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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서평/이윤정/‘현재’를 끌어안는 시선視線의 은밀함:그러나 ‘현재’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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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서평/이윤정/
‘현재’를 끌어안는 시선視線의 은밀함:그러나 ‘현재’는 ‘여기’에 있다.—윤인자, 허금주 시집
1. 윤인자, <에덴의 꿈>:따뜻한 서정의 근원, 에덴
윤인자의 <에덴의 꿈>은 주변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의 향연을 보여준다. 정독하노라면, 세계의 일부가 조금쯤 밝아졌다는 은밀한 기대가 찾아온다. 아아, 이건, 하는 그런 새삼스러운 ‘경이’와 함께. 그것은 세계의 밝은 이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잠재되어 있던 무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 이성적 사고와 비판적 인식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의 패턴에 갇혀, 우울과 불안, 염려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네가 잃어버린 정서가 이런 것임, 을 일깨우는 듯하다. <에덴의 꿈>을 통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시인은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의 주변을 살피는 작업을 지속한다. “설렘으로 가득한 간이역/세월의 흐름에 기대선 늙은 나무의자”(「간이역의 늙은 나무의자」)에서 간이역의 오래된 나무 의자를 관찰하기도 하고, “동네 앞 나이 많은 늙은 정자나무”(「늙은 정자나무」)를 바라보기도 하는데, 이러한 ‘시선’의 공통점은, ‘간이역의 늙은 나무의자’를 통해 쓸쓸함과 회한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설렘’을 말하며, ‘늙은 정자나무’를 통해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 모습”을 그려낸다는 점, 즉, 그 ‘따뜻한 서정’에 있다.
세계의 폭력성과 불확실성에 기초한 불안의식에 경도되어 있는 근간의 현대시의 흐름과 시인 윤인자의 지향은 확실히 차별화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세계에 대한 ‘대응방식’이라는 시의 새로운 창작명제를 무심히 지나쳐 온전히 그가 꿈꾸는 시세계에 모든 시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이 쓴 바, ‘에덴’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세상은 갈수록 어려워가지만, 근원은 결국 아름답다, 는 식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를 추억하며, 유년의 기억의 어느 지점으로 향할수록 구체화되는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에덴’을 말한다.
굼벵이 한 마리 기어간 자리에
하얀 소금꽃이 반짝인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추밭
세상도 쓰러지는 땡볕
갈퀴 같은 손이 날렵하다.
잘 익은 고추 하나 따면서
잘 익은 자식 하나 건지고,
썩은 고추 하나 버리면서
액운 하나 버린다.
굼벵이처럼 구부리고 고추를 따다가
끝내 돌덩이 품은 굼벵이가 된다.
―「어머니의 팔월」 전문
「어머니의 팔월」은 이러한 관찰과, 관찰에 의한 아름다움이 극명하게 표현된 시이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추밭”, “세상도 쓰러지는 땡볕”은 고난과 시련의 상징이 아니다. 바람한 점 없는 고추밭, 강렬한 땡볕 속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고단한 생활에 지쳐있지 않다. 고추를 따며, “잘 익은 고추하나 따면서/잘 익은 자식하나 건지고” 와 같은 따뜻한 사랑의 정서가 도저하게 흐르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썩은 고추 하나 버리면서/액운 하나 버린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정서는 어머니의 고추따기에 새삼 활력을 불어넣는다. 고추하나 딸 때마다 자식이 잘 되는 꿈을 꾸고, 썩은 고추를 버릴 때에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액운을 버린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생生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투사하고 있다. 이는 “굽은 손 폈다 오므렸다/중얼중얼 계산하시는 어머니”(「어머니의 계산기」)와 겹쳐지면서 고단한 생활에 대한 절망과 낙담보다는, 생활이 주는 활력과 선물처럼 주어지는 ‘삶의 수단’에 활기를 띠는 아름다움으로 그려진다. 고전적인 반성이지만, ‘나는 어떠했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시이다. 시인은 이를 ‘관찰’을 통해 드러내면서 객관화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전언한다. 다시 고전적인 깨달음이지만, ‘세상에는 이처럼 숨겨진 아름다움들이 많다’ 라는 따뜻한 전언.
