 길 새로이 만드는 사이 당신 목소리라도 등 뒤에서 느낄 수 있다면, 따스한 온기도 훅 들어와 비늘이라도 떨어지면 좋겠어요.

 

가끔 세월이 지루하여 바람도 일지 않고 꽃잎조차 떨어지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허공을 가르네요. 별 한 사발씩 간절히 떠내다 보면 오랜 수형을 벗어 살점이라도 돋을까요. 한 사흘쯤 당신이 장대비로 찾아와 누렇게 시든 꽃길 위로 생긴 물길 열린다면, 한 마리 반짝이는 물고기로 그 방에 갈 수 있을까요.

―「물기 사라진 건어는 꿈을 꾼다」 전문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수놓은 언어의 무늬가 애틋하다. “당신”과 화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深淵을 시적 상상력을 통해 메우려는 염원이 눈물겹다. 시인은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당신”의 “생”에 “방 하나”를 마련하고자 한다.

“물기 사라진 건어”의 이미지로 투영된 화자가 “당신”의 “방”에 닿기 위해 갈고 닦은 꿈의 언어가 출렁인다. ‘나’와 ‘당신’을 이어주는, 촉촉함을 머금은 자연의 언어가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마당가 떨어지는 비는 곡선으로 마른 지느러미를 흔들어 깨우고”, 당신에게 선물한 “꽃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은 가지런한 “꽃길”을 만든다. “별 한 사발씩 간절히 떠내다 보면 오랜 수형을 벗어 살점”이라도 돋을 것 같다. “한 사흘쯤 당신이 장대비로 찾아와” “시든 꽃길 위로” “물길”을 연다면 “한 마리 반짝이는 물고기로 그 방”에 닿을 수 있을 듯하다.

“비”, “꽃”, “별” 등은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물기 사라진 건어”가 “한 마리 반짝이는 물고기”로 거듭나게 하는 꿈의 언어이다. 이 꿈의 언어에 몸을 맡기고 “당신”의 “방” 문을 조용히 두드려보자.

 

고인환∙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 <공감과 곤혹 사이>, <한국 근대문학의 주름> 등이 있음, 젊은평론가상 수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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