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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신작특선/정치산/행성에서 온 여자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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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정치산
행성에서 온 여자 외 5편
―대박요양원․1
그녀는 천 년 전에 지구에 왔다. 이십대의 모습으로 천 년을 살고 있다. 얼음공주로 불리던 시절 그녀의 고향은 다이아몬드 행성, 별과 달의 발바닥만 보이는 지구에선 시간의 통로를 만들고 깊은 동굴에 산다. 동굴은 비밀번호로 잠겨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은 숨을 쉬지 못한다. 차도르로 얼굴을 감춘 그녀에겐 영원의 침대가 있다. 푸른 불기둥이 있다. 갇혀있던 기억이 외출을 준비한다. 천 년 동안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다. 안개 속에 숨어있던 동굴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녀는 바람을 부풀리고 있다. 바람으로 알을 만들고 부화를 준비하고 있다. 빛에 둘러쌓인 그녀의 알이 부화를 시작한다. 그녀의 행성은 울타리가 정비되지 않았고 장미가시에 나팔꽃이 달리고, 호박꽃이 달리고, 메밀꽃이 달린다. 연결된 시간의 통로로 바다가 들린다. 출렁출렁 춤추던 꿈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지금 처음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죽었다가 산 남자
―대박요양원․2
그의 고향은 두 개의 태양이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네. 에너지의 흐름이 바뀌고 기후가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네. 일 년에 사계절이 몇 번씩 오가네. 그의 행성엔 하루 종일 검은 바람이 일고 룰렛이 바삐 돌아가네. 바쁘게 움직이는 손을 따라 눈동자들도 한쪽으로 쏠리네. 긴 속눈썹은 쏠린 눈동자를 가리네. 그는 죽었다가 깨어나네. 그의 친구들도 죽었다가 깨어나네. 때때로 그들은 죽었다가 깨어난다네. 연애에 빠지고 술에 빠져 죽었다가 깨어난다네. 깨어난 그들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네. 검은 선글라스 속 그는 며칠째 룰렛을 떠나지 못하네. 구부러진 등에 저장한 일용할 양식으로 하루를 견디네. 그의 눈도 룰렛을 따라 빙글빙글 돈다네. 룰렛에 묶여있는 그의 하루가 시간의 연자매를 돌리네. 그는 죽었다가 깨어나네. 그의 친구들도 죽었다가 깨어나네.
튕겨져 나간 남자
―대박요양원․3
화두를 던져 놓고 금 밖으로 사라진 그를 기다려요. 부스스한 회색그림자 있지만 없다고 밀쳐내요. 신발이 튕겨진 금 밖으로 사라져요. 튕겨진 신발의 안부가 궁금해. 수런거리는 바다 위로 바람이 스쳐가요. 정수리에 한 개의 눈을 더 갖고 있는 그는 조심조심 하늘의 옷자락을 들춰보고 있는 새를 낚아요. 금 밖으로 사라진 그가 겨울 산수화 속으로 아슴아슴 사라져요. 그의 뒷모습을 따라 가던 눈동자에 안개가 스며요. 놓쳐버린 그의 안부가 궁금해 작살나무는 보랏빛 열매를 바다에 던지고 화살나무는 붉은 열매를 하늘로 날려요. 천국으로 간 그에게 옆구리 터진 누드김밥이 씨름을 걸어요. 옆구리 터진 김밥과 씨름 중인 그 때문에 튕겨진 그의 신들이 갑자기 더 바빠져요.
실어증에 걸린 남자
―대박요양원․4
그가 쓰러져 말을 잃었다. 팔다리를 펼 때마다 소리만 친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통증이 올 때마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다. 달아난 친구를 기다린다. 사라진 돈을 기다린다. 그가 나타나면 할 말이 있다. 돈이 돌아오면 살 것도 같다. 하늘이 무너질 때마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땅이 꺼질 때마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말이 아니어도 사람들 다 알아듣는다.
