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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시깊이읽기/박성준/예견된 고통, 순례자의 호흡-박주택의 「꿈의 이동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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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937회 작성일 12-06-23 12:42

본문

45호(봄호)시깊이읽기

박성준

예견된 고통, 순례자의 호흡-박주택의 「꿈의 이동건축」

 

 

꿈의 이동건축

박주택

1.

목재를 실어 나르는 貨車를 타고

숲으로 가네.

수맥을 짚어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동안

구름이 어둡게 어둡게 밀려오지만

풀밭에 제비꽃 몇 장 숨기고 있겠지.

훠어이 훠어이 부는 바람같이만

처음인 곳으로 가는 나중의 하늘.

숲 속으로 들어서면 푸른 잎맥의 바다.

물레를 잣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하늘이

내게로 내려와 물을 주시고.

마을의 풀밭에 씨앗을 뿌리시고.

아하 바람은 한사코 내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끌로 땅 끝을 깎아 나무들 사이의 行蹟을 깎아

햇살을 모아 두면서, 바람의 옆모습을 지켜본다.

세계는 옆으로 열리고 열린 창문처럼

쑥 뿌리가 내 겨드랑이 털까지 휘감아 돈다.

 

2.

뽑힌 노을은 東쪽 하늘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창포 꽃잎이 티눈처럼 손바닥에 퍼지고

귀에 잡힌 푸른 공기, 푸른 목숨이 서럽게 느낄 무렵

가슴속 얽혀 있는 내 生涯를 점치리라.

별을 보며, 넓적다리에 진득거리는 절망을 떼어다오.

어제처럼 노을 위에 누울 때

까마귀 떼 내 발밑으로 돌아와 눕고.

 

무릎 사이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강물이 빠져나가 시방,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랑 앞에 서면 반딧불보다 더 빛나는 나뭇잎들. 산이 되는 바람에 의해 숲을 건너온 강물은 팽팽한 슬픔을 만드는데

나는, 흡반으로 길고 먼 바다를 빨아들인다.

 

한 마름의 비단으로 아버지가 가슴을 껴안네.

이 손바닥에 비쳐지는 단 하나의 바다. 우수의 불꽃,

안개 표지판 없는 生涯의 채찍을 몰아

西녁 하늘 굽이굽이 돌아 모두

내 집으로 불러들이는

내 뒤를 밟던 새떼.

 

3.

손수 나의 흉금을 털어놓자

화살 모양의 안개는 지평선 밖으로

과녁을 찾아 떠나가고.

나는 집 구조와 가구들을 이동시킨다

강물 때문에 어느새 현기증이

높낮이의 생애를 닮아가도

나는 다시는 태양을 찾지 않는다.

처음으로 약속받은 땅의 일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바뀌지 않는 것이므로.

다만, 나무들이 지평 위에서 나를 지켜보기 위하여

날마다 까마귀알을 받아낼 뿐이므로.

 

그러면서도, 생명을 낳고 뜨거운 혈맥을 찾아 계곡을 건너온 물소리가 굽이굽이 천장을 올리고, 허물을 벗는 바람을 얼러 등 굽은 회양목 아래서 또 다시 깊은 잠을 자리라. 그때는 겹겹의 사랑이 땅 끝에서, 살아 있는 나를 눈물겹게 껴안아 주리라.

 

내 입의 불, 어두운 저녁녘에 그려내는 내 눈의 太陽,

꿈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아름다운 약속.

지평을 밝히는 꿈으로 새는 날아가고

머리에 불꽃을 이고 아침.

나는 잠을 깬다. 일찌기

내가 貨車를 타고 이주해 온 숲의 아침에

맑은 햇살이 거미줄을 투명하게 비춰주고

보물과 곡식들이 가득 찬 나라에서, 말하리라.

깊이를 숨긴 고독 속 새로 남아

내 굴레가 무엇이며

어떤 속박으로 죄어드는가를.

그때,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고

양떼들이 풀밭에 양떼구름이

어떻게 순례하는가를.

* 이 시가 처음 발표되었던, 1986년《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작 수록 원고를 원본으로 했다.

 

당신은 어떤 시를 좋아합니까?

나는 취향을 묻는 말을 좋아한다. 취향 속에는 타자의 응시에 의해 겨냥된 간접적인 내가 있다. 되도록 나의 위치를 숨기고 노출하고 싶은 부분까지만, ‘직접적인 나’는 취향을 통해 세계와 접속한다. 때문에 취향에 주석을 다는 일이란 나를 세계로 유발시키는 가면의 퇴적물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취향은 내게 있어 나르시시즘이다.

