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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산문/윤의섭/현의 技術·1-시를 시로 쓰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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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285회 작성일 12-11-0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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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산문

윤의섭/현의 技術·1-시를 시로 쓰기 위하여

 

 

흔히 ‘좋다’의 반대말은 “나쁘다”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쁘다’라는 말에는 ‘좋지 않다’라는 의미 이상의 다른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나쁘다’는 사전적으로는 ‘옳지 않다, 건강 따위에 해롭다’ 등으로 풀이되어 있고, 조금 더 확대하여 ‘악하다, 형편없다’ 등과도 유의미 관계에 있다. 특히 ‘악하다’의 경우는 ‘좋다’의 반대 의미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좋은 시’라고 말할 때 그렇지 않은 시는 ‘나쁜 시’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사실 ‘나쁜 시’는 없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시라는 이름을 빌려 욕과 비난을 쓴 글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쁜 시’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각종 매체를 통해 발표된 시들 중 그런 ‘나쁜 시’는 없다. 이런 이유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좋은 시’라는 말을 쓰려면 매우 신중해야 하고, 가급적이면 이 말 대신 다른 가치 평가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훌륭한 시’, ‘뛰어난 시’, ‘절묘한 시’, ‘특별한 시’, ‘독창적인 시’ 등등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어의 반대말로는 ‘~지 않은 시’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평가어는 그냥 ‘좋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어로는 ‘별로’라는 말이 적당할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시를 보고 ‘좋다’라고 흔쾌히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시 백년사를 돌이켜 볼 때, ‘좋다’라고 할 만한 시는 사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다’라고 할 만한 시만을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선별된 시집을 통해, 각종 문예지 등을 통해 읽은 시 중 ‘좋다’라고 여긴 시만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시를 우리는 굳이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 시사에 있어서 ‘좋다’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시는 꽤 많은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들을 들여다보면 모두 자연과 삶과 현실과 감정을 담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비슷한 주제, 비슷한 내용으로 묶일 수 있는 시들도 있다. 시는 다양하지만 그 다양성 속에서 담아내고 추구하는 바는 우리가 아는 언어와 상상과 현실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좋다’라는 평가를 부여할 수 있는 시의 조건은, 그렇지 않은 시와의 차이는 무엇에 있다고 봐야 하는가.

결국은 새로운 표현을 보여주고 있는 시가 우리의 기억에 남는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표현 양식을 보여주었던 이상이 그랬고, 정지용이 그랬으며, 김수영, 김춘수 등등이 그러했다. 물론 새로운 표현은 시라는 장르의 속성에 알맞게, 그리고 독자들도 수긍할 수 있도록 ‘잘’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표현의 성공’이야말로 ‘좋다’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공적인 표현’을 이루기 위한 ‘표현의 기술’에 주목해야 한다. 요즘의 우리 시가 보여주고 있는 특징 중 한 가지는 바로 이 ‘표현의 기술’에서 오는 남다른 차이성이다. 비슷비슷한 시의 내용, 시의 형식, 시의 언어 등등 가운데 돋보일 수 있으며 ‘좋다’라고 느끼게 하는 시는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 결코 흔하지 않은 문법과 문체와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기억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를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아라. 그것은 아마도 새로운 표현으로, 성공한 표현으로 쓰인 시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 ‘표현’이 ‘시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시의 표현’은 ‘시적 표현’과는 다른 말이다. ‘시적 표현’이 시라는 장르의 범주를 벗어나도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면, ‘시의 표현’은 오로지 시 안에서만 소용되는 개념인 것이다. ‘시의 표현’은 ‘시적인 것’, ‘시 이전의 것’, ‘시가 아니었던 것’, ‘시일 수 있는 것’ 등을 시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즉 ‘시를 시로 쓰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시의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가 ‘표현의 기술’이라고 할 때의 ‘기술’은 ‘좋다’라고 할 만한 시를 쓰기 위한 기술인 것이며 진정 시를 시로써 완성시킬 수 있는 요체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가 시일 수 있는, 그리고 시가 시답기 위한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순간에 와 있다. 우리는 일부의 어떤 시들이 이 표현에 있어서 어색하고, 어눌하고, 무언가 명확하지 않으며, 의도적이라 할지라도 부자연스러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경우를 많이 목도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현상을 직시하고 연재의 형식으로 시의 표현 기술을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해 보고자 한다.

사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에 있어서 표현을 강조하는 것은 시 쓰기에 있어서 부정적인 태도로 생각되곤 한다. 이러한 인식은 종종 ‘표현에 집착한다’, ‘표현만 앞선다’ 하는 비판적 언사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표현에 치우친 시는 깊이가 부족하다, 지나치게 기교적이다, 겉만 화려하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평자들이 시를 비평할 때 표현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표현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도 그 표현은 화자나 시인의 심리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주제의식을, 세계관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와 관련된 한정된 방식으로 취급될 뿐이다. ‘멋진 표현’, ‘절묘한 표현’, ‘아름다운 표현’, ‘근사한 표현’ 등 시의 묘미, 시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의 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표현의 아름다움과 미적 가치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진부하거나 수준 낮은 차원의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표현의 한계’, ‘표현의 진부함’ 등 시의 내용과 의식에 대한 평만 보일 뿐 표현 자체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그러나 표현은 재현, 비재현, 시뮬라크르와 같은 현대 미학의 중요한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개념이며, 시를 시로서, 시를 예술로서 존재케 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시를 시인의 의식세계와 시인의 세계관과 연결시켜 비평하는 방식은 시의 내용, 시의 의미에만 치중한 방식이다. 이러한 편협된 관점은 당장 폐기되어야 한다. 표현은 화려한 기교에만 치중하는 태도를 대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새로운 표현’, ‘성공한 표현’은 시의 내용과 의미를 예술적 차원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기제이다. 최근의 비평 관행을 볼 때 주제의식, 세계관 등만을 들춰 보이는 작업은 오히려 시에 대한 시인의 가치관, 시적 인식, 시에 대한 사랑, 시를 통한 예술적 충만 등을 드러내는 데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면적인 방식이다. 시인은 ‘멋진 표현’, 궁극적으로는 ‘시로서의 표현’을 하고 싶다. 그러한 시를 쓰려 하는 시인의 의식은 대상을 부여잡고, 한 단어, 한 문장이라도 신중하게 고르며 어떻게 표현해 내야하는지에 대해 매 시편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표현이란 절대적인 선결 대상이다. 물론 시인의 주제의식, 세계관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그것이 어떠한 표현 방식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지, 그러한 표현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그러한 표현이 예술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지 등도 함께 논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표현이, 어떠한 표현 기술이 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시인의 가치 지향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의 표현과 관련하여서는 묘사, 비유 등이 주된 논의이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글은 이와 함께 구성과 구성에 있어서의 표현, 문장의 통사적 표현, 단어 선택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거론하고자 한다. 표현은 시의 어떠한 요소, 어떠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것이지만 시인의 표현에 대한 인식이나 시에서의 적확한 표현, 예술적 표현 등을 주로 살펴보고자 하므로, 표현의 특성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하여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이 글은 최상의 표현의 기술이 이것이다라는 식의 결정론적 제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들쳐 보이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기술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표현의 기술’의 예를 보여주어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시를 시로써 존재케 하는 ‘표현의 기술’을 살펴보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이 글은 다양한 시에서 다양한 예를 취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의 가치 평가는 되도록이면 유보할 것이다.

이 글은 ‘표현의 기술’에 대한 서론에 해당하는 글로써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호에 게재될 것이다.

 

윤의섭∙1968년 경기도 시흥 생, 1994년 ≪문학과 사회≫로 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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