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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계간평/양경언/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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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937회 작성일 12-11-0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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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계간평/양경언/넘어선다

 

 

∙신혜정, 「베를린 詩人의 時․5-성탄전야」(≪리토피아≫ 2011년 겨울)

∙이제니 「어둠과 함께」(≪리토피아≫ 2011년 겨울)

∙송승언, 「많은 손들을 잡고」(≪문학동네≫ 2011년 겨울)

∙주원익, 「검은돌」(≪현대시≫ 2012년 1월)

∙이가을, 「죽은 말들의 사회」(≪현대시≫ 2012년 1월)

∙이기철, 「무엇을 말하려 시를 쓰나」(≪시와사상≫ 2011년 겨울)

 

 

1.

자신을 구획하는 경계를 넘어설 때 새로운 관계와 사건들이 생성한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 글의 독자가 망설임 없이 ‘내겐 2011년이 그랬다’고 답했으면 좋겠다. 아마 그렇다면 당신은 ‘희망버스’를 타고, 자신이 사는 곳의 울타리를 넘어서 멀리 홀홀히 서 있던 크레인에게 다가갔던 경험을 했을 수 있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리트윗Retweet 방식을 통해 물리적인 거리감을 넘어서 강정 소식을, 쌍용자동차 투쟁 소식 등을 다른 이들에게 황급히 알리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권력자의 억압은 광포해지는 가운데, 그를 넘어서고자 하는 움직임에 가담하는 사람들의 힘도 끈질기게 분출되었던 2011년이었다. 사이, 가진 자가 구획한 경계를 넘어섰다는 이유로 시인이 수감되기도 했고, 가진 자가 전하는 언어를 조롱하고,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진가가 붙들려가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를 허락지 않는 곳에서 감히 자유를 ‘꿈꾸다니’, 권력자들의 심기가 불편 했을 만도 했겠다. 그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창궐하게 두었던 것은 종합편성채널을 통한 자신들을 대변하는 입들이었지, 그들이 제한한 언어 바깥으로 마음껏 넘어가라는 게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좀 더 첨예하게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을 구획하는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는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경험을 실질적으로 감행했는가? 기대할 수 있는 답변을 우리는 시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지금 세계의 상징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그것들과 대면할 줄 아는 치열한 몸짓 속에서 시는, 일상과 다른 질서를 내장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개시開始한다. 시적 언어들은 때문에 태생적으로 가진 자들이 구획한 경계의 분할 지점을 노려보며, 경계를 재배치하거나 경계 바깥에 놓인 무한의 세계를 항해할 줄 안다. 시인의 쓰는 행위가 더욱 날카롭게 현상을 꿰뚫고, 현실 이면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데에 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

 

이만큼,

세상을 뒤흔든 스펙터클은 없었다

예수의 강림

교회의 정교한 벽화 장식 속

예수는 슬픈 표정이다

왜 그는 웃지 않는가

왜 권세 뒤에 숨어 침묵하는가

베를린 소망교회의 성탄축하 칸타타 공연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향연

멀리! 반도 땅에서 유학 온 뮤지션들이 이국의 메시아를 찬양한다

동방박사 이후

이런 스펙터클은 처음이다

구세주를 위해 춤추고 노래하는 밤, 베를린의 한국

나는 최후의 예수의 마음으로 목이 말랐다

그가 강림했다면

함께 술 한 잔 하고 싶었다.

―신혜정, 「베를린 詩人의 時․5-성탄전야」 전문(≪리토피아≫ 2011년 겨울)

 

 

엄숙주의에 도취된 종교가 성탄전야라며 화려한 풍악을 울리는 상황 자체가, 시인의 눈에는 타락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수는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지 오래다. 하지만 종교의 태생이 이러한 영광만을 위한 것이라면 어쩌겠는가. 화자의 시선은 종교의 이면에까지 그 눈길을 주는데, 이 때 ‘예수’의 ‘슬픈 표정’은 이 땅의 가난한 자들, 없는 자들을 위한 슬픔이기보다는 합창단의 향연과 뮤지션들의 찬양을 달갑게 받기 위해 준비한 표정으로 비춰진다. 예수는 ‘왜 권세 뒤에 숨어 침묵하는가’. ‘예수’, ‘교회’, ‘종교’라는 이 경건한 상징들과 대면할 때, 시인은 구세주를 위해 춤추고 노래하는 성탄전야의 스펙터클이 흔드는 세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됐을 것이다.