꽃을 꽂는 여자, 꽃을 훔치는 남자
―대박요양원․5
그녀의 엄지와 검지에서 프리지아가 피고 히아신스가 핀다. 시클라멘이 피고 안개가 피고 스타치스가 핀다. 그는 노란 향기를 훔쳐 가슴에 숨기고, 슬픔과 추억과 빨간 비밀을 훔친다. 붉은 안개에 스미어 파란별을 훔친다. 그의 하루는 프리지아였다가 히아신스와 시클라멘이었다가 안개와 별의 하루가 된다. 그녀의 하루는 비비드*하다. 노란 프리지아를 꽂고 빨간 히아신스를 꽂는다. 보라빛 시클라멘을 꽂고 파란 스타치스를 꽂는다. 그는 노란 향기 빨간 비밀을 품고 슬픔과 추억을 품는다. 안개 속에 파랗게 흔들리는 그녀도 훔친다. 그의 하루도 비비드하다. 그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탁자에다 매일 꽃을 꽂는 여자, 그는 501호로 매일 꽃을 훔쳐 나르는 남자다. 그녀와 그의 숨바꼭질은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는 얼마 전 이곳에 왔고, 그는 오래 전에 이곳에 왔다. 그의 손바닥에 노란 향이 스미고 빨간 비밀이 드러난다. 안개의 하얀 숨결이 스친다. 푸르게 빛나던 그녀가 잡힌다. 하루하루 꽃을 훔치는 그의 심장엔 정전기가 일고 왈랑왈랑 가슴이 뛴다. 중독된 그는 꽃을 훔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 비비드:선명한, 밝은, 빛나는, 눈부신, 휘황한.
바느질하는 여자
―대박요양원․6
실이 없이도 바느질을 하는 그녀는 바오밥 나무를 사랑하네.
그녀의 행성엔 뜬금없이 바람이 불고 시간도 생각에 잠기지.
생각에 잠긴 세상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지나치지.
그녀가 보는 얼굴은 합격이네.
늘 불합격 선에 머무는 그녀는 바람을 꿰매고 있지.
바람은 구석에서 파랗게 웃어젖히지
실이 없이도 바느질 하는 그녀는 붉은 토끼와 검은 여우를 기르네.
그녀의 목록에는 바느질할 많은 이름이 있지.
그녀는 바오밥 나무의 뚱뚱한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지.
그녀의 머리 위로 두 개의 달이 슬며시 숨고 있네.
달 속에서는 하얀 토끼가 오들오들 떨며 밤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하지.
바람은 실없이 웃어젖히며 파랗게 넘어가고 있지.
두 개의 달이 뜨는 밤이면 그녀는 실 없는 바늘로 바느질을 한다네.
시작메모
토끼굴과 블랙홀에서의 길 찾기
삼각형의 심통이 껄렁껄렁 시비를 건다. 놈은 뾰족하다. 뾰족한 놈에게 틈이 보인다. 열린 틈으로 심통이 새어 나오고 바람의 손이 놈을 훑고 간다. 조금 열려있기도 하고 활짝 열려 있기도 한 마음이 열려 있는 심통을 도발한다. 거울에 있는 얼굴이 붉다. 엘리베이터는 고장이다. 식은 바람이 분다. 계단이 층층이 펼쳐진다. 다시 거울에 있는 얼굴이 파리해진다. 백층 건물을 오르기보다 힘든 이 작업에 힘이 빠져 잠시 주저앉는다.
가는 길은 가도 가도 토끼굴, 가도 가도 블랙홀이다. 발끈한 마음에 뛰어 보지만 늘 저만치 앞서 있다. 다시 바삐 길을 재촉하면 까칠하게 째깍대던 시간이 블랙홀로 뛰어간다. 간신히 붙잡고 서면 토끼굴에 빠진다. 길은 찾을 수가 없고 시간은 째깍째깍 까칠한 걸음을 재촉한다. 느슨한 발걸음을 지켜보는 검은 시간이 꼬리를 세우며 돌아서서 블랙홀에 뛰어든다. 검은 홀이 뒤집힌다. 붉은 토끼가 뛰어오고, 흰 고양이가 튀어 오른다. 삼각형이 점점 늘어난다. 늘어난 심통이 다이아몬드로 반짝인다. 뾰족한 그가 둥글게 말리고 보름달이 뜬다.
시는 나를 가만 놓아두지 않고 시비를 거는 삼각형의 심통이다. 블랙홀이다. 혼란이고 토끼굴이다. 놓칠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발걸음을 잡는다. 껄렁껄렁 시비를 거는데 싫지가 않다. 같이 뾰족해지고 한 발을 걸어 넘어뜨려 보고 싶게 한다. 토끼굴을 헤매게 하고 블랙홀에 빠지게 한다. 난 아직도 토끼굴과 블랙홀의 유혹을 떨칠 수 없어 여기쯤에서 서성인다.
정치산∙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원주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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