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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서평/노지영/말씀의 시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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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서평/노지영/
말씀의 시를 넘어서-김진완, 정한용의 시집
1. 말씀이 나오던 입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말씀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음성을 회복하는 것은 문자 언어의 요원한 과제였다. 고대에는 모든 예술과 문학을 포괄하던 용어였던 ‘시’가 하나의 하위장르로 분화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 태초의 음성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오염되지 않은 문자 언어나 시 형식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시학자들 사이에서 견고하다. 그 믿음은 하나의 절대정신과도 같다. 많은 것을 부정하고 지양하여 얻어내는 총체적 이성으로서의 시학이 시를 지배하고, 절대시와 근본시학의 본령을 구축하며 문학사 안에서 시가 발전해갈 것이라는 믿음도 여전히 거세다. 주관과 객관이 하나의 동일화된 이미지로 형상화될 때 그 시는 미학적으로 빼어난 시가 되고, 그것을 쓴 시인은 뛰어난 인식 능력을 가진 자기 동일적 존재로 숭앙받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입은 신의 입을 닮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태초의 말씀을 알고 싶어 하는 주체가, 아니 안다고 생각하는 주체가 말씀을 잘 전달할 만한 원근법적 이미지를 생산한다. 그리고 한 개그맨의 반어적 유행어처럼, 그 말씀을 잘 전하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외상에 가까운 객관적 현실들은 시의 적격에 맞춰 지양되어야 한다. 때로 비속어와 자극적인 시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언제든 여러 비평가들의 논리에 의해서 숭고해질 수 있다. 다양한 수사 안의 비틀린 말씀들은 무수한 주석들이 해결해줄 것이므로 개념화에 능한 지적인 평론가들을 믿으면 된다. 날이 갈수록 평론가들도 시인을 겸업하는 추세이므로 발신자의 입장에 동일시되어 친절히 수신해 줄 것이다. 그러한 틀 속에서 시는 특정한 텍스트성을 가지며 특정 계급이 향유하는 장르 안에 더욱 귀속되어 간다. 어쩌면 시란 점차 시인의, 시인에 의한, 시인을 위한 장르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시의 장르성을 알고 있는 다양한 이들, 말씀 고유의 미학성을 안다고 생각하는 무수한 주체들에게 그래서 정한용과 김진완의 시집은 파격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두 시인은 시집의 제목에서부터 텍스트로서의 시가 아니라 시의 상호텍스트인 ‘유령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시인 자신이 “아는 것”으로 그려낸 세계를 다시 ‘모른다’고 번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모른다고 대답한 영역은 시에서 어떤 방식으로 귀환하는가. 우리가 보지 못한 유령들은 시라는 장르에서 어떤 형식으로 출몰할 수 있는가. 말씀이 나오던 시의 입이 말씀을 말하는 입이 아니라 무언가를 먹는 입으로 느껴질 때, 시는 세계와 동일화된 시인의 입에서 벗어나서, 먹히고 있는 것들의 소리에 어떻게 귀 기울일 수 있을까.
2. 잡것들의 환청을 듣다-김진완의 <모른다>
김진완은 그 어떤 시인보다 ‘소리’에 민감한 시인이다. “자본의 막장서 개미핥기 괴물이 기어 나와 나스닥딱! 코스닥딱! 육중한 걸음 옮기며 버글버글버블 으르르 독거품을 뿜어대”(「딱풀에 경배를」)는 시대에 그는 세계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그 말씀에 먹히고 있는 소리들의 질감을 그대로 전한다. 그의 여러 독자들이 합의하듯이 김진완의 시는 보는 텍스트라기보다는 귀로 듣는 텍스트인 것이다. 김진완의 시에는 구어나 방언, 비속어 등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소리의 질감이 극대화되고 있으며, 랑그로서의 어휘가 화행 속 파롤로 실현되는 순간, 착각하여 들리거나 다른 뉘앙스로 변형될 때의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진리를 ‘질리’로 발음하고 “질의 이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세상이란 거대한 씹구녕 속에서 질퍽대는”(「송이라 불리던 고래」) 것이라고 시인이 속화시켜 표현하는 방식은 그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시적 전략 중에 하나다. 하나의 단어가 유사한 발음 속에서 다른 언어의 위치를 차지한다든가 어떤 소리나 의성어로 변형되어 들리는 것이 김진완에게는 ‘시적 상황’으로 포착될 때가 많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새겨들은 ‘말씸’은 발화의 실행 속에서 대화의 수신자에게 ‘말씹’(「늙다리 총각 김경우」)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러한 화행적 상황에서의 말장난을 통해 ‘말씀’과 ‘말씹’의 거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말씸’이 ‘말씹’으로 비하되는 상황이 해학적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말실수나 말장난은 그 어떤 전언보다 분명하다. ‘말씀’이 ‘말씹’과 다르지 않거나 ‘말씀’이 ‘말씹’으로 격하되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현실 속에서 ‘말씀’은 ‘말씹’의 환청과 연계되어 있을 만큼 퍽퍽한 것이다. 이처럼 김진완의 시 작업은 시의 고귀한 말씀이 실재와 괴리되어 있는 부분을 비속한 언어로 불러내어 기존의 시가 위장해온 비현실적 요소들에 주목하게 한다. 기존의 시 안에서 억압되거나 말해지지 못한 것들의 소리를 다시 시 전면에 불러와서 그 환청들이 오히려 현실과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를 다음 시에서 시인은 “환청 통조림”을 보관하는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다.
