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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시/전순영/오늘을 밀고 가는 소나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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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밀고 가는 소나무 외 1편
꽃지 해수욕장에 갔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뜨고 바닷물이 나가면 육지가 되는 바위산에 소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살아간다 그들 뒤로 가서 보고 앞으로 가서 보고 옆으로 가서 보니 제각각 땀을 흘리며 오늘을 밀고 올라가는 소나무들
키가 작은 나무는 작은 돌을 밀어올리고 키가 큰 나무는 큰 돌을 밀어올리고 있다 산 중턱에 나무는 밀고 올라가던 돌에 기대어 땀을 식히고 있다 어떤 나무는 밀고 올라가던 돌이 아래로 대굴대굴 굴러버리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잎이 누렇게 시든 나무, 몸에 옹이가 박힌 나무, 뿌리가 뽑혀버린 나무는 하늘에 기대어 서 있다 나는 지금 바다 어디쯤에서 오늘을 밀어올리고 있는 것일까
크레파스 한 다발
명아주빛 시월이 길 위에 뒹군다
쭈그러진 잎새엔 사람이 떠내려가던
장마가 묻어있고
전봇대가 넘어지던 태풍이 묻어있고
늘 회색빛 구름 속에 갇혀 해를 향해
구원의 손 흔들던
하늘 내려앉은 날들이 묻어있다
이제 시월은 크레파스 한 다발 싸안고
어느 길 모서리에 부딪고 부서지며 가리라
반짝이던 하루도 없이
빨간 꽃 한 송이 피우던 봄날도 없이
손 호호 불며 첫새벽을 열고 나와
허리가 휘어지게 하루하루를 지고 종종걸음은
저 무성한 새순들을 키우고
세상 모르고 하늘 향해 재잘대는 가지들 키워놓고
빈자리만 남겨놓고
저 하늘로 날아가 버린 나무야 나무야
전순영∙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목이 마른 나의 샘물에게>, <시간을 갉아먹는 누에>. 에세이집 <너에게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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