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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독자시감상/권성혜|배반으로 완성되는 효孝-박노해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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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659회 작성일 12-11-0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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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독자시감상/권성혜|배반으로 완성되는 효孝-박노해의 「어머니」

 

 

어머니

박노해

남도의 허기진 오뉴월 뙤약볕 아래

호미를 쥐고 밭고랑을 기던 당신 품에서

말라붙은 젖을 빨며

당신 몸으로 갈고기 한 점 쌀밥 한 술

연하고 기름진 것을 받아먹으며

거미처럼 제 어미 몸을 파먹으며 자랐습니다

독새풀죽 쑤어 먹고 어지럼 속에 커도

못 배워 한 많은 노동자로 몸부림쳐도

도둑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 안하고 놀고먹지도 남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나로 하여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슬픔을 준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오직 하나 소원이라면

가진 것 적어도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이었지요

저는 열심히 일했고 떳떳하게 요구했고

양심대로 우리들의 새날을 위해 싸웠습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우리에겐 풍파가 몰아쳤고

당신은 더 불안하고 체념 속에 주저앉아

다시 나를 붙들고 애원하며 원망합니다

어머니

환갑이 넘어서도 파출부살이를 하는

당신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꿈입니다

가난했기에 못배웠기에

수모와 천대와 노동에 시퍼런 한 맺혔기에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은

마땅한 우리 모두의 비원입니다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염원을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에서의 바램을 잔혹하게 짓밟고 선 저들은

간교하게도 당신의 비원 속에

굴종과 이기주의와 탐욕과 안일의 독사로 도사리며

간악한 적의 가장 집요하고 공고한 혓바닥으로

우리의 가장 약한 인륜을 파고들며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어머님의 간절한 소원을 위하여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비원을 위하여

짓눌리고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해

오늘 우리는 불효자가 되어

저 참혹한 싸움터로 울며울며

당신 곁을 떠나갑니다

어머님의 피눈물과 원한을 품고서

기필코 사랑과 효성으로 돌려드리고야 말

우리들의 소중한 평화를 쟁취하고자

피투성이 싸움 속에서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펄럭이며 빛나는 얼굴로 돌아와

큰 절 올리는 그날까지

어머님 우리는 천하의 불효자입니다

당신 속에 도사린 적의 혓바닥을

냉혹하게 적대적으로 끊어 버리는

진실로 어머니를 사랑하옵는

천하의 몹쓸 불효자 되어

피눈물을 뿌리며 싸움터로 나아갑니다

어머니

어머니

자식은 자식이기에 부모의 피와 살을 받아먹으며 살아간다고 하던가. ‘남도의 허기진 뙤약볕 아래의 어머니’가 도시의 외로운 형광등 밑의 어머니로 바뀌었을 뿐, 부모님들의 모습은 동서고금이 대동소이한가보다. 시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회고하고, 어머니의 가르침과 행복한 가정에의 소망을 상기하지만, 그럼에도 일신의 행복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소망을 위하여 싸움을 계속 할 것을 다짐한다. 다짐은 성공했다. 그리고 그 엄숙했던 맹세의 주인공들은 이제 다시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말라빠진 젖도, 독새풀죽 쑤어먹은 어지러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세대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버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온몸으로 겪어낸 살 떨리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자식들에게만큼은 같은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래서일까, 자식은 부모가 되어서도 자식인지라 여전히 부모의 몫을 담보로 해서 우리들을 살찌웠다. 포동포동한 우리는 이제 ‘오순도순 평온한 삶’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안다. 실제로 경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왠지 알 것만 같다. 수 천 년 삶을 견딘 어머니들의 오랜 염원은 고지혈증처럼 우리의 혈관마다 열망한다.

시인은 탄식했다.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도 그 적은 분명했다. 그들에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역惡役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삶과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는 용사의 무공훈장이 보장 되었다. 나는 다시 탄식한다. 이제 더 이상 ‘굴종과 이기주의와 탐욕과 안일’을 한데 묶은 독사毒蛇 패키지 상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이다. 독사가 지나간 자리엔 그가 벗어던진 허물만이 남아있다. 그는 이미 우리들 마음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물질적 성공과 안락한 결혼생활,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진행돼야 할 개인의 자아실현과, 노후의 여가생활까지. 스펙 5종 세트니 9종 세트니 욕심 많고 재주 많은 우리들이 인생 4종 경기를 계획한다면 위의 것이 되지 않을까. 심지어 긍정의 힘과 감사까지도 그것이 목적 그 자체로서가 아닌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확인하고, 좌절하고, 다시 욕망하기까지 우리는 저 모든 것을 소비하고자 한다. 분명 맨 처음 어머니는 ‘당신의 오직 하나 소원’으로 ‘가진 것 적어도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을 꿈꾸었다. 그러나 자본구조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자본의 논리를 체화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진 것 적어도’와 ‘오순도순’이라는 말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내는 방패를 팔던 그 옛날 사람의 말처럼 양립하기 어렵게만 느껴진다. 결국 말라붙은 젖이 아닌 기름진 고기를 먹고 자란, 또 어디로 갔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사를 마음에 품고 사는 우리는 끝끝내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지 못하는 역사의 비극을 맛보게 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 어떤 사회도, 정체도, 제도도 자신을 거스르려는 쇄신을 하지 않고 안주한다면 옛 궁궐의 영화처럼 초연悄然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청준은 ‘소문의 벽’에서 보이지 않는 적의 무서움을 말했다. 유형有形의 벽은 비교적 쉽게 부숴 버릴 수도 있지만, 실체가 없는 벽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작품 말미에 이르러 시인은 어머니의 염원을 배반함으로써 뭇 어머니들의 소망을 이뤄낸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란 이겨내야 할 숙적인 동시에 혁명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내게 있어 어머니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분명 실제적 의미에서의 배고픔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결코 물질적 풍요만은 아니다. 강아지마냥 지대로 크던 시절과는 달리, 당신이 겪어내신 배곯는 슬픔을 자식들에게만큼은 감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야말로 전적인 헌신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신의 이름을 갖고 살지 못한 어머니의 삶, 그리고 그 삶에 대해 아무런 값도 요구 하지 않을 것이기에 오히려 우린 마음 한 구석 평생 빚을 지닌 채 살아가는 운명이 되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부채의 이자는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이다. 아, 어머니 당신 속엔 전보다 더 무시무시해진 적이 있습니다. 내게 있어 어머니는 기어코 넘어야 할 산인 동시에 품어야 할 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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