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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연작장시/하종오/제1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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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연작장시/하종오/제1시경․
하종오
제1시경 제1작품 외 11편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칠월 어느 날 님께서 삽을 짚고 논둑에 앉아 계셨지요. 해마다 이맘때면 장마철이었으므로 미리 물꼬를 열어놓고 님께서는 들판을 바라보셨지요. 일평생 거둔 곡식으로도 논을 더 넓히지 못하신 님을 들판은 더 멀리서 에워쌌지요. 눅눅해지는 바람을 맞으며 나무도 풀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서로 기대는 한낮에 님께서는 기댈 데 없는 논에서 삽날만 깊이 박고 붙잡고 계셨지요. 논을 갈수록 자식이 자라서 더 많이 먹어대니 님의 농사는 끝날 수가 없었지요. 곧 큰비가 밀려와 님께서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열어놓고 앉아 계시면 그때 논이 빗속을 휘돌아서 왔겠지요. 어딜 가도 논이 좆아 왔기에 님께서 여름이면 논둑에 나와 앉아 계셨지요.
(저는 님을 따라 할 수 없어 달아났습니다.)
제1시경 제2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팔월 어느 날 님께서 마른 쑥을 모아 불을 피워놓으셨지요. 점점 햇볕이 엷어지고 어둠이 깊어졌지요. 저녁이 오자, 님께서는 개구리 우는 논을 한 번 둘러보고 달빛 속을 걸어서 집집마다 쑥 타는 내음 가득한 마을을 돌아보셨지요. 초가지붕 위에 박이 조금씩 더 둥그레지는 이웃집에서 쉬다 가라고 권하면 밤새 편히 쉬라고 대답하셨지요. 집에 돌아와도 잠잘 수 없으셨던 님께서는 박을 따서 켤 날 짚어보셨지요. 그리고 올해 추수 끝내면 일생에서 농사 한 번 덜 짓게 된다는 걸 문득 아시게 되었지요. 나이 한 살 더 드셔도 한 해 수확량은 나이 한 살 덜 드셨을 적과 같았지요. 쑥불을 뒤적거리며 불씨를 살리시는 님의 한숨 따라 연기는 나지막하게 감돌았지요.
(저는 들숨날숨을 죽이고 님보다 빨리 잠들어버렸습니다.)
제1시경 제3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구월 어느 날 님께서 닭을 잡으셨지요. 님께서는 닭장 안으로 팔을 뻗어 닭다리를 붙잡고는 암탉인지 수탉인지 가늠해 보고 꺼내셨지요. 그때 퍼드덕거리던 닭들은 한 마리 잡혀 나가고 나면 모두 날개를 접고 가만 있었지요. 님께서 닭 모가지 비틀어 식칼을 내리치시고 나면 저녁이 빨리 왔지요. 마루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상을 받으면 개가 어슬렁거리다가 던져주는 닭 뼈다귀를 핥고 먹었지요. 닭 한 마리로 포식한 식구들과 개가 그 자리에 누우면 님께서는 밥상을 내가서 설거지하시고 닭장에는 정적이 깊어갔지요. 이튿날 새벽, 닭들이 홰를 치며 울 때 님께서는 벌떡 일어나서 양팔을 펴시었지요. 머지않아 닭들에게 한 주먹씩 쥐어 던져줄 오곡이 익어 가는 소릴 님께서는 들으신 것이었지요.
(저는 평생 님께 고봉밥 한 그릇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제1시경 제4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월 어느 날, 님께서 낫을 가셨지요. 벼 베기 전에 꼭 몰아치는 태풍을 보내고 나면 님께서 쓰러진 벼를 포기포기 끌어당겨 세우는 데 낫이 먼저 소용되었지요. 또한 그쯤부터는 풀을 베어 말려서 여물을 비축해놓지 않으면 사람과 황소가 다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님께서 잘 알고 계셨기에 반나절 낫을 갈아 놓은 뒤, 황소 몰고 논두렁에 가서 반나절 풀을 뜯어 먹이고는 하루를 마치셨지요. 그러면 헛간에 걸린 낫이 반짝거렸지요. 추수할 날 다가올수록 더 벼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낫날을 한 번씩 손바닥에 대어 보셨지만 낫을 갈지 않는 날에는 님께서 여물어 가는 벼도 되새김질하는 황소도 바라보지 못하셨지요.
(저는 님을 쉬시게 하고 낫을 간 적 없었습니다.)
