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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서평/고인환/‘저항’과 ‘서정’, 혹은 체제와 이념의 장벽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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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075회 작성일 12-11-0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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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서평/고인환/

‘저항’과 ‘서정’, 혹은 체제와 이념의 장벽을 넘어-하종오의 <남북상징어사전>

 

 

 

1. ‘저항시’와 ‘서정시’ 사이

<남북상징어사전>에는 하종오 시인이 2000년대 이후 끈질기게 탐색해온 주변부 인민들의 삶이 다채로운 무늬로 음각되어 있다. “들은 그대로 본 그대로/수식어나 수사를 떼어내고” “시를 쓰는” 특유의 “사실주의적 상상력”이 “분단 현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남북 주민과 세계 시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시인은 “남북 주민과 세계 시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고 있다. 수많은 “하종오 씨”들이 한 편의 시 속에 자신들의 삶을 녹여낸다. 나와 그들 혹은 우리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하종오 씨”들의 시선으로 심문하고 있는 형국이다. “하종오 씨”들의 목소리는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의 영역을 넘나들며 ‘지금 여기’의 삶을 응시하고 있다. 그들이면서 그들이 아니고, 시인이자 시인이 아닌 이 ‘우리/그들’의 시선, 즉 “하종오 씨”들의 목소리는 분단 현실을 낯설게 일깨우는 모닝콜이다. ‘온전한 나’일 수도, 그렇다고 완전한 ‘타자’일 수도 없는, 그들의 삶에 공감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 “하종오 씨”들의 시선에서 우리의 분단 시는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우리 시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하종오 판 서정의 한 풍경을 음미해 보자.

 

 

대다수 남한 시인들은 저항시의 시효가 끝나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시대라서

쓰는 족족 서정시가 된다고 한다

하, 나에게는 그런 내면이 없다

가까운 남한 국민들과 같은 말소리를 하는

먼 북한 인민들에게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웃음기보다는 울음기가 더 많이 들어 있어

이명인지 환청인지 의문하는 동안

나는 대다수 남한 시인들이 쓰는 서정시를 쓸 수가 없다

하, 나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다

들은 그대로 본 그대로

수식어와 수사를 떼어내고

나는 시를 쓰는데

저항시도 되지 않고

서정시도 되지 않는다

저항도 없고 서정도 없는 시를 쓰는

북한 시인들을 이해하기도 하면서 이해 못하기도 하면서

나는 쓰고 있지만

하, 나의 시를 무슨 시라고 해야 할까

―「저항시의 시효가 끝나고, 서정시의 시효가 끝나고,」 전문

 

 

많은 “남한 시인들”이 “저항시의 시효가 끝나고” “서정시”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했다. 하종오 시인은 “나에게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그런 내면”이 없다고 고백한다. 여기에는 “저항시” 혹은 “서정시”를 어떻게 해체·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하종오 시인은 동시대 우리 시단의 주도적 흐름, 즉 내면지향적 성향 혹은 미학주의적 편향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분단 체제로 인한 고통은 여전하다. “북한 인민들”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여전한데 어찌 “대다수 남한 시인들이 쓰는 서정시”를 쓸 수가 있겠는가. 폐쇄된 내면의 영역에 갇혀 좀처럼 ‘타자/세계’와의 소통의 길을 내지 않으려는 작금의 “서정시”를 보며 시인은 자신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다고 탄식한다. 하여, “저항시의 시효가 끝나고, 서정시의 시효가 끝”났다는 시인의 진술을 문맥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새로운 관계 모색에 바탕한 우리 시의 갱신을 역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시적 자아와 대상(민중, 세계)을 동일시하는데 안주한 기존의 ‘저항시/서정시’를 갱신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여, 그의 시는 “저항시도 되지 않고/서정시도 되지 않는다.” 이 ‘저항시’와 ‘서정시’ 사이에서 새로운 시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하종오 시인이 던지는 화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항시/서정시’를 해체·재구성할 지가 관건일 터이다. ‘타자들’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공명共鳴하는 수많은 “하종오 씨”들의 ‘속울음’이 그 시도의 하나이다. 시인이 불러온 “하종오 씨”들의 목소리는, 타자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내면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렇듯 하종오 시인은 <남북상징어사전>을 통해 분단 현실과 관련된 타자들의 삶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냉혹함은 물론, 그들에 대한 지나친 감정 몰입으로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태도 또한 경계하고 있다. 이 둘의 태도를 창조적으로 지양止揚하는 과정에서 온전한 “저항시” 혹은 “서정시”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상징어사전>은 타자들의 삶을 내면화하는 그 지난한 여정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의미 있는 시도의 하나이다.

 

 

2. 분단의 장벽에 스며드는 소박한 일상의 꿈

현실의 행복한 삶을 위협하는 근원적 요소를 탐색하고 고통스럽지만 그 조건들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작업은 문학의 본질적 기능이다. 분단 체제는 강고하고 이로 인한 고통 또한 여전하다. 이에 맞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종오 시인은 정공법을 택한다. 순박하고 진솔한 서정이 그것이다. 문단의 일부에서는 진부한 주제를 산문적 어조로 진술함으로써 시적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시편들이 우리의 내면을 불편하게 들쑤시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시가 불편하다는 사실은 대다수의 남한 시민들이 분단의 고통을 짐짓 외면하며 살아왔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예컨대, 남한의 시인들은 “저항도 없고 서정도 없는” 북한의 시편들에 한 번이라도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 적이 있는가? 하종오 시인은 이러한 북한 시인들을 “이해하기도 하면서 이해 못하기도 하면서” 시를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항시”도 “서정시”도 되지 못하는 자신의 시를 이들의 시들과 포개놓으며 심문한다. “이해하기도 하면서 이해 못하기도 하면서” 시를 쓴다는 이 진솔한 감정 속에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남과 북은 서로를 적대시하는 한편 그만큼 그리워하며 살아왔다. 애증의 감정은 서로에 대한 깊을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했는가?

