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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시깊이읽기/김학현/절망마저 그리울 때-윤동주의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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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시깊이읽기
김학현/절망마저 그리울 때-윤동주의 「서시」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지금도 가방에 시집 한 권을 넣어다니는 이들이 한두 사람쯤은 있을 게다. 시가 무엇이냐는 물음과는 무관하게 시를 읽는 행위는 분명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시집 한 권을 읽었다 해도 시 한 편을 외우는 일은 쉽지 않다. 시를 낭송할 기회도 없겠거니와 부러 외우려 하지도 않는다. 몇몇 시 구절을 외우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시와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소월의 「진달래꽃」과 동주의 「서시」만큼은 암송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늘 궁금했던 것은 왜 하필 한恨과 절망絶望을 외우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시란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이다. 여타의 문학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시는 감정을 담아내는 아니 다루어내는 감정이 곧 주제인 장르이다. 감정이 스스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보면 결국 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 사이에서 빚어지는 감정을 다루게 된다. 즐거움과 기쁨은 물론 슬픔과 분노 등을 시는 담아낸다. 하지만 왜 우리는 한과 슬픔, 절망을 암송하는 몇 편의 시로 기억하게 될까? 글은 이러한 의문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형식적으로만 말한다면, 시 장르는 서술을 극도로 억제하는 대신 음악적 표현방식을 통해 감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김소월과 윤동주 시의 음악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만나본 적은 없다. 시에서 음악적 장치를 따로 설명하는 일은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것이고, 또 그것이 낭송되는 순간엔 따로 다루지 않아도 되는 문제가 되지만 서술이 억제되었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컨대, 시는 시인이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스스로 억제하여, 남겨 놓은 것이니 시를 읽는다는 것은 표현된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닌 생략된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이다.
1941년 11월 20일 쓰인 「서시」는 25세 젊은이의 절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절망. 왜 우린 한 젊은이의 절망을 기억하고 그의 절망의 표현을 암송하는 것일까. 그의 절망은 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일까. 절망絶望이란 말 그대로 희망이 잘려나가 조금의 바람도 허용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시가 쓰인 1941년은 왜정시대였으니 절망을 느끼는 일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는지도 모르겠다. 왜정시대의 절망과 해방의 기쁨, 6.25의 슬픔과 독재의 좌절, 민주화의 환희, 군정의 환멸은 너무도 당연한 시대적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연한 듯 보이는 젊은이의 절망은 7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노래된다. 아마도 더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뜬금없지만, 우리는 몇 살부터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대여섯 살 정도부터는 기억하지 않을까. 필자의 경우엔 파편적 기억을 넘어서는 때가 열 살은 되어서이다. 열 살 이전의 기억이란 자신의 것인지, 들은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1945년 광복을 맞은 이들 중 그들이 되찾은 조선을 기억하고 있었던 이들은 최소한 190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광복하던 해 마흔을 넘지 못한 이들은 그들의 기억 속에 자신들이 살고 있던 나라가 한 순간도 조선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의 기억 속엔 단 한순간도 이 나라가 조선이었던 적도 자신이 조선인이었던 적도 없다.
80년대 유년기를 보냈던 필자에게 박정희 정권의 말기 무렵과 이후 군사정권 시기는 좌절과 환희가 교차되던 시절이 아니라 온전히 유복했던, 때론 늘 그리운 때로만 기억된다. 30년대 말 경성은 27년 미스코시 백화점이 개장하였으며, 거리엔 값비싼 옷을 걸친 이들이 활보했던 시절이었다. 영국으로 들어가는 양복감이 마카오로부터 경성에 직접 수입되었으며, 미국에서 상영되던 영화는 채 한 달도 못되어 경성 극장에 걸리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혼마치 거리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활개 치는 경성은 식민지의 도시가 아닌 동경과 같은 메트로폴리탄의 문화가 넘실되던 곳이었다.
1938년 12월 <조선문학독본>에 실린 이효석의 잘 알려진 수필 「낙엽을 태우며」를 보면 시인이 거닐었던 서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 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 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효석 「낙엽을 태우며」 일부
백화점에서 커피를 갈아 원두를 마시는 일은 지금에도 그리 쉽지 않은 취미일 것이다. 겨울 휴가계획을 세우는 이효석의 말년의 모습 속에서 얼마큼의 절망과 우리와의 차이점을 찾아낼 수 있을까.
2.
시를 읽는 것은 전술했듯 문면을 보는 것과 이면을 보는 방법이 있다. 문면을 보는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부분이며, 이면을 해석하기 위한 전제와 틀이 되기 때문에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시인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생산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시는 2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연은 8행으로 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2연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시는 1연에서는 매우 격정적이 피치와 빠르기로 흐르다가 2연에 이르면 느리고 약하게 끝을 맺는다.