혈압으로 쓰러진 S가 위독하다는 얘길 들은 탓인지 간밤 꿈에 S는 자기 머리통을 옆구리에 낀 채 “씨팔 좆됐어 좆됐어” 중얼대며 못 본 척 지나쳤어요. 그의 죽음을 예감해버린 꿈 밖, 불안하고, 담배에선 피비린내가? 꽈빡 캐-앵! (…중략…)
어느 운명의 끝을 목격하는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죠. 식어가는 자궁 안에서 산 것이 꿈틀대는 것도 보기 어려운 광경이죠. 운이 좋다고요? 침을 뱉고 싶네요. 아스팔트가 피와 젖으로 흥건해졌어요. 본디 것으로 돌아가는 색은 검은 색이라든데 아스팔트는 제대로 된 캄캄 검은색이란 생각, 들었어요. 귀에선 자꾸 어미 배 속에 든 것들 옹알이가 들렸고요. 뭣에 씐 게 틀림없지요. S이거나 죽은 어미 개의 혼이거나 간에 암튼,
환……(배꼽이 시려. 이상해. 뭔가 이상해.)
……청이……(한참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까?)
들렸어요. 물론, 개소리죠.
―「나는 환청 통조림이 가득 든 냉장고다」 중에서
“혈압으로 쓰러진 S가 위독하다는 얘기”의 불길한 느낌은 곧 ‘꿈 안에서’ “씨팔 좆됐어 좆됐어”라는 S의 목소리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예지몽은 ‘꿈 밖에서’ 다음 날 타고 가던 마을버스와 개가 충돌하는 실제적 사건으로 연쇄되는데, 화자는 “꽈빡 캐-앵!”이라는 소리 앞에서 “어미개의 배 속에 든 생명의 옹알이”거나 “S이거나 죽은 어미 개의 혼이거나” 한 것들의 환청을 듣게 된다. 지인의 죽음, 일상 속에서의 사소한 죽음들은 ‘소리’의 흔적을 남기고 시인에게 환청으로 귀환한다. 보존 기간을 최대한 늘린 통조림을 보존 기간을 더욱 늘리기 위해 냉장고 안에 가득 넣는 행위처럼, 김진완에게 시를 쓰는 것은 다른 이들이 ‘개소리’로 치부한 것들을 특별히 통조림 안에 넣어 오래 보관하고, 망각된 채 사라져간 소리와 말씀들의 환청을 보존하는 행위일지 모른다.
이러한 환청은 시인이 발화할 때 지속적으로 그의 문장에 개입하는 ‘허깨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인은 시집 후기에서 자신의 말에 ‘이죽거리는’ “밉살스런 허깨비”의 간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을 시인이 아니라 ‘잡놈’이자 “잔정이 많은” ‘잡것’이라 칭하며, 허깨비들의 환청과 ‘정 떼지’ 못하고 ‘썰’을 푸는 삼류 시인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조또 만국의 삼류들이여 단결하라!
일류가, 오리지널이, VIP가, 특급이, 최상위 1%가
허벌나게 조져놓은 세상을
삼류와 야매, 지지리 궁상들이 활개 치는 겁나 좋은 세상으로 갈아보자고 말이야
―「어느 삼류 시인이 썰 풀기를」 중에서
일류, 오리지널의 ‘말씀’이 “허벌나게 조져놓은 세상”을 “삼류와 야매, 지지리 궁상들”의 ‘썰’로 갈아보려고 하는 위의 시는 ‘단결하라’의 마르크스의 강령과 삼류들의 욕설이 엮어져 있는 ‘잡것’의 발화다. 이 잡것들의 세계는 대부분 다음의 시에서처럼 육성의 ‘소리’로써 전달된다.
