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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시/이승하/투견장에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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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투견장에서 외 1편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랬다고?
흥! 싸움을 붙이고 흥정도 붙이겠어
개가 개를 물어뜯는다
사각의 링 철조망 우리 안에서
喜怒哀樂愛惡慾 중
怒와 惡만 길들여 오오
신이 여기 오시면 통곡하리라
눈곱만큼의 사랑도 털끝만큼의 자비도 없고
넘쳐나는 것은 돈 돈 돈다발
돌아버린 돈과 미쳐버린 욕망
투견입니다! 십 분 남았어요!
들어올 사람 어서 들어와 돈을 거세요!
잘만 맞히면 10만원 걸어 100만원 탑니다!
투견입니다! 100만원 걸면 1000만원 법니다!
개판 오 분 전…… 싸움 붙자 완전 개판이다
이긴 개는 헐떡이고 진 개는 울부짖고 사람들은 고함친다
죽여 임마! 뭐하는 거야 이 짜식아! (개자식아?)
한 번 물면 상대 개가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법을
주인은 가르친다
분노를, 증오를, 난폭함을, 끈질김을
마침내 승부가 났다
야구장 만루 홈런 터졌을 때보다 더한 함성
오늘 또 개 십 수 마리 파르르 떨며 숨 거두고 있으리
하늘이 안 보이는 어느 시골 식품창고 안에서
광분하는 우리, 돈을 쥐고 기뻐 날뛰는 우리
우우 저 우리 속의 개만도 못한 도박판의 우리
부활하는 새들
예감으로 눈뜨는 새들이 있다
바람을 잠재우고, 어둠을 쪼고 있는 새의 무리
하늘이 죄다 저희들 것이다
앞에서 이끄는 우두머리 새를 따라
12사도 같이 따르는 새의 편대
새의 편대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 같은
저 생명, 생명, 생명체의 떨기
새벽의 끝이 아침이 아닐 때
육지의 끝이 바다가 아닐 때
글쎄, 이제는 이 지구의 종말이 가까이 온 것 같다
고갈된 힘의 원천들, 세상은 온통 잿더미 혹은 쓰레기 더미
무덤 들어설 곳 없는 공원묘지 너머로
새들이 힘차게 날아가고 있다
저희가 가는 길을 아는 자들은
천둥번개 속에서도 전율하지 않는다 절망하지 않는다
별의 행로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
한 옛날 선지자가 말하였다
딸을 팔아넘기고 아들한테 죽으리라고
형제를 죽이고 부모한테 버림받으리라고
한 옛날 신의 아들이 말하였다
사람의 아들을 배신하고 은화 30냥에 나를 팔아넘기리라고
유사 이래, 인간은 무기를 개발해 왔고
새들은 하늘을 지켜왔다
엄동설한에도 폭풍전야에도 날개를 퍼덕이며
공장 굴뚝 검은 연기를 뚫고 화산 폭발 붉은 연기를 뚫고
먼 북녘 하늘로 무리지어 사라진 새들
계절이 바뀌자 또 다시 나타난다
죽었다 다시 태어난 것인가
또 다시 하늘을 채우겠다는 듯이, 힘찬 군무 저 날개로
일제히 춤을 춤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가장 확실하게 증명한다
유사 이래, 땅을 지배해 온 인간의 무리
석탄도 고갈되고 석유도 동이 나고 원자력을 믿었다가……
삼삼오오 모여 하늘 우러러보며 울고 있는데
장엄하다, 새들이 그리고 있는 저 하늘의 연속무늬
하늘의 색깔이 바뀌고 있다
이승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공포와 전율의 나날>,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등.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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