‘당신은 어떤 시를 좋아합니까?’ 어떤 시를 좋아하냐고? 이런 말은 성립되기가 힘들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취향’이라는 말이 가진 기의 등가가 ‘시’가 가진 기의 등가보다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취향 속에는 시를 안주시킬 수가 없다. 우리가 욕망해온 것들을 실제로 행할 수 없는 것처럼, 취향이 된 것들과 혹은 누군가에게 삶의 전부가 된 것들이 나라는 주체에 의해 선호라는 ‘조임’으로 붙들어두기에는, 나는 늘 이 문제에 대해 이물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 안에 의심으로 얼룩진, 내 취향의 편린을 여기 꺼내보려고 한다. 다시 묻는다. 당신은 어떤 시를 좋아합니까? ―나는 젊은 시절 박주택의 시를 좋아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박주택의 <꿈의 이동건축>에 수록된 시편들을 더러 다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한 때 나의 취향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 시와 취향에 대한 나의 교란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당신은 어떤 시를 쓰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젊은 시인의 꿈을 엿본다. 그의 꿈속에는 기원을 향해 운동하는 젖은 습기들이 가득하다. “목재를 실어 나르는 화차를 타고” 당도한 곳은 “숲”이다. “목재”의 기원이 되었던 “숲”은 뿌리가 잘린 그것들의 고향이자, 회복의 공간이다. 하지만 시적 주체는 회복을 욕망하지만 유지할 수는 없다.

시1에서 주체는 ‘갈증’을 앓고 있는 상황이며 스스로 “수맥을 짚어 한 모금의/물을 마”셔가며 겨우 그 갈증을 달래고 있다. 그리고 시적 주체가 당도한 이 숲은 “구름이 어둡게 어둡게 밀려오”고 “훠어이 휘어이 바람”에 휩싸여 불안이 깃든 공간이다. 그러나 이 불안은 “어머니처럼 부드럽게/하늘이 내게로 내려와 물을 주시고”라는 사태로 순식간에 일단락된다. 그 후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 바람을 느끼거나 그 “옆모습을 지켜보는” 행위 등으로 시적 주체는 자신을 둘러싼 처지를 응시한다. 그 응시 속에는 ‘세계의 정면’이 아니라 ‘세계의 측면’(“세계는 옆으로 열리고 열린 창문처럼”)을 인지하고 싶은 시적 주체의 의지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측면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을 찾아가기 전에 시1의 이미지의 연쇄과정을 우선 살펴보자.

‘나무-숲-수맥-물’로 연쇄되는 이미지는 나무에 웅크린 수맥과 숲이 품고 있는 대상의 기원을 밝히면서 주체의 갈증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다시 “푸른 잎맥의 바다”와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정황으로 발전된다. 그 과정 안에는 ‘구름-하늘’의 상승하는 대상들과 ‘제비꽃-풀밭-쑥 뿌리’ 등 하강하는 대상들로 상하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것들을 통해 주체는 이미지들의 강한 운동성의 진폭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줄곧 시적 주체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몽유 속에서 갈증과 불안을 타계하고 상승하는 이미지들, 즉 하늘과 구름을 인지하려고 애쓴다.

여기서 중간에 놓이는 것은 “바람”이며, (물론 “목재”가 되어버린 나무 또한 그가 몽유 속으로 들어가는 출구이자 상승의 의지가 꺾인 중간이다.) 그 바람을 온전히 다 인지하기 위해서 주체는 측면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해, 꿈의 세계에 당도한 시적 주체가 환몽과 갈증적 아포리아를 이겨내는 일차적 수단으로 꿈의 경험(오감)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경험 속에는 공간 안에 상승이나 하강된 ‘전체’로 붙박여 있는 것이 아닌, 방랑하는 주체가 온전히 같이 응시할 수 있는 개체인 ‘바람’이 놓여 있다.

시1이 몽유 속 낭만적 낙원이 가진 공간의 그물이었다면, 시2는 그 그물에 걸려있는 시적 주체의 현재적 고통이다. “노을은 동쪽 하늘에 머물러” 있다.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동쪽에 노을을 만들 리가 없다. 그러기에 주체의 감각은 노을을 “뽑힌 노을”로 인지한다. 태양이 뜨는 과정도 없이 이미 노을처럼 늙어버린 조로한 하늘인 것이다. 이 조로의 문제는 “푸른 목숨이 서럽게 느낄 무렵”이라든가, “가슴속 얽혀 있는 내 생애를 점치리라.”, “넓적다리에 진득거리는 절망을 떼어다오.”, “강물은 팽팽한 슬픔을 만드는데”와 같은 감정어로 발화되고 발전되며, 시적 주체의 정서를 폭발시키고 있다.

명확한 정황을 유추하기는 힘들지만 시1에서 구현해놓은 공간 속을 유영해가며, 주체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빠져나가고(“무릎 사이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강물”), 이별해버린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랑 앞에서”) 대상에 대한 생애의 고통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고통은 몽유 속 자연물과의 합일(“쑥 뿌리가 내 겨드랑이 털까지 휘감아 돈다”)을 통해서 조금씩 지연되고 있지만, “창포꽃 잎이 티눈처럼 손바닥에 퍼지고”와 같은 구절이나 “귀에 잡힌 푸른 공기”, “어제처럼 노을 위에 누울 때/까마귀 떼 내 발밑으로 돌아눕고” 등을 살펴보았을 때, 그 몽유 속 자연물마저도 주체에게는 모두 폭력적 대상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주체는 자신의 “흡반으로 길고 먼 바다를” 끊임없이 빨아들여 ‘고통의 지연’이 아닌 ‘고통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면서도 자신의 집(“내 집으로 불러들이는/내 뒤를 밟던 새떼”)으로 ‘예정된 고통’을 불러들일 것을 선언한다. 그 마음가짐 속에서는 동서를 질주해가는 이미 늙은 “생애”가 있고 “노을”이 있으며 우수憂愁를 뚫고 전진해가는 “불꽃”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가슴을 껴안”자마자 회복과 편안이 아닌 “단 하나의 바다”를 갈구하는 욕구와 “생애의 채찍”을 스스로 치는 자성의 행위가 시적 주체에게 뒤엉켜 동반되고 있는 것이다.

