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6호(여름호)신작특선/천선자/가슴 검은 도요 외 5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788회 작성일 12-11-05 15:04

본문

46호(여름호)신작특선

천선자

가슴 검은 도요 외 5편

 

 

가슴은 산불에 탄 숲이지. 생명 없는 검은 숲에는 억 만년 전

비글호를 탄 다윈처럼 인터넷 속 바다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며,

갈라파고스군도 핀치새의 이야기를 찾아서 찬찬히 노를 저어.

난 분명히 먹이와 환경에 잘 적응된 부리를 가진 핀치새야.

발톱을 세우고 당신의 잘생긴 얼굴을 할퀼 땐 영락없는 핀치새야.

당신의 뜨거운 피를 좋아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있는 핀치새야.

하늘을 담은 징 박힌 호수가 허리를 굽히고 흐린 달빛 아래에서,

기억을 물어뜯는 핀치새의 깃털을 반복해서 헹구어 내고 있지.

빛바랜 인내심을 화산 바위에 올려놓고 갈고 닦는 핀치새,

부리를 꿰어 찬 집착들이 날아올라 각을 맞추고 등고선을 이루네.

결 고은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핀치새가 봄의 속살을 쪼아댈 때,

검은 숲 속에 세운 말랑말랑한 푸른 박물관.

 

 

 

 

 

고래잡이

―희망정형외과로

 

두 녀석은 가다말고 문방구 앞 뽑기 인형통을 이리저리 만진다.

꼴뚜기 망둥이 미꾸라지를 파는 수건을 머리에 쓴 꼬부랑 할머니,

지구에서 처음 마주친 듯 발바닥이 보도블록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계단을 오르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 화장실을 간다 떼를 쓴다.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녀석의 표정이 바싹 얼어 붙어있다.

서로 먼저 들어가라며 실랑이를 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녀석이 마취주사를 맞고 편안하게 눕는다.

얼마 후 정적을 깨는 의사, 예쁜지 어머니가 보세요.

오금이 절여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린 손을 슬며시 내린다.

하얀 시트 위에 낭자한 핏물, 아기 고래 한 마리가 처연하다.

앞이 캄캄하고 메스꺼워서 화장실로 뛰어간다.

축 늘어진 어깨를 부축 받으며 겨우 병원문을 나선다.

눈 속에서 스쳐가는 사물들이 비틀거린다.

어기적거리면서도 장난을 치며 앞에 가는 두 녀석은

종이컵 하나씩 당랑거리며 만선의 꿈을 안고 포경선의 닻을 올린다.

 

 

 

 

코트 속의 남자

 

 

그가 태양의 자궁을 찾아서 간다.

지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자신의 DNA를 생각한다.

가방 깊이 넣어 둔 마지막 자존심인 트런치코트를 입고,

태양의 DNA가 화석으로 남아있는 패스트푸드점으로 간다.

차양 밑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헐벗은 가로수가 옷깃을 세운다.

거리를 헤매다가 노루잠을 자던 곳의 뜨거운 입김을 생각한다.

빈 가슴에 포근한 가슴 한 자락 내어주던 의자를 생각한다.

혹한 속을 걸어가는 코트 속에서 간간이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오르는 발끝이 무지개를 만든다.

창을 등지고 앉아서 메뉴판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주문한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 원짜리를 꺼낸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몇 개의 쿠키로 잘록해진 하루가 배를 채운다.

오르곤 속의 인형이 진주구슬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춘다.

진한 커피향에 젖어있던 그가 오르곤 속의 인형과 춤을 춘다.

달아오른 벽난로가 어깨를 끌어안고 그의 언 볼은 창을 물들인다.

탁자 위의 생수컵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눈꺼풀을 말아 올린다.

풀어진 가방이 곯아떨어지고 헤진 잠을 깁는 패스트푸드점.

새로운 DNA가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패스트푸드점.

 

 

 

 

 

척, 하며 가는 길

 

 

너에게로 가는 길은 막다른 도로이다.

사방이 벽으로 쌓인 도로이다.

꺽꺽 차오르는 목구멍에서 오리소리가 난다.

이십사 시간 산소 없이 살아간다.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건, 그냥 사는 거다. 살아주는 거다.

삶의 깊이가 꼭 발목까지만 닫는 얇고 딱딱한,

그 자리에 서서 한 길 어둠만 퍼 올린다.

