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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시/백인덕/저녁독서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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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독서 외 1편
이내가 내려서면
푸른 통증의 몸이 열리고
느리게 서성이던 구릉들이 낮아지고
사각의 창이 동그랗게 깎인다.
외면할 수 없는 활자活字로 날아 와
제 머리를 밀어 넣는 서녘의
작은 새들,
작고 검은 눈이 이쪽을 향해 열린다.
무한히 열리며 층층이 무너진다.
언제던가,
낮은 구릉마다 맨발로 세워졌었던
무엇이었던가,
한없이 떨며 휘던 푸른 몸의 수신호는
그리고 까닭은,
이내를 거슬러 젖은 머리 곧추세웠던
무수한 저 환희와 상심의 화살들.
다 어디로 쏘아 올려진 것일까?
무너진 작고 검은 눈이 단단히 감긴다.
저녁의 기습 한파,
동그란 창이 속 깊이 얼어붙는다.
작은 활자들의 첫 생매장.
새벽 독서
페이지가 엉켜버렸다.
뒤뜰 고양이가 보채고
스마트폰이 먹통이 된 순간,
어쩐지,
무언가
중요한 내용이 꼭 들어있을 것만 같은
얇은 페이지가 엉켜버렸다.
112~113에서
116~117이 자꾸 펼쳐진다.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생은 한 생일 뿐이다.
반성할 그 무엇을 페이지 가득 적어 두었던가?
반쯤 열린 창을 마저 열어젖히고
먹통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꽂고
슬쩍, 고양이처럼 가슴 쓸어내리며
다시 새 책을 펼친다.
… …
그대의 지문이 파랗게 떠 있는 속표지
그만 멈추고 만다.
읽지 말아야 할 페이지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속 깊이 닫아 두어야 할
검은 페이지들.
백인덕∙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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