제1시경 제5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십일월 어느 날 님께서 쟁기질을 하셨지요. 벼를 다 베어낸 논에 보리를 심으려고 하루갈이로 황소에게 쟁기를 끌게 하셨지요. 그루터기들 뒤집히고 지푸라기들 묻힌 고랑에 거름을 내셨지요. 가을에 거둔 쌀을 아껴 봄을 넘겨야 하고, 여름에 거두는 보리를 아껴 가을을 넘겨야 한 해 먹을거리 장만 다하는 것이었지요. 그 일을 끝내기 위하여 님께서는 두둑을 고르고 파종을 서두른 뒤 겨울에 파란 보리 싹 밟을 날을 손꼽으셨지요. 님께서 보리를 심고 나서 논을 바라보시니 고랑이 더 깊어지고 두둑이 더 높아졌지요. 찬바람이 새 흙을 싣고 와서 논바닥에 골고루 뿌려줄 때 비로소 님께서는 달구지에 싣고 온 쟁기를 닦아 헛간에 세워두고 외양간에 황소를 매어두셨지요.
(저는 님과 달라서 겨우내 보리밟기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제1시경 제6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십이월 어느 날 님께서는 쇠죽을 쑤셨지요. 작두로 짚을 썰어 넣고 등겨를 떠 넣은 한뎃솥에 님께서 군불을 지피셨지요. 마당에는 가랑눈이 날리고 한뎃부엌에는 장작불빛이 날름거렸지요. 어둡기 전에 부지깽이를 들고 바닥에다 쌀가마와 식구 수와 날짜를 계산하다가 여물이 푹 익으면 부삽으로 바닥을 긁어 아궁이에 쓸어 넣은 뒤 님께서는 쇠죽을 푸셨지요. 그러면 황소는 배고픈지 몇 번 제 자리 걸음하며 워낭소리를 냈지요. 한 식구 중에서 가장 입이 크고 가장 거친 음식만 씹는 황소에게 가장 많이 먹이고 싶으셨던 님께서는 여물통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얼굴이 젖어도 마냥 즐거우셨지요. 그때쯤이면 두레밥상에 밥을 퍼놓고 둘러앉은 식구들이 님을 불렀고 저녁이 먼저 안방 문턱에 오르니 금세 님께서는 배고파지셨지요.
(저는 끼니때마다 속으로 님께서 밥을 남기시기 바랐습니다.)
제1시경 제7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월 어느 날 님께서 장을 보고 돌아오시던 중이었지요. 십 리 밖 장터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고삐를 잡으신 님께서는 추워서 웅크리셨지요. 황소에게 들길을 맡기고 깜박 잠에 드셨을 때 연을 날리던 아이들은 얼레를 잡은 채 저마다 논바닥에서 마른 쇠똥을 주워서 불 붙였지요. 까마귀들은 연들에게 하늘을 내어주고는 논두렁에 앉아 있었고 님께서는 아이들에게 들판을 내어주고는 집으로 돌아가셨지요. 연줄을 당기고 놓고 감고 풀며 더 높이 더 멀리 연날리기하는 아이들을 오오래 놀게 함으로써 님께서는 겨우살이를 하셨지요. 장에 나가 팔 거리도 살 거리도 많지 않은 살림살이였지만 님께서 장터로 오가는 들길 위에 모두 놓아두셨기에 찬바람 속에서도 황소가 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셨지요.
(저는 들판에서 님을 못 본 척하였습니다.)
제1시경 제8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월 어느 날 님께서 헛간에서 새끼줄을 꼬셨지요. 볏짚을 쌓아두고 손바닥에 침을 뱉으며 꼬아 가며 님께서는 금년에 쓰일 데를 떠올려보셨지요. 집안에 새로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에 금줄을 치고 마을에 노인네가 죽으면 염습하고 동여매야 했지요.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는 날로 씨로 지붕을 눌러 당기고 햅쌀을 찧어 가마에 담은 뒤에는 묶어놓아야 했지요. 님께서는 한 해 동안 새끼줄로 해야 할 일을 짚어보다가 볏짚 가운데서 깨끗하고 실한 지푸라기는 암탉이 달걀 낳으면 꾸러미를 만들려고 골라두고 나머지 푸석한 지푸라기는 불쏘시개를 하려고 모아두셨지요. 새끼줄을 다 꼰 후에 님께서는 두 손 탁탁 털며 해토머리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헛간 문을 조금 열어 두셨지요.