위 시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지점은 14행부터다. 화자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갈증을 호소하며 이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만한 대안으로 최후의 예수와 나누는 술 한잔을 권한다. 저 교회의 화려한 밤을 뒤로하고 사람들의 곁에서 예수여, 당신이 기꺼이 술 한 잔을 나누려할 때, 허황한 스펙터클은 깨지고 가진 것 없는 삶들의 이야기들이 우선하여 펼쳐지리니. 시인의 도발적인 시선은 결국 상징체계를 넘어설 때 가능한 것이다. 이를 따르면 사람들을 명명백백 밝혀주는 빛의 시간은 의심의 대상이 되고, 근대 이후 최고의 감각으로 여겨지던 시각 또한 그 권좌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피하던 ‘어둠’ 은 사실 얼마나 다채로운 입체성을 보유하고 있었던가. ‘보는’ 행위만을 우선시하던 우리들이 보유하고 있는 또 다른 감각기관은 기실 얼마나 다양한가.

 

 

눈을 감는다. 무언가 보기 위해. 무언가 듣기 위해.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색깔들.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들판들.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너는 어둠과 한 몸으로 나타난다. 어느 겨울 하늘을 흐르던 길고 긴 비행운 같은 것. 이름 모를 수풀 속 키 큰 나무들을 흔들던 머나먼 종소리 같은 것.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같은 것. 속도에 몸을 맡긴 채 체념하듯 앉아 있던 어두운 기차간 같은 것.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눈을 뜨면 그날의 양 떼들도 다 사라지겠지. 녹색 들판에서 하름하름 풀을 뜯어 먹던. 한가로이 울면서 구름 곁으로 번지던. 어둠은 증식한다. 어둠은 증발한다. 다가오면서 멀어지는 꿈. 멀어지면서 나아가는 꿈.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너는 길게 길게 수평선을 늘린다. 몸을 떠난 바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잃어버린 언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나는 내 눈 속의 어둠과 함께 간다. 너의 어둠과 함께.

― 이제니 「어둠과 함께」 전문(≪리토피아≫ 2011년 겨울)

 

 

시인이 제안한 행동은 ‘눈을 감는’ 행위다. ‘무언가’ 더 잘 ‘보기 위해’, ‘무언가’ 더 잘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잠든 밤에 조용히 사물들에 귀를 대본 사람은 안다, 제자리에 앉아 있긴 하지만 그 사물들은 분명 밝은 빛을 받을 때의 낮과는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은 어둠의 입체성 속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타자는 입체적인 어둠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은 한세정의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눈을 감고 무릎을 꿇을 때/어둠 속에서 명징해지는/얼굴의 능선들/몸을 감싸는 어둠의 따스함/어둠의 참혹함’-한세정 「어둠과 어둠」 부분, ≪리토피아≫ 2011 겨울) ‘어둠 속에서’, ‘어둠과 한 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암흑은 곧 모든 것을 감각할 수 있는 어둠의 다른 이름이다. ‘어둠은 증식하’고, ‘증발하는’ 성장과 순환의 과정 속에서 ‘나’와 ‘너’를 뒤섞게 하는 매개로 작동한다.

 

 

몸을 잃어가며 장작이 빛난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거실의 음악은 언제까지 계속되는지 이곳에는 질문도 없고 답도 없다

간밤에 잃어버린 회문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눈이 내렸으며 믿음은 새로웠다 골목은 안으로 굽어 바람을 가두며,

눈과 눈과 겹치고 있다 첫눈이 겹칠 때는 눈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밤이 밤을 넘어서 지붕을 덮고 있고 눈은 밤을 덮고 있다 덮이는 건 없다해도 좋았지만

악사들은 수백 년째 쉬지도 않고 밴조와 피들 따위를 연주중이다 밤이 계속되니까 이제 우리는 연주의 슬픔도 지겨움도 다 잊고 이 음악에 고립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눈은 왜 자력을 얻나 이곳에서 우리는 몇백명쯤 되는 것이지, 저벅이는 소리 들리지만 괜찮다 아무런 답도 없다

그림자 한덩어리가 어둠의 외곽으로 뻗어나갔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고 그것을 내밀었다 겹치는 그것들 너무 많은데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게 이상하다 눈이 자꾸 겹치는데 손등에 진 그늘의 열기는 식으려 하지않는다 몸을 잃어가며,

거실은 무너지고 우리는 이 손들을 절대로 놓지 않을것이며 밤이 오고 밤이 쌓이면 한밤을 함께 넘어서

―송승언, 「많은 손들을 잡고」 전문(≪문학동네≫ 2011년 겨울)

 

 

시인이 표현한 바 그대로, ‘어둠 속에서’ 우리의 눈은 오히려 ‘자력을 얻는’다. 바꾸어 말하면 어둠이 이 세계에 암약할 때 그 어둠 때문에 깨어나는 수많은 감각들, 살flesh들이 있다는 것이 될 테다. 송승언의 시에서 느껴지는 어둠 속 움직임들은 그래서 고요하면서도 민첩하다. 그 움직임들이 서서히 ‘한 덩어리’가 되어 어둠의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은, 기존의 상징이 기입된 우리의 ‘몸’이 사라지는 자리에 어둠이 스미면서 종래에는 ‘그늘’에 열기가 불어넣어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밤이 계속되니까’ 슬픔도 지겨움도 다 잊고 연주되는 음악은, 어느새 ‘우리’의 손을 겹겹으로 포개지는 형상을 만드는 데에 일조한다. 많은 손들이 잡은 어둠은 그래서 ‘저벅이는 소리 들리지만 괜찮다.’

