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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특선/장정자/박태기꽃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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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특선
장정자
박태기꽃 외 5편․
장정자
박태기꽃 외 5편
박태기꽃 속에는 햇빛들이 쫑알쫑알 전생처럼 모여 있다.
부뚜막 얼쩡거리는 강아지 꼬랑지 걷어차는 내가 있다.
입이 댓발 빠진 며느리가 궁시렁궁시렁 들어 있다.
박태기꽃 속에는 하루 종일 입이 궁금한 시어머니가 있다.
수수꽃다리 하얀 별꽃이 얼핏 숨었다 보였다 한다.
광대*
탈을 거머쥔 까맣게 갈라진 손톱
비단치마 위에 얌전히 놓였다.
치마와 저고리 사이 한 뼘 생이
살 터진 북처럼 자글자글한 뱃가죽이다.
귀에 걸린 웃음, 걷어내면
방울뱀 무늬 새겨진 모래 발자국이다.
저 옷을 벗으면 산에 올라 지개 지다 두엄 만지다,
꽹과리 울면 훌러덩 뛰쳐나올 귀곡성鬼哭聲이 숨어사는 몸이다.
저 꽹과리 방짜 맞고 금 간 내 맨얼굴이다.
손톱 속 손톱이 갈라져 나오는
저것은, 자규 자규 붉게 우는 귀곡새다.
*2007, 김영수씨 사진 「광대」.
다육식물
꽃은 귓불 마주보기로 한다.
기왓골 너와지붕 오롯이 귀 열은 맑은 귀
밤새 귀엣말 설화가 끓다.
그 꽃 깨물면 붉은 피 지층에 자근자근 번진다.
도톰한 귀구슬에 칠복신, 조몽, 바위손, 귀고리를 했다.
내 몸에 식목된 저 붉은 지느러미
사막 돌무덤 위 살찐 꽃송이, 지느러미 붉다.
귓결 듣는 신기루, 귓문 빗장 지르다.
버리고 간 침 땀 체액이 피우는 로제트장미꽃
긴 귓불은 삼천 년에 한 번 사막을 걸어서 왔다.
귓집 속에 화약이 열린다.
비밀
나는 내 예술품 속 유적지를 거닌다.
새의 팔 다리를 조각하다 보면
방금 태어난 꽃도 실핏줄이 돋는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아름다운 내 속을 누가 치명致命처럼 뒹굴었는지,
끌을 쥔 작은 손 방금 빚어진 발을 빚으며 발의 먹물 씻겨준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아도 안다.
얼굴이 농담처럼 숨겨준 나의 비밀
예술품 가득한 박물관을 날마다 거닌다는 거,
인간의 유적지에 나는 천 번의 탄생과 죽음이었다.
피카소가 가슴을 찢어가고,
리히텐슈타인이 행복한 눈물을 받아가고,
조세핀 뮬란의 초상이 내 어깨를 가져간다.
내 정원의 정신에 나는 몇 번째 추방자일까.
새의 다리를 낳고 날개를 낳고 어린 가슴을 낳는다.
가리왕에게 갈가리 찢긴 붓다에겐 정말 비명이 없었을까.
걸어서 세계를 보여준 오래된 몸들
내가 내게 친절하기까지, 나의 비밀을
너무 늦지 않게.
잭, 나이프
접혀버린 칼춤, 잭나이프 잘 접혀 고요하다. 바깥 스치자 오랜 태생이 여싯여싯 등 버린다. 어둠이 뱉어낸 현기 비스듬히 사물 겨눈다. 검은 입속 꿈결처럼 듣던 전설적 고수들, 번번이 칼끝 흔들린다.
짜릿한 피 고인다. 유리는 끓여도 끓지 않고 끓여도 넘치지 않는다. 유리의 절제는 나의 필독서다. 용광로 속 꿈결처럼 듣던 전설적 고수들, 뻘겋게 달궈진 심장에 수 백 수 천 유혹 던져 하얗게 항례에 든 후 명징한 한 자루 칼, 그 명검이 부르르 떨며 부르는 소리 듣는다. 내 몸 속 기스락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 비틀리는 이빨에 묻혀있던 피냄새 닦아 준다. 나는 저 손의 몇 대 손일까. 화장을 줄이고 외식 생각 곱씹는 버릇들, 오늘은 비스듬히 사과 위에 부드럽게 물린다. 내 꿈은 언제나 서늘하다. 혈맥을 식힌 싸늘한 광채 잭, 나이프 입속에 접혀 고요하다. 이제 칼등을 쓸 것이다.
절밥종소리
절밥종 치면 커다란 여물통 속 꾸역꾸역 몰려드는 허기다.
절밥종 치면 몸 처처 들어앉은 죽은 부처 번쩍 눈 뜨는 허기다.
절밥종소리 목어 뱃속 쩔은 목젖 슬쩍 쓸고 가는 파문이다.
목불에 던져 놓고 벌떡 일어나 여동밥 챙겨먹는 생불이다.
탁발 나선 세존의 바루 속 꾸룩꾸룩 걸식 도는 허기,
저녁은 미물의 허기가 장구배미 쪽으로 더 쏠리는 저녁,
절밥종 속에 하루 세 끼 먹는 종족과 한 끼 먹는 종족이 있다.
내 하루는 뱃속에 모신 걸신들 세 끼 공양 올리는 하루
행자가 치는 밥종소리에 꼬박꼬박 밥 먹이며,
생생이 그 밥종소리에 불려가 밥 먹고 있다.
시작메모
짧은 생각
사물에 대한 내 생각이 삭막하고 비틀린 것일 수 있다. 비틀린 사물일 수도 있다. 사물 가까이 다가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되어보는 것, 사물이 하는 말 느낌 분노 기침 생각들, 어차피 겉핥기다. 그러나 노력한다. 몇 번이나 깨어지고 죽어지고 다시 내 앞에 와 있는가. 외로울 때 내 손 안에 꼭 드는, 수 세기 건너 내게 와 있는 작은 백자 찻잔 하나 들여다본다. 누군가의 수백 번 입술이 닿았을 부르튼 입, 가장자리 만진다. 불 건너오다 놀란 듯 한쪽이 조금 기우려 더 편안한 찻잔, 고요히 흔들림 없이 수백 년 앉은 자리에 앉아 있다. 흔들리는 나를 그 앞에 대어 본다. 아직 그 찻잔에 입술 얹지 않았다. 바라만 본다.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 사물이 곧 나라는 것, 지금은 그것만 알고 있다. 이 생엔 이 만큼만 알 것 같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 주셨다면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감사합니다.
장정자∙2007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뒤비지 뒤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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