(저는 님께서 꼰 새끼줄로 올가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1시경 제9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월 어느 날 님께서 키우던 어린 꽃나무 한 그루를 이웃에게 주셨지요. 남의 집에 심긴 꽃나무를 함부로 캐 갈 수 없다는 걸 안 이웃이 작년에 오며가며 졸라댈 때 봄날로 미루어 뒀던 일이었지요. 남의 땅에 놓아두고 보기만 해도 좋은 것이 꽃나무이거늘 사람은 늘 제 땅에 심어놓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지요. 님께서 님의 땅에서 남의 땅으로 꽃나무를 옮겨놓고 바라보기로 작정하셨을 때 봄볕이 따스해지고 산마다 나무에 꽃들이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금년에 옮겨 심은 꽃나무는 힘에 부쳐서 내년쯤에나 꽃을 피울 거라고 님께서 말씀하셨을 때도 이웃은 뒤란에 심으며 기뻐하였지요. 님께서도 기쁜 나머지 한 그루를 더 캐어 직접 이웃집 마당가에 심어주셨지요.
(저는 님께서 키우시던 꽃나무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제1시경 제10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월 어느 날 님께서 비탈밭을 갈기 시작하셨지요. 작년에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김치 담아 먹고 봄까지 내버려둔 비탈밭에 금년에는 고추모종 낼 작정하신 님께서 황소를 몰고 계셨지요. 논을 갈 때나 밭을 갈 때나 황소는 님의 걸음나비로 앞서고 님께서는 황소의 걸음걸이로 뒤따라가며 쟁기질하셨지요. 황소가 님을 이끌고 가는지 님께서 황소를 몰아가시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둘 사이에는 고랑이 이어졌지요. 님께서 서서 쉬시면 황소도 서서 쉬고 황소가 서서 쉬면 님께서도 서서 쉬시는 사이에 두둑이 이어졌지요. 그래서 한 해 찬거리나 양념거리로 풋고추든 익은 고추든 거두기 위해서 님과 황소는 비탈밭을 다 갈았지요.
(저는 님을 대신하여 황소를 몰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1시경 제11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월 어느 날 님께서 고추밭에서 호미질을 시작하다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셨지요. 일생에서 한 번은 아름다웠다가 죽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든 들풀이든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셨으니 님께서 꽃을 피운 들풀을 차마 캐 버릴 수 없었지요. 들풀을 바라보며 님께서는 자신이 언제 아름다운 적이 있었는지 돌이켜보다가 숨이 막혀 일어나셨지요. 고랑마다 우거진 들풀이 님을 향하여 꽃을 마구 피워대자 님께서는 그만 힘이 빠져 손에서 호미를 놓아버렸지만 들풀이 될 순 없었지요. 고추들은 새로 가지들을 뻗어내어 겯고틀다가 기대고, 혼자 서 있을 수 없어 님께서는 또 주저앉으셨지요. 아무리 아름다워도 남에게 도움주지 못하면 아름다울 수 없다고 마음에 새기신 님께서는 들풀을 다 매지 못하면 거두어들일 고추가 줄어들어 한 해 양념거리 마련도 어려워진다고 중얼거리며 앉은걸음으로 호미질을 다시 시작하셨지요.
(저는 님께서 풀을 매시면 놀러 다녔습니다.)
제1시경 제12작품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월 어느 날 님께서 남의 논에 품앗이로 가셨지요. 그러면 남이 님의 논에 품앗이로 왔지요. 논 주인들이 저마다 혼자 쟁기질하고 물을 대고 써레질하고 나면 이웃들이 돌아가며 논마다 모내기해 주었지요. 이 벼 거두면 뉘랑 나눠 먹노, 에헤야디야, 뉘랑 나눠 먹긴 나랑 나눠 먹지, 에헤야디야, 논 주인이 선창하면 이웃들이 받았지요. 모내기 한 뒤에 님께서 남의 논에 품앗이로 가 나락을 베시고 남이 님의 논에 품앗이로 와 나락을 벨 때까지는 저마다 논두렁 오고가며 물꼬를 열고 닫았지요. 때마다 품앗이로 일 년 먹을거리를 거두는 논에서 님께서는 남과 함께 논일하다가 들녘이 되고 마셨지요.
(저는 님께서 평생 산 들녘이 싫어서 도시로 떠났습니다.)
하종오∙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님 시편>, <님>, <님 시집>, <반대쪽 천국>,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타운>, <입국자들>, <제국諸國 또는 帝國>, <남북상징어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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