시적 주체는 말하고 있다. “나는 집 구조와 가구들을 이동시킨다” 여기서 집은 꿈속에 놓여있는 환상의 집이자, 꿈 바깥에 놓여 있는 실체의 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느 곳의 집이든 주체가 자신의 필생을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과 치유로서 견디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불어오는 ‘주체의 의지’로 타계해 나가겠다는 선언이 이 진술 속에는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견디는 주체의 구체적인 행위는 “가구들을 이동시”키는 공간의 재조합, 즉 내면의 재조립이다. 이것은 꿈의 공간 속에서 ‘빠져나간 강물’에 의해 수동적으로 세계에 놓여 있던 주체가 능동으로 자생할 수 있는 방편으로 ‘이동’이라는 행위 속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다시는 태양을 찾지 않는다./처음으로 약속받은 땅의 일이며/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바뀌지 않은 것이므로”와 같은 구절에 느껴지는 확고한 시적 주체의 태도는 ‘예견된 고통’을 충실히 받아내는 마치 시한부의 언어를 보는 듯하다. 때문에 이 시를 쓴 젊은 시인이 시적 주체를 내세워 말하고자 했던 조로한 세계와 낙원에 대한 욕구와 절망, 그리고 대단원의 인내는 “나를 눈물겹게 껴안아 주리라.”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는 이 언어마저도 온전히 주체의 핍진성이라고 느끼게 할 만큼 내밀하다.

물론 시3의 말미에서 시 중반부까지 유지했던 확고한 시적 정서가 꿈을 깨는 상황 속에서 다소 과장된 표현들로 쉽게 세계와 조우하는 아쉬움을 보이지만, 이것 또한 젊은 시절의 시인이 시적 주체를 통해 남겨 놓은 스스로의 과제가 아닐까. 나는 한 생애를 질주하고 있는 듯한 이 시가 좋다. 젊은 시절 박주택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은 어떤 시를 쓰고 싶습니까?

나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자신이 연마한 표현을 버리는 짓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표현은 음악이 되는 몸부림 속에서 표현을 능가하고 그것을 초과하다. 나는 이런 시를 쓰고 싶다. 시인이 자신의 방언으로 집을 지은, 음악 속에는 유려한 언어의 폭력과 시인이 시인이기에 가능한 언어의 신념이 같이 뒤엉켜 있다. 이것들은 서로를 상쇄하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듯이 휘발되어 시인과 독자의 집에 공기처럼 남아 있다. 우리는 그 공기로 숨을 쉬면서 좋은 시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흡하고 냄새를 맡는 것이다. 즉 같이 있어 주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생애와 고통을 의미화하지 않고 현장화하는 시를 쓰고 싶다. 부끄럽지 않게 나의 과잉을 시로써 성찰하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길 원합니까?

시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과거와 예기 사이’에 비춰지는 잠깐의 ‘긴장’, 혹은 ‘실재’로 나타나는 극도의 ‘상태’이다. 때문에 시인은 최선을 다해 시인이 아닌 상태를 옮기는 작업으로 시인의 상태에 충실해야한다. 그 잠깐의 긴장과 홀림의 상태에서 지극히 날이 선 촉으로 세계와 조우해야한다. 개인적 취향의 세계로는 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누추하다. 나는 박주택의 시를 좋아한다. 내가 인정하기 싫은 누추한 취향이다.

그런 취향을 경외심을 담아 치환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게 반문을 해본다. 그리고 박주택의 시가 현재까지 걸어왔던 편린들을 떠올려보고, 고민해보고, 싸워보고, 배워본다. 그러나 나는 그 답을 건축할 수 있을까? <꿈의 이동건축>부터 근작 <시간의 동공>과 시선집 <감촉>까지. 큰 바람을 함께 지나가 본다. 그리고 “처음인 곳으로 가는 나중의 하늘.”에서 “나는 잠을 깬다.”

시를/에게 행하거나, 창작하거나, 독서하거나, 곁에 있어주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것을 통해 “더 고통 속”으로 침식하고, 더 “훌륭하게 죽는 법”과 더 “훌륭하게 사는 법을 배우”려 했던 한 시인의 자서를 옮기는 것으로, 졸고를 마친다.

 

고통은 삶을 삶답게 만들고 그 고통 속에서 나온 예술은 불명의 이름으로 우리들 앞에 선다.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는 저녁 창가에 아른거린다. 시인은 순백한 영혼을 닦으며 추격해오는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그것을 옮겨 적는다.

―<시간의 동공>, 「자서」 부분

 

박성준

1986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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