학명 ; 한숨꽃초점없는먹빛눈알꽃꽁초주워피워문꽃신발베고누움꽃내자리여비키라짜슥아꽃얼어뒈질녀러거시지랄여꽃배째라꽃조까라마이싱꽃황당꽃게거품꽃씨버럴잡녀러쉐키우아래도없냐잉꽃닝기리조또니배대지철판깔었쓰으꽃카악가래침으로대갈통뿌샤불팅게꽃어따눈알을치떠먹물쪽빨아뱉아부러꽃아아멋빤다꼬보고섰냐시방꽃말리지마러꽃내싸둬부러좆꼴려디져불게들꽃……꽃……껀수잡은꽃피흘리는꽃피딱지또터짐꽃
화아따아아지메아지메요나본적엄는교염병헌다꽃요렇게허는거여꽆아따따뉘님보지금테둘렀응께내뜩근한조즈로할라당녹여불라네꽃
분류 ; 체념과
분포지역 ; 대-한-밍-국 짝짝짝 짝짝
자생지 ; 전철역 콘크리트 바닥 및 공원 벤치
크기 ; 높이 150~200cm
―「이크, 아크 피해 가는 꽃밭」 중에서
띄어쓰기 없이 세계에 빽빽이 널려 있는 노숙자들을 꽃밭으로 비유하고 있는 이 시에서 노숙자들을 “이크, 아크 피해가”기는 쉽지 않다. 눈과 몸이 피하고자 해도 그 꽃들의 진경은 소리의 환청으로 펼쳐진다. “술 머금은 목울대만 위아래로/꼴깍꼴깍 움직이는 꽃”들이 곧 한데서 그 밭을 이루며 싸우는 과정은 피할 수 없는 ‘소리’가 되어 화자에게 도달한다. 노숙자들이 살아가며 내는 절규와 괴성이 곧 그들의 학명, 이름이 되고, 시의 화자는 이들을 피해가다가도 “공중화장실 장기 매매 전화번호를 손바닥에 옮겨 적”으며 자신이 “에이씨펄엄마나정말미쳤나봐하는꽃”이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자체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세계에 널브러져 있는 ‘잡꽃’들을 화자는 피해 가고 싶지만 결국 “이크, 아크” 소리를 함께 내며 같은 욕설을 뱉는 꽃이 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잡것들의 환청은 생각보다 피해가기가 쉽지 않다. 피해가고 싶지만 이는 또한 “멀지 않은 미래에 고스란히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촛불 광장을 지나」)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말씀‘의 중심에서 벗어난 사소한 ‘잡소리’와 ‘개소리’들도 귀 기울여 들으며 시 안에 이를 환청으로 보관하는 방법을 택한다. “주차장 시멘트 터진/틈새로” 올라온 ‘잡풀’이 “우주 한가운데 돋은 푸른 귀”(「푸른 귀」)가 되듯이, 시인은 스스로 ‘말씀하는 입’이 되기를 경계하며 사소한 잡것들의 무수한 환청을 듣는 ‘푸른 귀’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3. 유령들이 입을 열다-정한용의 <유령들>
정한용은 학살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불러내는 심령술사이다. 그의 시에 참혹하게 재현된 학살과 재난의 흔적들은 스크린 속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로 소비되며 사라져 온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보고하는 것은 이미지로만 소비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의 사건이지 않은가. 환영의 암실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이 극장을 탈출하게 되면 바로 만나게 되는 실재의 이야기인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제공하는 폭력의 스펙터클에는 언제나 영웅적인 주연이 있다. 이는 재난의 서사와 테러의 서사를 숭고한 것으로 이겨내는 드라마 속의 보편적 인물이다. 인간들에게는 언제나 외상적 현실을 잊게 하는 치료의 드라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끔찍한 실재의 사막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우리가 이것을 온전히 현실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할리우드의 서사는 실재를 대리하며 허구적 서사를 오히려 현실로 받아들이게끔 돕는다. 지젝이 누누이 강조하듯이 귀환하는 실재는 그 ‘외상적/과잉적 본질’로 인해 우리의 현실에 통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실재 자체가 악몽 같은 비현실적 유령으로 인식되어야만 감당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허구는 현실로 인식되고, 반면 실재는 유령이 되는 기현상이 일어난다. 유사물인 할리우드의 치료 서사가 병리학적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심리적인 경계선’을 만들어내고 그 경계선 밖에 있는 것들은 인간들에게 허구보다 더욱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경계선은 아마도 문학과 비문학적인 것을 가르고 시에서도 그 장르성을 구축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는 시 안에서 기존의 미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계선에 있는 것들을 구별 짓기하며, 심리적인 용인이 가능한 선에서의 현실을 일부 수용하여 시로 승화시키기를 원한다. 