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5호(봄호)시깊이읽기/이송희/유기체로서의 ‘몸’과 생태적 사유-정진규 시 「몸詩·36-물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
페이지 정보

본문
45호(봄호)시깊이읽기
이송희
유기체로서의 ‘몸’과 생태적 사유-정진규 시 「몸詩·36-물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
몸詩·36
―물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
정진규
기억나지 않지만 물속엔 깨끗한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른 새벽에 안개를 헤치고 가서 풀밭을 한참 걸어가서 물가에 당도하여서 젖은 발로 그걸 보고 들었다고!
그는 다시 말했다 햇살이 그의 따뜻한 혀로 이슬들 핥기 시작한 바로 그때쯤, 마침내 물속에서 솟아오른 꽃을 두고 오, 물이 알을 낳았다고!
그러니까 꽃은 알이다. 그러니까 물은 子宮이다. 두근거림이란, 회임한 내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내가 듣던 바로 그런 소리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상처를 핥아다오, 물 속 꽃의 두근거림아!
1.
몸詩는 접근 자체가 어려워 보인다. 몸에 관한 다양한 상상력이 머릿속을 맴돌기 때문이다. 근대 문명 이후 우리 삶은 과학기술의 합리성과 함께 심각한 질병과 상처를 동시에 끌어안았다. 기술문명의 요구에 부응해야 자본주의의 생태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우리 몸을 구속하며 지배하고 있다. ‘몸짱’, ‘얼짱’ 신드롬이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좋은 몸이 큰 자산’이라고 믿는 이 시대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몸이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것이 환경을 가지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도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다. 특히 몸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실체가 사회 속에서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됨에 따라 몸이 지닌 본래의 가치중립적인 실체는 사라지고 사회적 외피만이 몸을 통해 작동하게 된 것이다. 몸과 정신을 이분화 시킨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몸은 정신의 우월성 아래 심각하게 억압당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외모 지상주의lookism나 성형 중독 현상들은 우리의 몸이 계급과 지위, 상품적 가치 등을 평가하는 자본주의의 도구화가 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90년 이후 ‘몸’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발견’, ‘정체성 회복’, ‘권력에 대한 구조적 인식’ 등 몸을 세계 속 존재의 매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았다. 오형엽의 말처럼 몸은 근본적으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다양한 코드들이 교차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탈코드화가 일어나는 창조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에서 시작된 현상학에서는, 신체를 단순히 물질적인 육체가 아니라 진정으로 활동하는 유기체로 본다. 현상학적 신체론을 전개한 대표적인 학자 메를로-뽕티는 ‘몸’을 ‘육체’로만 인식했던 전통주의적 관점에 대립된 입장을 견지하며, 인식의 궁극적인 완성이 몸의 지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고, 신체와 의식, 신체와 주관의 일체화를 주장하면서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세계와 관계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즉, 인간 존재를 인간의 몸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사회·역사적인 의미망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진규 시인의 ‘몸’은 사회와 역사적 의미망을 형성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자연적 세계를 초월한 유기체로서의 생명, 즉 화해와 균형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몸詩」(1994)와 「알詩」(1997) 연작을 통해 사물로서의 몸과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몸에 대한 사유를 산문시로 노래한 바 있으며. 최근 <사물들의 큰언니-율려집律呂集>을 통해 모든 사물과 대상을 율려律呂의 가락으로 빚어내며, 균형적 질서로서의 몸을 노래했다. 우주의 생체리듬 속에서 시의 실체와 몸이 만나는 과정, 그 안에 시인이 줄곧 추구해왔던 산문시의 리듬이 존재한다.
김지하, 정진규, 김혜순, 최승자, 김언희, 김기택, 채호기, 김선우, 이연주 등 ‘몸’시를 쓰며 끊임없이 ‘몸’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는 시인들은 많다. 그러나 총 88편의 몸詩를 통해 몸이 곧 자연이고 우주의 질서라는, 유기체로서의 몸을 노래한 정진규 시인의 여정은 어느 한 시대를 지목하지 않는다. 그의 몸詩는 어쩌면, 분열된 사회 속에서 삶의 원형을 기억하고 회복해가는 과정인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살면서, 그의 시를 되새겨 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2.
정진규 시인에게 ‘몸’은 세계 자체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이 말은 곧 세계나 존재가 곧 유기체, 생명으로서의 몸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건강한 세계일수록 건강한 유기체를 낳게 되는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원리가 그의 시에는 존재한다. 다음의 시는 생명을 낳고 낳는 유기체로서의 몸의 사유가 두드러지게 표현된 시다.
기억나지 않지만 물속엔 깨끗한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른 새벽에 안개를 헤치고 가서 풀밭을 한참 걸어가서 물가에 당도하여서 젖은 발로 그걸 보고 들었다고!
그는 다시 말했다 햇살이 그의 따뜻한 혀로 이슬들 핥기 시작한 바로 그때쯤, 마침내 물속에서 솟아오른 꽃을 두고 오, 물이 알을 낳았다고!
그러니까 꽃은 알이다. 그러니까 물은 子宮이다. 두근거림이란, 회임한 내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내가 듣던 바로 그런 소리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상처를 핥아다오, 물 속 꽃의 두근거림아!