 

 

2.

앞서 언급한 시에서 ‘손들을 절대로 놓지 않는’ 그 모습의 여운이 계속된다면, 이처럼 상징을 넘어서는 힘들이 어디서 만들어지는지 좀 더 정치하게 말하는 시를 보도록 하자.

 

 

나는 그것이라고 말해졌다

그것의 처음 잿더미를 삼킨 바람,

빛을 버리지 않는 달의 연인이라고 말해졌다

태양이 식을 때까지 그것의 눈먼 불꽃이라고

말해졌다

달빛 가득 고인 진흙항아리, 망자들의 언덕에서

나는 그것의 부스러진 이름이라고

말해졌다 그을음을 뒤집어쓴 모음들

검은 얼룩이 말한다

선홍빛 장미의 성채를 휘감아 오르는 공기의 속삭임으로

모든 세계는 말하여졌다

쇠사슬을 끌고 별들의 시궁창으로 쏟아지는 그림자,

눈물 먹은 돌들이 말해졌다

그것의 빛이 태양을 삼키는 암흑의 사랑이라고

말해졌다

검은 얼룩이 말하여졌다

―주원익, 「검은돌」 전문(≪현대시≫ 2012년 1월 )

 

 

‘태양이 식을 때까지 눈먼 불꽃’, ‘달빛 가득 고인 진흙항아리’, ‘망자들의 언덕’, ‘그을음을 뒤집어쓴 모음들’, ‘검은 얼룩’이 눈길을 끈다. 이들로부터 ‘모든 세계는 말하여졌다’고 한다. 시는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주창하므로, 어둡고, 차고, 얼룩진 그 ‘부스러진 이름’들이 빛만을 추종하던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질서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1행에서는 ‘그것’ 과 같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도 모르겠는 불투명한 대명사로 등장했던 이 힘들은 ‘그것의 빛이 태양을 삼키는 암흑의 사랑’으로 ‘검은 얼룩’을 통해서 ‘말하여지고’ 있다. 때문에 ‘쇠사슬을 끌고 별들의 시궁창으로 쏟아지는 그림자’, ‘눈물 먹은 돌들’이 ‘말하는’ 이 상황은 사물들의 말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능한 시적 상황으로의 도약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의 현시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 편, ‘그것’이라고 ‘말해진’ 것은 ‘나는’ 으로 운을 뗀 시적화자의 언급에 의하여 묘하게 ‘검은 돌’ 그 자체가 입을 연 상황으로 시적 장면을 이해하게 만드는 데, 이 같은 이해가 「검은 돌」의 해석을 다중적으로 확장하도록 돕는다. ‘내’가 ‘검은 돌’ 이고, 나는 겨우 ‘그것’이라고 말해져왔지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달빛 가득 고인 진흙항아리’, ‘망자들의 언덕’, ‘그을음을 뒤집어쓴 모음들’ (이 표현은 어쩐지 불길 속에서 으으으, 하고 괴로움을 토로하며 우는, 사람 본연의 울음소리를 연상케 한다) 을 통해 유추해보면, ‘나’라는 ‘검은 돌’은 몇 년 전 용산에서 있었던 참사 당시에 잉태된 조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때, 어둠은 가진 자들에 의해 지배된 상징이겠지만 그 어둠을 구성하고 동시에 상징을 몸소 실행해야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세계를 말할 수 있는 단서’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시를 독해한다면, 검은 얼룩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그 지점은 가진 자들이 구획한 경계의 분할 지점을 노려보며 경계를 재배치하거나 경계 바깥에 놓인 무한의 세계를 항해할 줄 아는 시인들의 몸짓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겠다. 그 세계는 이미 ‘말하여졌다.’ 시에서는 이미 기존의 상징을 넘어서려는 말들의 몸짓이 한창이다. 때로 그 같은 상황은 비유와 지시의 착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격렬한 불법집회가 진정되었다