이처럼 시의 장르성도 독자의 심리적인 방어기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시의 장르성을 한 권의 기획 시집으로 파괴하고 있는 정한용의 시집은 우리 시의 놀라운 수확이다. 물론 그의 이전 시집에서도 상호텍스트를 활용하여 현실적 상황을 반영한 전례가 있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비문학적(?) 상호 텍스트를 차용한 시집은 그의 시력이나 다른 시인들의 시력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시집의 끝에는 통상적인 발문 대신에 도서와 영화, 인터넷 사이트 등의 다양한 현실적 소재가 밝혀져 있어 그의 시를 추동하고 추천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실재적 사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집 전체는 인류 학살사, 즉 말씀을 믿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야만사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버스가 벌집이 되는”(「친구는 없고 산만 있다」) 현실이 영화관 밖에서 차마 치료될 수 없는 사건이 되어 일상적으로 출몰한다. 5·18의 광주, 4·3의 제주, 월남전, 9·11 테러와 아우슈비츠, 인디언 학살, 난징에서의 학살, 유대계와 회교도 사이의 기나긴 분쟁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부터 인터넷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댓글 내전이나 결혼 이주 여성의 문제, 납치나 강간 사건, 모피코트를 제조하는 일상의 폭력들까지 시의 소재로 다뤄진다. 그 소재는 시의 미학적 관습에 따라 필요한 시어가 조심스럽게 취사되는 수준이 아니다. 시인의 원근법적 시선에 의해 포획된 현장은 어쩌면 제국의 박물학적 시선을 닮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는 주체, 말하는 주체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대답을 들어야 하는 수신자로서 시인은 유령들에게 말 걸기하고 있다.
겨우 살아남은 200여 명은 황무지 외딴섬 플란더스로 강제 추방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혹독한 환경에 버려져 첫해에 65명이 죽고, 10여년 뒤 수용소가 문을 닫을 때는 겨우 46명이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1876년, 최후의 테즈메이니언 여성 트루가니니가 세상을 뜨며, 그 검은 인종은 사라진다. 인종 절멸의 상징이 된 그녀의 유골만이 테즈메이니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
저 바다에 묻노니
내 그리운 얼굴들,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검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우리 아들
창을 갈아 밤중에 호수를 건너던 우리 남편은
분노의 눈물을 삼키던 사람들
플란더스까지 수천리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파도여 나를 죽음의 고향으로 실어다 주렴
―「바다에 묻는다」 중에서
시집의 첫머리에 실린 이 시에서 시인은 인종 말살사의 현장을 숫자와 연도까지 명확히 기록하여 보고하고 있다. “알몸으로 지내”고, “추운 날씨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비계와 숯을 바”르고, “온몸에는 장식적인 흉터를 지니고 있었고, 캥거루 이빨과 조개껍데기를 꿰어 만든 목걸이, 꽃과 깃털 등으로 장식하길 좋아했던” 검은 인종들은 백인들의 원주민 이주 정책에 저항하다가 결국 절멸되었다. 결국 원주민 최후의 여성 트루가니니가 유골이 되어 “테즈메이니아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된다. 서구의 눈으로, 서구의 프레임으로 신비롭고도 야만적으로 묘사되었던 원주민들은 결국 식민제국의 서사 속에서 유리창 안에 유골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정한용은 그러한 폭력 제국의 박물학적 프레임 속에서 유리창 안에 전시되어 있는 상징적 대상물에 대해 담담히 기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보고 뒤에는 자신들의 억울함을 “바다에 묻는” 유령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함께 병치된다. ‘유골’이 보관된 박물관 안에는 또한 동시에 ‘유령’의 목소리도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스스로 정리하여 ‘말씀’하기보다는 유령의 목소리가 묻는 질문을 최대한 성실히 중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령이 떠도는 바다와 같이 이제 “온 몸의 주름에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간직한 채 사라져버린 것들이 동시에 말하기 시작한다.