문면으로만 본다면, 시적화자는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희구하고 있다. 화자에게 부끄러움이란 다음 행에서 이어지는 바람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괴로움의 이유야 천차만별이겠지만, 시에서 괴로움은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잎새에 이는 바람’은 시적화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된다. 보조사 ‘~에도’를 사용하고 있으니, 자신의 부끄러움이 ‘잎새에 부는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 ‘한 점 부끄러움’이 ‘잎새에 부는 바람’일 것이다.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은 스스로는 느낄 수 없지만 잎새를 흔들고 있는 바람을 본 것만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바람이 불어 잎새를 흔든다. 나무를 흔들고, 사람을 흔들고 온 세상을 흔든다. 바람이란 부는 것이고 따라서 세상은 흔들릴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시적화자의 부끄러움은 결코 바람이 부는 것에 있지 않다. 시적화자는 바람이 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바람에 의해 잎새가 흔들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도대체 잎새가 무엇이기에 시인은 그것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다음 행에서 사라진다.
‘앞새’는 ‘모든 죽어가는 것’ 중 하나인 것이다. 자신이 사랑해야한다고 믿었던 모든 죽어가는 것들 중 자신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약한 바람에도 속절없이 흔들리는 여린 ‘잎새’를 보며 시적화자는 부끄러워 차마 부끄러워 말을 잇지 못한다. 별을 노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문면으로는 알 수 없지만, 화자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잎새’를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한다. ‘바람’에 의해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한다는 화자의 다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 이전의 문제이다. 화자가 걸어가야 하는, 허락된 길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앞선 사랑의 다짐은 그 길을 가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일 것만은 분명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기 이전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죽어가는 것’에 대한 화자의 애정은 부끄러움이 결코 자신의 길에 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한 화자의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자신에게 허락된 자신의 일을 하기 전에, 결코 그 일이 부끄러운 길이 되지 않기 위해, 화자는 바람에 의해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겠노라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다짐하는 그 순간마저 바람은 불고, 잎새는 물론 사람과 세상 심지어 별마저 바람에 스쳐 죽어가고 있음을 화자는 알고 있다.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쉼 없는 바람과 그로 인한 죽음에 대해 화자는 마지막 순간엔 끝내 절망에 이르고 만다.
문면을 넘어서는 문제는 시인의 다른 시와 삶의 행적을 통하거나 시어의 상징성과 시대를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문면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말하는 의미와 ‘부끄러움’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의 다른 시 「별 헤는 밤」은 별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에게 별의 의미를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시인에게 별은 추억과 사랑, 쓸쓸함과 동경과 같은 감정인 동시에 자신이 알고 있는 아름다운 말이며.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이며, 세상의 모든 사물의 이름이다. 시인에게 별은 비록 멀리 존재하는 것이지만 선명하게 빛나는 자신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현실과 멀리 떨어진 채로 보관하고 있는 그 많은 것들마저 죽어가는 오늘 밤, 시인은 그것마저 허락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스스로 막을 새조차 없이 흔들려버리는 잎새를 보며 온전히,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히로누마 도오슈平沼東柱로 개명하고 일본으로 떠났다는 사실로 비추어보면, 윤동주에게 별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우리말로 된 모든 개념어 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언어로 인식된 세계인, 별마저 바람에 위협받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의지로도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고 그것을 온전히 우리에게 들려준다. 정말이지 유약한 20대의 모습 그대로이다. 젊은이가 외치는 절망은 그가 젊다는 이유만으로도 폄하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절망은 그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렇다. 우리 역사에서 지금만큼 부유하고 화려하며, 평화로웠던 시기는 없었다. 우리가 애써 주윌 둘러보지 않는다면, 어떠한 불행하고 불유쾌한 단어도 그저 상대적 개념일 뿐, ‘잎새에 이는 바람’처럼 우리가 결코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의 대기업이 세계 1등 기업이 되었고 국가의 브랜드 가치가 비할 데 없이 높이 올랐으며, 국민을 위해 위정자들은 잠도 이루지 못한다고 쑥스러운 고백을 하고 있다.
필자에게 70년대란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때이고, 80년대엔 첫사랑의 기억이 가슴 뛰는 시절이다. 90년대 역시 밀레니엄의 공포를 만끽했던 청춘의 날이다. 그러나 100년 전에도, 내가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던 어떤 순간에도 사람들은 죽어갔으며, 또 바람에 흔들려 상처받으며, 그렇게 쓰러져 갔다. 오늘 이 순간, 1930년대 화려한 메트로폴리탄 경성 거리 한켠에서 가슴 아프도록 절망했던 젊은이의 피토하는 노래가, 그의 섬세할 정도로 여렸던 마음이 우리가 놓쳐버린 세상의 변치 않는 아픔을, 그에 대한 사랑과 좌절을 기억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게 될 2012년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기억이 무엇이 되었든, 분명 오늘 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울 것이다. 그것이 그의 시를 암송하는, 아니 암송해야하는 이유인 것이다.
김학현
성균관대학교 문학박사. 김승옥소설연구. 분단체제문학연구. 박상륭 소설연구. 명지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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