간신히 불꽃재를 벗은 늙고 허름한 문장 하나가 빠져나갔다

진의를 알 수 없는 말들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다

창자를 뒤트는 검은 울음이 뒤따라 나갔다

장내를 둘러싼 소음을 재우더니

붉은 띠를 두른 문장이 들어선다

숨죽인 고요가 헛기침을 풀어내고

골목 끝 죽은 말들에 비문과 오류가 쌓여있다

행간을 지키던 뼈있는 문장들은 삭았고

형체를 알 수 없다

헛발질하는 돌들이 삿대질하였다

진부한 말들이 목줄을 메고 나가는 광장

값싼 알몸을 보이고 등 돌아 섰다

은빛 칠갑을 두른 칼에 싹둑싹둑 허공이 베여나가고

탄생의 거리엔 뇌가 죽었다 살아온 신경들의

기념 행군이 있다

뇌경색을 보이는 말들 피가 굳어

응고된 문장의 자식들을 품고 있다

웅크린 태아들이 자궁을 열고 나와

골목 끝으로 사라져간다

피가 굳은 말 속엔

꽃의 씨앗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가을, 「죽은 말들의 사회」 전문(≪현대시≫ 2012년 1월 )

 

 

두 개의 장면이 겹으로 의미를 거느리는 구성의 시다. 황폐해진 집회 현장과 투쟁을 그치고 치열함을 소진한 글쓰기 현장이 그 두 장면을 일컫는다. 이들은 묘하게 닮았다. ‘불꽃재를 벗은 늙고 허름한 문장 하나’,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진의를 알 수 없는 말들’, ‘붉은 띠를 두른 문장’, ‘골목 끝 죽은 말들’, ‘행간을 지키던 뼈있는 문장들’ 과 같은 시구에서 ‘문장’, ‘말’ 이 있는 자리에 ‘사람’ 이라는 말을 들여놓아도 의미가 상통할 것이다. 집회현장에서 섣불리 한 발 물러설 때, 기존의 상징체계에 쉽게 타협을 하는 글쓰기를 진행하게 될 때, ‘헛발질 하는 돌들이 삿대질’ 하는 집회 현장과 ‘진부한 말들’이 낭자한 글쓰기 현장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쓰기 행위와 집회 현장이 서로를 은유화하며 종래에는 무엇이 원관념이고 보조관념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비유의 착종 상태는 말과 말이 서로를 넘나들면서 실질적인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말들이 비유를 넘나들면서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상황이 ‘피가 굳은 말 속에 꽃의 씨앗이 나타나기도 하였다’는 시구를 통해 궂은 상황 속에서도 생명력을 품고 있는 시들에 대해 옹호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시는 일상과 다른 질서를 내장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개시開始하는 일에 대한 기대를 건네주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 상징과의 치열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 투쟁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자못 비장하게 시인이 ‘나는 무엇을 말하려 시를 쓰는가’ 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애틋한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 바람 어제의 바람 아니듯이

나는 오늘 새로 태어난 말을 맞고 싶다

새 날아간 나뭇가지 오래 흔들리듯

시 다녀간 마음자락 오래 흔들린다

내 오래 딛고 온 글월의 들판에 오늘 무슨 꽃 이우는가

햇빛 물고 날아간 새의 부리는 빛났던가

물어도 대답 않는 언어로, 숯의 문장으로

나는 무엇을 말하려 시를 쓰나

동서고금, 그 많은 글발들이 남기고 간 행간에서

금욕주의 황제처럼 옥좌가 형극이라 말하면서

누구의 발자국소리에 귀 기울여 한 행 시를 얻으러

말의 거지가 되어 온 세월

시 위에 군림하는 삶을 끌어내려

삶 위에 온존하는 시를 쓰려했다

…(중략)…

환희의 초대가 아니라 고통의 언어로 썼다

눈무신 사전을 진흙에 묻고 어둠에 묻힌 싸라기 말을 주우려

연필의 곡괭이로 언어를 채광했다

감동 없는 시는 위작이라고 나는 심혼에 압정을 박았다

고통이 보석이 되지 않는 말에 나는 시의 옷을 입힐 수 없다

꺼져가는 삶에 불붙일 언어는 어디에 잠자는가

나는 구중 광부의 釘을 빌어 단 한 줄의 시를 쓰고 싶다

마침내 언어가 죽으면 문장을 닫을지라도

―이기철, 「무엇을 말하려 시를 쓰나」 부분(≪시와사상≫ 2011년 겨울)

 

 

마침내 시인의 언어가 죽고, 문장이 닫히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환희의 초대가 아니라 고통의 언어로 써나간 시는 삶 위에 온존할 것이다. 꺼져가는 삶에 불붙일 언어로 자리할 것이다.

 

 

3.

2011년의 막바지에 만들어진 겨울의 책들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시편들 속에서 유난히 기존의 체계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읽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2012년으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시가 가능한 시들의 몸짓이 치열하게, 그 ‘넘어서는’ 움직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감행할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그러니, ‘넘어선다’는 동사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권력의 미사여구들을 뛰어넘은 자유를 기꺼이 획득하려는 말임을.<?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

 

양경언∙1985년 제주 출생.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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