내 이름은 하와, 나이 17세,
수단 남주 니알라 근처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마을은 숲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내가 키운 양과 말들도 모두 잔자위드에 빼앗겼지만
거긴 아름다웠죠, 낙원이었죠.
그날 이후 모든 게 변했어요.
아저씨들은 짐작도 못할 거예요. 우리 눈물을.
찢어진 상처는 저절로 낫지만 가슴에 맺힌 분노는
카메라에 절대 찍히지 않을 거예요.
당신들은 백인이니까, 우리는 어차피 검은색이니까.
(…중략…)
몇 번인가 정신을 잃었을 때, 숲의 노래가 나를 깨운 것 같아요.
다행히 리라타운까지 살아 왔어요.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예요.
거긴 아직 우리 같은 어린 병사들이 수천 명이나 남아 있어요.
더 할 말 없어요.
카메라 좀 치워요.
껌이나 초콜릿 있으면 하나 주세요.
―「숲이 말한다」 중에서
“카메라에 절대 찍히지 않”는 실재적 진실은 하와라는 화자에게 ‘가슴에 맺힌 분노’로 남아있다. 마을과 숲이 함께 불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에서 어린 여자애들은 강간과 폭행을 당하며 간신히 마약으로 견디며 살고 있다. 마치 농담처럼 어린 여자애가 군인들에게 잡아먹히며, 어린 병사들이 현장에 남아서 싸운다. 그러나 이들을 사후적으로 조명하는 카메라는 제국의 논리와 시선에 의해 편집될 수 있기에 외상을 겪는 당사자는 카메라 촬영을 “껌이나 초컬릿” 같은 교환가치로 치부하고 만다. 진실은 허구적 서사에 의해 편집되고 허구가 실재적 진실을 대체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여자애의 “카메라 좀 치워요”라는 말은 서구의 앵글에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유령들이 외치는 분노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사라진 것들은 분노의 목소리로, 다른 것들을 경유하여, 이렇게 다시 귀환한다. 그것은 숲이 되고, 바다가 되고 온 세상의 “모든 틈”과 ‘주름’ 속에 숨어 다시 돌아온다. 정한용은 환영의 카메라나 스크린 앞에서 비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관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카메라가 비추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잔혹한 풍경들을 비시적이라 할 만큼 상세하게 보고한다. “파인애플처럼 많은 눈을 갖고” 있는 ‘대형大兄’들의 ‘말씀’(「대형께서 말씀하시길」)이 하나의 사실로 굳어질 때, 이에 포획되지 않는 진실을 수색하는 몸짓이 시인의 시 작업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다수 대중들을 향해 ‘말씀’을 ‘중계’하는 방식이 아니라 풀리지 않은 채 맺혀있는 것들 앞에 제3자로서 ‘중개’하는 방식으로 가능하다. “아직 길을 잃고 돌아가지 못해/은밀하게 옷깃에, 음식에 스미어 잘 마른 영혼까지 적시고 있”(「유령들」)는 유령들에게 시인은 과감히 말하는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죽을 때까지 악령처럼” 따라다니는 ‘문신’(「말보로맨」)과도 같은 고통이 다 풀릴 때까지, 텍스트의 상호텍스트는 따라다니고 허구 뒤의 진실도 이를 바짝 추격할 것이다.
유령의, 유령에 의한, 유령을 위한 시가 될 때까지 시인도 시의 ‘유령되기’를 자처하면서 자신의 ‘말씀’을 아끼고 있다.
4. 환청화된 절규, 유령화된 실재
김진완과 정한용의 시집은 ‘말씀’이 세계와 동일화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시의 다양한 해법을 보여주고 있다. 말씀을 말하던 입은 시학적 고정관념 속에 거주할 때 때로 세계를 삼키는 입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러한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은 실재의 사막에 서고자 하는 시인들에게 새로운 시적 전략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두 시인은 허구가 실재를 대신하고, 말씀이 현실을 대변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환청화된 잡것들의 절규를 드러내고 유령화된 실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시적 진실에 다다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말하는 시인이 되기보다는 ‘환청을 듣는 유령되기’를 택한 두 시인들의 분투를 통해 아마도 독자들은 환영의 장막을 깨고 실재의 핵을 만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김진완, 정한용의 시를 읽는 독자여, 여기 실재의 시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노지영∙2010년 ≪시인≫으로 평론활동 시작. ≪리얼리스트≫ 편집위원. 방송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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