겨울엔 하얀 눈꽃 날리는 창밖 바라보며
찐 고구마에 호박식혜 한 잔
음, 도시 사람들 이 맛, 이 멋을 알까.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 집을 지었다
―「에덴동산」 부분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를 추억하던 시인은, 한층 더 자맥질하여 ‘고향’, 혹은 ‘원초적 장소=시골’로 향한다. 기어코 ‘에덴’에 입성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번뜩인다. “도시 사람들 이 맛, 이 멋을 알까”, 시인이 읊조릴 때에는 “찐 고구마에 호박식혜 한 잔”의 맛이 그립다. 나의 그리움은 아니나, 시인의 만족과 멋이 온전히 전해져온 결과다. 시인은 ‘에덴’을 발견한다. 하얀 눈꽃 날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먹는 따뜻한 고구마와 호박식혜는 시인의 꿈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가장 안온한 장소에서 가장 낮은 마음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착한 서정과 연관되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태생부터 함께였던 장소에서 에덴을 꿈꾼다. 이러한 시인의 이상은, 고향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유년의 골목길 돌아서면/어머니 나를 부르는 소리 있어”(「마음은 고향으로」), “난 고향이 좋아 시골이 좋아”(「농사꾼이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유년의 시기는 마음의 고향이다. 그것은 ‘시골’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연관되면서 현재적인 삶에 대한(시골에서 사는 삶에 대한) 만족감으로 이어진다. “연봉은 거둔 대로”(「나를 소개합니다」) 인 현재적 삶에서 시인은 덧붙일 것을 굳이 찾지 않는다. “새것 속에 새것이 없고/낡은 것에 낡은 것이 없듯”(「행복한 아침을 닦는다」)과 같은 깨달음은 오히려 신선하다. 새것도 낡은 것도 없다, 그것이 현재이며, 현재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의 ‘행복한 아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장거리 손님 부르는 기사들의 호객 행위/가까운 곳 손님들에겐 택시도 없다”(「막차」)에서는 시골이지만, 이조차 ‘시골’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정겨움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힘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과도한 감정의 분출이 아닌, 담백하고, 소소한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힘이다.
짭짤한 갯바람에
훌쩍이는 파도소리.
멀리 등대는 샛별 같고
달빛에 취한 저녁바다.
찰랑찰랑
술잔 부딪히는 소리
고요한 적막을 깨우고,
사공 없는 목선 위에
갈매기 한 마리
꾸벅꾸벅 졸고 있다.
―「밤바다·2」
시인은 밤바다를 그저 ‘관찰’ 하고 있다. 시인의 관찰자적 시선은 독자의 시선과 맞물리며 힘있는 조응을 이끌어낸다. “사공 없는 목선 위에/갈매기 한 마리”가 졸고 있는 모습이 유려하게 그려진다. 무엇일까? 이 ‘밤바다’ 역시 시인에게는 에덴과 다르지 않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에서 ‘세상’을 읽어내는 시인은, 철학적 인식과 세상을 말하는 갖가지 어지러운 언사들에도 꿈틀거리지 않는, 일목요연함을 갖추고 있어, 읽는 이의 심사를 가지런히 정돈시킨다.
가을의 모퉁이에서 혼자 피는 코스모스
장대 같은 허리 쭉 펴고
오늘도 한들한들 몸매 자랑하고 있다.
―「가을풍경」 부분
시인이 유독 주목하고 있는 것은 봄, 여름, 가을의 ‘풍경’들이다. 풍경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 세상을 움직이며, 세계의 틀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뒤바꾼다. 앞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갈매기’를 관찰하던 시인의 시선에 “가을의 모퉁이에서 혼자 피는 코스모스”가 포착되었다. ‘한들한들 몸매 자랑하는’ 그 모습은 가을의 은유인 코스모스의 역할을 이미 다 해내고 있는 듯하다. ‘가을’에 대한 이미지는 “텃밭 가에 향기 그윽한 깻잎 팔랑팔랑/가을 아침이 더욱 싱그럽다”(「농부의 아침」), “별빛이 쏟아져 나리는 복룡리 들판으로/늙은 호박처럼 밭두렁에 가을이 눌러 앉네요/노란가을이 말이에요.”(「가을손님」) 등으로 변주되는데, 모두 관념적인 것들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에 근거한 표현들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의 관찰자적 지향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바람부는대로 흔들리는 코스모스와, ‘텃밭 가에서 그윽한 향기를 내는 깻잎’, ‘별빛이 쏟어져 나리는 복룡리 들판’은 가을에 대한 ‘느낌’을 각 개인에게 전혀 다른 언어로 선물한다. 내가 상상하는 깻잎과 네가 상상하는 깻잎이 전혀 다른 모습이듯이.
같은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시인은 “비둘기 발 벌겋게 얼고/꾸르륵 구구, 발 시리다”(「꽃샘추위」)라고 쓴다. 꽃샘추위를 ‘비둘기의 언 발’을 통해 드러내는 시선의 정교함이 놀랍다. 다음의 시를 보라.