금이 간 마음의 동공이 도로가에 실핏줄을 남긴다.

메마른 두 눈에서 돌알이 커 가는데 눈물이 난다.

눈물은 안개로 남아 막다른 도로 위에 눕는다.

사는 척 하는 거다. 척, 하며 습관적으로 사는 거다.

꽉 막힌 좁은 도로에서도 척, 하면 길이 열리더라.

 

 

 

 

 

복대리

―그림자의 그림자

 

대리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선임하는 복대리.

본인을 대신하는 복대리 임의 대리 복대리.

등잔불 아래 두 엄지를 펴고 깍지 낀 네 개의 손가락,

창호지문 위에 검둥이 한 마리 나이테를 잘게 자르고,

계단을 오르면 줄었다 늘었다 압축되어가는 복대리.

앞으로 끌어 당겨도 거인처럼 뒤로만 커가는 복대리.

정오의 태양 아래 서면 검은 보자기 속으로 사라지는 복대리.

마술사가 쥔 칼이 상자를 가로지르며 머리가 사라지고,

몸통이 사라지고, 두 팔이 사라지고, 두 다리가 사라지는 복대리.

영원히 검은 상자 속에 사는 본인의 대리, 복대리.

 

 

 

 

그녀는 유명한 셰이프

 

 

그녀는 매일 달콤한 사냥을 떠난다.

난장이 똥자루만한 몸매에 긴 골프채를 업고 간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매의 눈으로 먹이를 찾는다.

레이더망에 걸린 먹이가 유혹의 덫에 발목이 잡힌다.

오랜만에 실한 먹이를 앞에 두고 침샘이 터진다.

미각이 뛰어난 그녀가 요리하는 방법은 거칠고 빠르다.

단번에 털가죽을 벗겨내고 뼈와 뼈 사이의 살을 발라 먹는다.

부드러운 선홍빛 살점, 혀끝에 굴려서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맛을 음미하던 그녀가 세차게 걷어차며 하는 말,

땡전 한 푼도 없는 놈, 엉덩이만 탱탱한 수놈이군.

 

 

 

 

시작메모

내 영혼의 한 톨, 시

 

 

내개 있어 시란 내 영혼의 한 톨이다. 잃어버린 한 톨을 찾아서 거리를 서성인다. 광화문 네거리, 장터골목 국화빵가게, 한강 백사장에 가면, 모래알처럼 작고 태산처럼 높은 한 톨을 찾을 수 있나. 눈앞에서 떠나가는 저 유람선을 타고 가버렸으면 어쩌나. 비행기도 갈 수 없고 자동차도 갈 수 없는 오지로 가버렸으면 어쩌나. 전화를 걸어도 수신 거부를 하고 메시지를 남겨도 감감 무소식이다. 흐무러진 또 다른 한 톨의 어깨를 부축하고 터덜거리며 걷는다. 사막의 신기루 같은 한 톨, 간절한 한 톨, 온통 한 톨 생각뿐이다. 구멍이 숭숭한 머리 구석구석에 쥐가 돌아다며 생각들을 파먹는다. 마술피리를 불어대던 야생고양이가 쥐와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들쑤셔놓은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인다. 그저 한 톨이 지나간 길이라고 짐작하며 그 길을 수없이 오간다. 어느 지점에 멍하게 서서 레일 위를 굴러가던 앞선 바퀴들을 생각한다. 조그마한 것들이 세상을 움직이던 바퀴들의 자국들, 무지갯빛이다. 간간이 불이 꺼진 열차와 내부가 환한 열차가 번갈아가며 다가온다. 환승역에 내린 많은 사람들은 색색의 노선을 찾아서 제 갈 길을 간다. 빠르게 달려가는 열차의 뒤 모습은 서늘한 덩어리 하나 던지고 간다.

웅성거리는 계단 귀퉁이에 붙은 찢어진 전단지 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바퀴들은 보이지 않고 텅 빈 허공만 갈 길 몰라 바람에 펄럭인다. 이대로 영영 한 톨을 찾을 수 없나,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데, 한 톨의 웃는 얼굴이 얼룩진 인화지 속에서 발길을 잡아당긴다. 혼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가로등의 눈시울이 붉은 등을 켠다. 캄캄한 밤 부스러기 긁어모으던 새벽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천선자∙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