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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오늘의 시인/유안진|사랑, 그 이상의 사랑으로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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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오늘의 시인/유안진|사랑, 그 이상의 사랑으로 외 9편
유안진
사랑, 그 이상의 사랑으로 외 9편
아지랑이 눈빛과
휘파람에 얹힌 말과
안개 핀 강물에 뿌린 노래가
사랑을 팔고 싶은 날에
술잔이 입술을
눈물이 눈을
더운 피가 심장을
팔고 싶은 날에도
프랑스 한 봉쇄 수도원 수녀들은
붉은 포도주 ‘가시밭길’을 담그고
중국의 어느 산간 마을 노인들은
맑은 독주 ‘백년고독’을 걸러내지
몸이 저의 백년 감옥에 수감된
영혼에게 바치고 싶은 제주祭酒
시인을 팔고 싶은 시의 피와 눈물을.
다보탑을 줍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을 주웠다
국보 제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多寶塔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만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 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 모 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필요 충분 조건으로
지금 눈 오신다고
북촌 친구가 문자를 주었다
빗줄기를 내다보며 나도 답을 했는데
금방 또 왔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씻어낼 게 많고
그의 마을에는 덮어 가릴 게 많아서라고.
계란을 생각하며
밤중에 일어나 멍 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란 그런 거겠지.
세한도 가는 길
서리 덮힌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헤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秋史體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 녹지 않는 얼음짱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국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D. M .Z.
그림자마다 꺾이고 만다 철조망에 걸려서는
배어든 피 얼룩 남아있던 하늘도 눈감아버려 더 어둡다
왜 하필 우리의 고질병痼疾病이 요통腰痛인가를 알았어라.
같은 하늘일까?
땅이 하늘인 농부와
바다가 하늘인 어부와
신용이 하늘인 상인과
모국어가 하늘인 시인의
하늘은
같을까 참말로 제각각일까?
간디 기념관
달랑 안경 하나가 그이라고 우긴다
실태에 걸린 유리 눈알 두 개가 마하트마 간디라고
나머진 인도印度땅보다 크고 높아 들일 수가 없었다면서.
김제평야
공허 밖에 더 큰 공허가 있는 듯
하늘 밖에 더 큰 하늘이 있는 듯
혹한酷寒의 발굽에 걷어 채여 나동그라지는 이 통쾌함
가득한 공허空虛가 텅 빈 충만充滿 같은 이 무슨 야릇함이여.
스승나무
비움으로서 꺾어지지 않는 대竹와
채움으로서 휘어지지 않는 오동梧桐
둘 다 지조와 풍류의 나무라고 배웠어도
비워야 할 때 채우고 채워야 할 때 비워 살면서
달라서 더 멋진 스승님들 한자리에서 뵈옵다니.
산문
거짓말로 참말하기
시는 궁극적으로 연가戀歌 아니면 애가哀歌라고 생각한다. 삶을 노래해도 죽음을 노래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죽음을 써도 살고 싶어 쓰는 것이 되고 마니까. 사랑을 노래해도 이별이 겁나서, ―사랑이야말로 이별로서 완성되는 줄을 알아버려서―, 이별의 아픔과 이별 끝의 새로운 사랑을 기대한 삶이나 죽음을 쓰는 것이 되고 마니까.
또한 시는 언어예술이지만, 언어경제학적 언어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압축언어에다 최대한을 담아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시조와 일본의 하이꾸도 재고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내가 제일 무섭다. 이전 작품과 비슷하게 써질까봐, 방심해서 타성이 생겨 버릴까봐. 우리말의 모순어법인 거짓말로 참말 하는 반어적 기법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싶었다. 즉 거꾸로 살아와서 거꾸로 쓴다. 거꾸로의 거꾸로인 로꾸거로 역시 기법 이상의 발상 자체부터 거짓말로 참말하기의 심화를 시도하고 싶다. 특히 연시는 특징상 거꾸로 로꾸거로 기법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침묵에서 수다 떨기까지, 작품들이 비슷해질까 봐, 동일 실험의 반복 아닌, 진일보의 실험으로 쓰고 싶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 만년에 더 전위적이 되어갔다고 한다. 완성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거장다운 최선의 몸부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최적의 기법을 창조하거나, 기존기법을 선택하거나, 모두가 어렵다. 편편이 유일무이하게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문법에서 탈출할 능력이 모자라도, 설명될 수 없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하게 쓸 수 있었으면. 생각이 국경을 넘나들지 못하면 생각의 주인은 제 감옥의 수감자에 불과하다 싶은데도.
이런 고민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신작시집마다 직전 시집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11시집 <봄비 한 주머니>부터 지난해 시집<둥근 세모꼴>은 내 딴에는 다르게 시도해왔다. 시가 모이면 신작시집을 묶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새롭고 차별적인 신작시집을 묶고 싶어 했지만, 시단은 이점에 너무 무관심한 듯, 그럼에도 6월에 나올 새 시집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에게서 불행이란 원하는 만큼 쓰지 못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더 이상 시를 못 쓰는 것인데도, 갈팡질팡 허둥지둥 정신없이 살다가 갑자기 죽고 싶지 않는 데도, 원하는 대로 써지지 않아 늘 불행하다.
유안진∙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첫시집 <달하>에서 최근시집 <거짓말로 참말하기>까지 13권의 시집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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