―「몸詩·36-물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 전문
‘물’과 ‘꽃’은 각각 유기체로서의 몸으로 이어져 있다. 그에게 세계나 존재가 유기체로 인식되면서 ‘알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고, 결국 무언가를 낳는, 생의 근원에 가 닿게 된 것이다. 이 시에서 물은 꽃의 두근거림을 아는 존재다. 꽃은 형태상 중심의 이미지이며 영혼의 원형을 상징한다. 붉은 꽃에서 생명 탄생의 피를 연상할 수 있듯이, 물이 꽃을 낳는다. 몸으로서의 물이 몸으로서의 꽃을 낳은 것이다. 꽃은 여기서 알이며, 생명의 씨앗이므로 물은 자궁이 되는 것이다. 임신한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듣던 아이의 태동을 떠올리며 그 생명의 뛰는 소리를 물속에서 듣는 화자의 마음은 두근거린다. 생명의 경이로움 때문이다. 갓 태어난 송아지를 어미 소가 핥아주듯 “물 속 꽃의 두근거림”에게 “상처를 핥아”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상처를 상처로 문지를 때 건강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자연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과정 속에서 우주 만물의 진리가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 아닌 다른 몸을 받아들일 때 가능해진다. 정진규 시인이 욕망했던 유기체로서의 몸은 이렇게 서로에게 몸을 허락할 때 건강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총 2연으로 구성된 이 산문시는 첫 연에서 “물속엔 깨끗한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는 정보와 “물이 알을 낳았다”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물이 알을 낳는다는 놀라운 정보는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 “그는 다시 말했다”라는 반복과 “(안개를) 해치고 가서” “(물가에) 당도하여서”의 구조 반복은 생명의 경이로운 현상에 접근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입증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준다. “그러니까”로 시작되는 둘째 연은 첫째 연과 인과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니까”로 이어지는 짧은 구문의 반복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유기체로서의 몸이라는 인식을 환기한다. 회임한 아내의 뱃속에서 듣던 두근거림과 물속의 꽃의 두근거림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는 유기체로서의 몸인 것이다.
“이슬은/하늘에서 내려온 맨발/풀잎은/영혼의 깃털/고맙다/서로 편히 앉아 쉬고 있다/허락하고 있다”고 노래했던(「몸詩·19-和」)는, 물이 꽃의 두근거림을 아는 것처럼 당연하게 알몸으로 서로의 몸을 허락한다.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라는 시에서도 그는 “우리 여자들이 물물 썰물로 제 몸 속에 가두고 있는 바다, 아기를 낳는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풀밭에서 그 초록 힘들의 무리를, 낳는 힘들을 보았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생명을 낳고 키우는 자연의 공간에 건물을 세우고, 부유함을 과시하면서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몸詩에서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대상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단절된 현대사회 속에서 화합을 꿈꾸는 시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물이 꽃을 잉태하여 낳은 것처럼 이슬과 풀잎이 몸을 허락하여 한 몸이 되는 과정에도 고마움을 표현하는 시인. 현대인은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라캉의 말처럼, 상상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소외, 즉 거울 속의 이미지처럼, 내 것이면서도 내 것 아닌 것이 현대사회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소통의 단절과 소외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려는 시인의 의도가 만져지는 시다.
정진규 시인은 “내가 기댈 곳은 몸밖에 없다/몸은 나의 결핍이며 충만”이라고 했다. 그에게 “몸은 내 마음의 밥”(「몸詩·65-맨몸)인 것이다. 그는 “몸밖에”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주 만물의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주장대로 하자면 몸과 마음이 그 질량이/늘 같아야 하는 것인데/몸이 많이 축나 있”음을 느끼는 순간, 그는 어디가 아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시인은 “마음이 몸을 파먹어 그렇다”고, “따지면 마음도 야위어 그렇다”고, “마음이 배고파 그렇다”고 애기한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마음에 상처를 내고 그 허기진 마음이 몸을 파먹게 되는, 상처의 연쇄 작용이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전달되고, 우리는 그 대가로 아파해야 한다. 몸과 마음의 불균형은 결국 우리 사회가 온갖 자본의 투쟁과 계급의식 속에서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허기진 마음에 스스로 제 몸을 파먹어야 하는 슬픈 생존의 원리를 시인은 서정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김인환은 <몸詩>의 해설에서 정진규 시인의 몸詩야말로 “인간의 신체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의 교두보橋頭堡로 구축하려는 완강하고 치열한 실험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시 쓰기는 개개인의 몸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의 원활한 소통을 꿈꾸는 몸의 실험인 것이다. 시력詩歷 50년을 훌쩍 넘은 정진규 시인에게 몸은 현대사회의 욕망과 가치체계에서 왜곡되기 이전의 상태, 즉 0년을 근원적 공간으로 사회된다. t년을 근원적 공간에서 우리는 늘 알몸으로 만난다. 이 알몸의 상태를 시인은 참다운치체복의 길로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진정한 공간에서 우리사회를 염원하는 시인의 소망이 담겨 있다 할 것이다. 요즘 우리의 몸이 많이 불편한 이유는 존재의 위치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송희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 이전글45호(봄호)시깊이읽기/박성준/예견된 고통, 순례자의 호흡-박주택의 「꿈의 이동건축」 12.06.23
- 다음글45호(봄호)정우영의시평/정우영/관념에서 뽑아 올리는 감성의 시들-이민호 시집 <피의 고현학> 탐색 12.06.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