뒷산 밤나무
총각 까까머리 같은 밤송이가
입을 크게 벌렸다.
반질반질 대머리가 된 알밤
또르르 툭 발밑에 구른다.
―「가을을 줍는다」 부분
가을, 밤송이가 점점 벌어져, 반질반질한 알밤의 머리가 힐끗 보이고 결국 대머리가 되고 만 알밤이 툭, 떨어지는 정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시인의 에덴을 훔쳐본 자는 함께 따뜻해진다. 세계가 멈추고, 시간이 멈추고, 오로지 ‘밤송이’에 국한된 시선이 작동한다. 이러한 시인의 관찰은 ‘시’가 약동하는 지점이다.
그래도 난
시하고 놀고 싶다.
내 맘에 쏙 드는
커피처럼 향긋한
들꽃처럼 소박한 시로
은은한 시를 쓰고 싶다.
―「이런 시를 쓰고 싶다」 부분
시인에게 또 다른 에덴은 ‘시’이다. 결국 모든 에덴은 ‘시’로 귀결된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서정의 근간은 외려 ‘시’이다. “커피처럼 향긋한/들꽃처럼 소박한” 시를 쓰고자 하는 착한 바람이 말랑한 서정의 근원지이다. 치열하지 않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이 깃든 시를 쓰기를 바라는 시인은, “그래, 맞아 나 시 들린 여자./당신만큼 시도 사랑해”(「시 들린 여자」)라고 일갈한다. “시 들린 여자”. 은은한 시를 쓰고 싶은 바람이 “휴대폰 문자에 글을 쓰고”, “잠을 자다가도 글귀 떠오르면/벌떡 일어나 끼적거리면, ”과 같은 ‘시쓰기’의 행위로 구체화될 때, 시인은, “먹는 이들의 가슴을 감동시킬/맛있고 부드러운 두부”(「콩을 가는 여자-나의 습작기」)를 꿈꾼다. 우리는 어떤 에덴을 간직하고 있는가? 에덴의 흔적조차 갖지 못한 팍팍한 일상이라면, 시인이 꾸는 에덴의 꿈에서 서정의 따뜻함을 함께 길어올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현재’는 추상적 미래나 그리운 추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편’에 있으니, 에덴은 현재다.
2. 허금주, <옥돔구이>:기억과 현재의 조응으로서의 시
허금주의 <옥돔구이>는 독한 그리움과 시를 쓰는 행위가 만나 피워낸 나릇한 환각을 제공한다. 시편마다 묻어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유년시절의 화자가 자주 등장하는 정황과 연관지어 볼 때에, 결국 근원에 대한 그리움, 회귀의 지향으로 보인다. 현재를 살며 추억과 그리움을 쓰는 시의 언어는 현재적 삶의 불충분함을 말하기 보다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의 파편들에 의지하고 있다. 이는 시쓰기의 근원을 탐색하고자 하는 의미와 더불어 시쓰기와 자기의 검열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근원에 대한 확인이며, 이것이 시창작으로 이어졌을 때의 검열적 수사는 시의 본향을 찾아가며 현재를 거스르게 되는 것이다. 과거를 애써 거슬러오르는 시적 지향은 치열한 그리움과 부딪힌다. 그리움을 넘어, 그리움 저 편, 을 응시할 때 시의 수사는 자기 검열에 성공한다. 반복되는 그리움의 코드는 그리움의 진정성을 넘어, 자기의 진정성, 시의 진성성이란 의미를 담보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태평양 푸른 심해深海를 돌고 나온
연어 떼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귀향을 위하여
더러는 몸이 찢겨진 채로
아버지의 키를 넘는 도시의 담장을 가볍게 타고 넘어
오선五線의 어느 한 줄에도 걸리지 않을
진홍빛 연어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선五線의 바다」 부분
시인은 연어 떼를 기다리고 있다. “단 한 번의 귀향을 위하여” 물길을 거스르는 연어 떼와 <옥돔구이>의 시적 지향은 닮아 있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의 여정은 “태평양 푸른 심해”를 도는 연어 떼의 그것을 연상시킨다고 할 수 있다. “단 한번의 귀향을 위하여”, 근원과 마주하는 단 한 번의 마주침을 위하여 그리움과의 조우를 써내려간 시들은, “진홍빛 연어알”을 위하여 아픈 흔적을 남기며 길을 거스른다.