 

 

다 같이 사내아이로 남자아이로 태어났던

동갑내기 하종오 씨들은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다른 꿈을 꾸며 살아낸 줄 모른 채

―「동갑내기 하종오 씨들」 부분

 

 

“각각 다른 꿈을 꾸며 살아낸”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삶이 아닌가. 남과 북의 “하종오 씨”들이 각기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체제와 이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남북의 인민들이 “다른 꿈”을 꾸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죽어간다는 진술은 차원이 다르다. 하종오 시인은 개개인들의 꿈이 각 체제의 이념에 묻혀 표출될 수 없었다는 사실, 그래서 그 소중한 꿈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품었던 ‘그들’에 대한 애증은 진솔한 감정이 아니었다. 체제의 이념을 기준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기에 분단 현실의 장벽은 그만큼 두터웠다.

 

 

광고기획자 하종오 씨는 북한에 가볼 수 없어

언제나 남한의 기준으로 구상해볼 뿐이다

산기슭이나 벌판에서 산야초 뜯어 먹는 북한 인민들에게

야외 광고판이 먹히겠다고 판단하는 것이

난센스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염려하면서도

남한에서 가능했으니 북한에서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광고기획자 하종오 씨의 구상」 부분

 

 

“광고기획자 하종오 씨”가 생각하는 “남한의 기준”에는 분단 체제를 살아가는 개별 존재의 꿈이 투영되어 있지 않다. “난센스일지도 모른다”는 개인적 “염려”는 “남한의 기준”이라는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압도당하고 만다. 때문에 북한의 실상은 늘 “상상하기가 불가능”한 “최악의 상태”이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가본 적 전혀 없는 하종오 씨는

증언을 들을 때마다

최악의 상태를 상상하기가 불가능하다

―「상상력 없는 하종오 씨의 상상」 부분

 

 

남한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남한 국민과 북한 인민이 통일을 위해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고유한 인간적 권리를 남북의 권력(자들)으로부터 확보하는 정서”에 그의 시가 “스며들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남북의 권력(자들)”은 ‘보고 싶은 것’(체제의 이념)만 보아 왔다. 이제 “보기 싫었던 것들”(개별 존재로서의 꿈)의 만남, 즉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소통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꽃봉오리와 사람이란 각 낱말의 상징을

우리가 각각 다르게 해석해서 쓰던 그날부터

둘 중 하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낱말을 버려야

한곳에서 같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남북상징어사전」 부분

 

 

“한곳에서 같이” 살기 위해서는 남북의 언중言衆들이 대화와 소통을 통해 “각각 다르게 해석해서 쓰던” “각 낱말의 상징”들을 하나로 수렴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남한 국민들과 북한 인민들”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 덕 보는 사람들도 있고 피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만나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하종오 씨가 아무리 좋아하거나 싫어해도

남한 국민들과 북한 인민들이 실컷 만나도록 놔두면

서로 간에 덕 보고 싶은 사람들은 만날 수도 있고

서로 간에 피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안 만날 수도 있다

―「하종오 씨도 덕 보거나 피 본다」 부분

 

 

그렇다면 만나는 쪽과 그렇지 않는 쪽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일까?

 

 

전쟁의 시작과 끝은

순전히 남한 정권과 북한 정권에 달려 있고

그 어느 것도 남한 주민과 북한 주민이 택할 수 없다는 걸

탈북자와 한국인은 너무나 잘 알아서

피차 상대에게 화풀이한 게 아니었을까

―「정전停戰」 부분

 

 

분단체제로 인한 남북한 인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형상화하고, “남북의 권력(자들)”으로 포섭되지 않는 이들의 낮은 목소리를 복원하는 하종오의 서정이 문제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시인은 ‘보고 싶은 것’에 짓눌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개인들의 소중한 꿈(보기 싫은 것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꿈은 남과 북, 나아가 세계 어디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다.

 

 

남편 고 씨는 잠 깨고 나서도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며

아내 박 씨가 부엌에서 토드락거리는 도마 소리 듣는다

무채 써는가 마늘 다지는가

시장기 느껴진다

군침 돈다

남한이 이런 곳인가

북한에서 탈출하기 수년 전부터

아내 박씨는 부엌에서 토드락거리는 도마 소리 내지 못했다

국 끓일 나물이 없었다

나물 무칠 양념이 없었다

아내는 남한에 정착하면 반찬 많이 해 밥 실컷 먹고 싶다더니

북한에선 맛도 보지 못한 요리 날마다 끼니마다 해댄다

남편 고 씨는 마른침 삼키며 토드락거리는 도마 소리 듣는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위해 아버지는 어머니 위해

숫돌에 식칼 갈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위해 어머니는 아버지 위해

무채 썰고 마늘 다졌지만

북한에선 아침 일찍 협동농장에 밭 매러 갈 준비하느라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이불 속에서 도마 소리 듣진 못했을 것이다

남편 고 씨가 아내 박 씨를 위해

숫돌에 식칼 갈려고 이불 속에서 나오자

아내 박 씨가 부엌에서 토드락거리는 도마 소리 멈춘다

―「도마 소리」 전문

 

 

인용시에 드러난 한 탈북 부부의 소박한 일상의 꿈(행복)을 그 어떤 체제와 이념의 규범이 재단할 수 있겠는가?

 

고인환∙2001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등단, 제7회 젊은평론가상 수상,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 <공감과 곤혹 사이>, <한국 근대문학의 주름> 등이 있음,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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