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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신작특선/권정일/혼인비행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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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538회 작성일 13-03-19 14:54

본문

신작특선

권정일

혼인비행 외 5편

 

 

수만 쌍이다

열애의 빛으로 하늘이 낮아졌다 꽁지와 꽁지를 활처럼 말아 사분사분 한삼汗衫을 뿌리는 고추잠자리, 곡진한 전율

 

투명한 날개끼리 업고 날다, 안고 날다, 꽁지와 꽁지가 한 줄 되어, 하나一가 되어

 

그칠 수 없다고

멈추지 않겠다고

 

너를 낳으려고

나를 낳으려고

 

순연한 우주의 붉은 점막이 터진다

 

 

 

 

 

사소

 

 

함박눈이 오는데*

 

‘사랑해’ 하면서 흰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푸들에게 입을 맞추고 빠르게 돌아선다 흰 눈을 잡으려 푸들 앞발은 공중에서 황홀하다

 

등과 등이 마주 보며

점점 멀어지려는 간격

 

함박눈이 소리 없이 오는데

 

캄캄하게

푸들이 운다

개처럼 운다

 

울음은 하나의 기호, 하나의 기호처럼 여자는 사랑을 버렸다 그것만큼 아무것도 아닌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함박눈이 분간 없이 오는데

 

푸들을 놓아주는 건 함박눈 속에 들어가 펫사랑*보다 물컹한 눈물 눈, 물을 구분하지 말라는 애완이다

 

‘사랑해’

 

여자가 운다

개처럼 운다

 

* 유종인 시인은 풀어줄 개가 없는 건 눈물이 비치는 외도가 없다고 했다.

* 애완견 사료.

 

 

 

 

 

화법

 

 

구불텅구불텅 나는 초록뱀담쟁이

 

당신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소리 없음을 듣고 까끌섬섬 오릅니다.

 

금세 초록당의정을 입은 당신 하지만 당신의 본래 면목은 까슬한 침묵과

 

굳어가는 단단함이라는 걸 알기에 여러 갈래 내 혀는 보드랍고 염결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리아스식으로 불어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거추장스런 문법의 외투를 벗을 줄 아는 당신처럼

 

흔들릴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떠나는 법을 먼저 알아

 

일정한 높이의 고독까지만 오릅니다.

 

부디, 항진하는 체온의 허물로 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행여, 왜바람에 길게 목을 뺄까 두렵습니다.

 

 

 

 

 

그 복도 이야기

 

 

숨은 몸의 건축법에는 그 복도가 있지

 

몸에서 나가고 싶은 오른쪽 복도와 심장소리를 듣고 싶은 왼쪽 복도가 있지

 

빨간 새의 깃털이 떨어져 내리고 빨간 꽃잎이 조용히 떨어져 내리는 오른쪽 복도와 시벨의 일요일이 쉬어가는 왼쪽 복도

 

다 부르지 못한 노래의 그늘 저쪽, 왼쪽엔 빨간 새 오른쪽엔 빨간 장미를 나뉘어 들고 마주보는 직립의 문, 사이 너는 복도 중앙에 서 있지

 

열람하지 않은 여름의 묵시록과 몇 개의 달을 가진 그때처럼

 

깃털과 꽃잎이 수없이 떨어져 내리는 그 복도로 나는 걸어 나와 그 복도처럼 자고 싶지

 

덮고 잘 커다란 날개와 주전자 그리고 컵과 조그만 탁자

 

아, 幻은 칠 벗겨진 바닥에서 나뒹굴고 이 명징한 복도를 두 눈 뜨고 망설일 수 있을지

 

너는 왜 나를 왼쪽 복도와 오른쪽 복도에 진열해 놓고

 

수도원처럼 숨어 오래도록 천천히 수도원처럼 혼자서 가는 거지?

 

 

 

 

 

간빙기

 

 

별을 헤기 시작하면서 다락의 세계는 작아졌다

소원을 말하면서 갓 구운 호밀빵 같은 바삭한 별들을 편애했다

 

혼잣말이 되어버린 달팽이

 

무한의 궤도를 느리게 회전하며 촉수를 뻗는다

뭇별 총총

 

*

 

아르테미스의 연인 오리온을 슬퍼하고

음악을 끄고 불빛을 차단하고

 

말수가 줄어든다고 써도 무방한 별 긋는 밤

빛나는 성좌에 비밀의 선분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지우는

 

정원의 죽은 나무의 외로움을

소원을 보여주는 내내 시시함을

 

다 받아 안을 수 없어 함량미달의 체액을 분비하기란 여간 힘들어 별의 손목을 긋고 별자리를 의심했다

 

*

 

쓸데없이 웃는 날, 쓸데없이 우는 날

학을 접어 밀봉했던 소원을, 날렸다

별자리로 완성된 서랍손잡이를 어디에 두었을까

 

*

 

다락방은 얼마나 좁은 사생활인가

광활한 은하에서 축축한 마스크를 쓰고 몇 초 유성우로 내려 쏟아질 수 있다면 짧게, 소원은

 

되도록 짧게

되도록 마스크만큼 작게

 

 

 

 

 

ING

 

 

내 사랑 에우리디케, 당신은 당신이 아니오 당신은 당신의 생각 중이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것이오 오래된 약속이오 당신은 당신의 없는 이야기오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데스에 두고 왔기 때문이오 당신은 당신에게조차 아니오 당신은 공경도하이면서 공무도하요 당신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당신이오

 

내 사랑 에우리디케, 당신의 소멸은 당신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오 흰빛이 흰빛을 물들이고 당신의 빛은 향기를 날리오 말하지 못하는 말할 수 없는 지옥이오 내가 차마 뒤돌아보는 건 이미 사라진 사라질 당신의 그림자요 그림자의 그림자에서 어떤 슬픈 실루엣이 만져져요 당신은 도착 중인 리라이고 갈기갈기 찢긴 음악이오 우주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당신의 의미를 수습 중이오

 

 

 

 

 

시작메모

짧은 생각

 

 

글詩 쓰는 ‘나’가 있어

말言 하는 ‘나’가 있어

나는 존재하는 화자가 된다.

‘나’가 귀耳라는 유물론적 달팽이관을 관음할 때

사소한 것들이 주요 목록이 되는

잠자리, 개, 담쟁이, 門, 별자리 그리고 당신,

그리고…… 토씨와 부사만으로 겨우 존재하는

자립형태소 같은 것들에 귀 기울인다.

‘나’가 눈目으로 대표되는 가장 청신한 언어의 얼굴일 때

삶이 삶을 만드는 진실과 시가 시를 만드는 진실이 같다.

변화가 곧 로고스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모든 날씨와 두절된다.

모든 생각의 별미가 되기 위해서

그래서

그리하여

Carpe diem, Memunto mori

(현재에 충실하고, 죽음을 기억하라)

순간순간

나는 나를 사랑한다.

 

권정일∙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마지막 주유소>, <수상한 비행법>. 부산 작가상,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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