옥돔구이 상 차렸어요, 아버지
시 잘 쓰면 가끔씩은 옥돔구이 먹을 수 있어요
세상 떠난 후 남는 불멸의 시를 위하여
웃음과 흥겨움, 눈물이 넘쳐나는
그 저녁식사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네
옥돔을 보면
목이 콱 막혀 와
바라만 보다 먹지를 못한다
―「옥돔구이」 전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옥돔구이’에 담겨있는 시이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아버지는 ‘시’와 지속적으로 연관된다. “시 잘 쓰면 가끔씩은 옥돔구이 먹을 수 있어요” 에서처럼 연관되기도 하고, “얘는 잠도 안 자고/문학 공부했습니다/딸아이 좀 더 멀리 갈 수 있도록/관심과 지도 부탁드립니다”(「아버지의 눈물」)라며, “열 살도 더 아래인” 논문 지도교수에게 절을 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아버지에의 추억과 시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시 행간 사이의 허름한 세간살이를
금빛으로 채워주던 아버지의 빛을
영원히 글 쓰는 자의 가슴에 묻어둔다
―「아버지의 책상」 부분
이처럼 아버지를 아프게 추억하는 행위는 ‘시의 행간’을 채우던 “아버지의 빛”이 시작詩作의 근원과 맞닿아있다. “가난하다는 것은/본향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가난하다는 것은」)는 일갈처럼, 부족한 것, 공백한 것은 본향에의 그리움과 닿아있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시쓰기의 갈증 또한 본향을 향해 현재를 거스르는 행위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부재不在와 근원의 탐색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늙음은 왜 자꾸 검은 머리카락을 생각나게 하나/이따금 먼 데로 허공의 꿈을 꾸는 아버지”(「비로소, 아버지」)를 보는 허허로움 또한 ‘검은 머리카락’을 생각하게 하는 잃어버린 청춘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시인의 ‘시간을 거스르고’, ‘현재를 거스르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결국, 시의 문제가 아닌가. 그렇게 거스르고 거슬러도 시는 현재를 살고, 그리움은 과거에 산다. 현재와 과거가 긴밀히 조우하는 그 ‘순간’이 시를 앓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날개」
몸을 태우고 태워 남은 재가 ‘날개’가 된다. 과거를 부정하거나 기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앓고 현재로 이끌고 와, 스스로의 본향과 만나는 그 순간, 길을 거스르면서 다 타버린 몸은, 재가 되어,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이 때에, “환상통으로 남아있는/꽃방에서 보낸 하루의 입맞춤”(「꽃방에서 보낸 하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그대 빛과 향기를 얻기 위해/온실을 버리고 거친 광야에 서 있다”(「목련」)에서처럼, 빛과 향기를 얻기 위해서는 안온한 현실을 버리고, 거친 광야에 내몰려야 함을 인정하며, 검열을 통해 시의 엄정함을 말하는 것과 연관된다.
알을 깨지 못한 새가 날개를 얻지 못하듯
살을 깍는 고통도
아린 눈물도
단 한 사람으로 뿌리내리기 위한
꽃의 설렘이리
―「목련」 전문
이는 「목련」에서처럼, “살을 깍는 고통도/아린 눈물도” 결국은 “단 한 사람으로 뿌리내리기 위한/꽃의 설렘”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온전한 자아를 만들기 위한 설렘을 담보한다. 이는 휘청거리는 시간들이다.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아픈 시간들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어룽진 시간을 나는 사랑하리
내 뜨거운 감성도 영혼도 다 바친
위대한 허기여
비밀의 속삼임이 흘러내리는
저 위대한 말없는 손
한 개 심판의 칼을 내리치며
다시금 삶을 응시하는
너무 슬프고 춥고 아름다워
이 세상을 나는 못 잊을까, 못 잊을까
―「노을」 전문
‘노을’과 같은 시간을 사랑한다고 쓰고 있다. 어룽진 시간,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불완전한 현재를 사랑한다,고. 이것은 현재에 “뜨거운 감성도 영혼도 다 바친/위대한 허기”가 깃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슬프고 춥”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그것은, “예술은 눈물을 먹고 자란다”(「그대 뉘신가요」)는 시작詩作의 명제와 통한다. 결국 시란, 눈물로 이루어진 것. 가장 큰 그리움을 담보해야 시의 비밀함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시린 땅/맨몸으로 서있는 나무처럼/사는 법을 배운다”(「겨울나무」)에서처럼, 결국은 “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처럼” 그렇게 살아내는 법을/시를 쓰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현재’는 ‘여기’다. 쓰라린 그리움으로부터 시를 쓰는 현재는 ‘여기’. 시인은 ‘여기’의 삶을 위해 치열하게 그리워하고, 힘을 다해 목마르다. 근원을 탐색하는 시인의 엄정한 자기 검열에 순결한 지지를 보낸다.
이윤정∙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 한양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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