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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권두칼럼/장이지|문학의 빈곤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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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권두칼럼/장이지|문학의 빈곤에 부쳐
요즘 <꿈을 주다>라는 일본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와타야 리사綿矢りさ라는 작가의 소설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있는 책을 확인해 보니 2007년 번역판이다. 그리 오래 전 책은 아니다. 오래 전 읽었다고 생각한 것은, 그러니까 지금 그 줄거리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여자 아이돌 스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애인에 의해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면서 주인공이 불행해진다는 것 정도만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꿈을 주다’라는 말의 의미는 아직 뇌리에 남아 있다. 아이돌 스타라고 하는 것은 타인에게 ‘꿈을 주는 존재’라는 것,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꿈은 꾸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 아마도 ‘꿈을 주다’라는 제목의 의미일 것이다.
<꿈을 주다>라는 소설의 작품성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시비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꿈을 주다’라는 제목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신경이 쓰인다.
일본의 어느 사상가는 전후 일본의 이데올로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1945년부터 1970년까지를 ‘이상의 시대’, 1970년부터 1995년까지를 ‘허구의 시대’라고 하여 구분한 적이 있다. ‘이상의 시대’에는 아직 ‘거대 서사’가 기능을 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추구할 수 있었다면, ‘허구의 시대’에는 ‘거대 서사’의 힘이 급격히 약화되어 ‘픽션’만으로 통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에 이어 여러 학자들이 1995년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이것저것의 명명을 해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미국문학자인 기하라 요시히코木原善彦는 ‘현실의 시대’라는 명명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그저 현실 그 자체로 이해해버린다는 점이 그 명명의 근거이다.
일단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현실의 시대’라는 것을 인정하고 보면, 가령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이나 <도가니>(2009)와 같은 소설이 사회적으로 붐을 일으킨 현상도 조금 달리 보인다. 그 소설들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물론 영화화를 계기로 한 것이지만, 그들 영화가 성공한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하게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관객들은, 혹은 독자들은 그들 영화에, 그들 소설에 ‘사회학적’인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그 기대가 그들 작품들을 통해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데서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공지영 소설의 작품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영화에 대해서도 할 말이 별로 없다. 단지 그 ‘사회학’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 보고 싶다.
자크 랑시에르의 유행과 더불어 ‘문학과 정치’ 혹은 ‘문학에 있어서 정치적 상상력의 복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또 이러한 움직임을 1980년대 ‘시의 시대’와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논자들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조금 상황을 지켜보니 사실 ‘정치’라기보다도 ‘사회학’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문학가가 현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문학=정치’나 ‘문학=사회학’이라는 등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오히려 정치나 사회학을 전유하면서 독자들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문학이 문학의 꿈을 꾸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문학적 상상력의 빈곤 시대이다. 작가 측에서 보아도 그렇고, 독자 측에서 보아도 그렇다. 그것은 문학의 책임이라기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신적으로 빈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사회학이, 혹은 정치가, 혹은 윤리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개그맨 김구라 씨가 과거의 경솔한 발언으로 인해 방송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게 된 것도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김구라 씨의 발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매우 잘못된 발언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그러한 막말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양식을 문제 삼을 생각도 없다. 사실 선술집 같은 데서, 혹은 다른 작은 모임에서, 누구나 위정자에 대한 욕을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혹은 대학교 강의실에서 대학생들이 정치에 대해 비판하면서 격한 말을 쏟는 일도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1인 미디어 시대가 된 이후, 웹 공간에서 누군가에 대해 인신공격을 해 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문제가 없다, 당연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들에 경중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과거의 막말들이 시간의 침식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다. 웹에서 한 막말 때문에 대기업에도 취직할 수 없고, 공직에도 진출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자. 매우 극단적인 예지만, 섬뜩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뱉은 말이 평생 한 사람을 단죄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형평성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사람은 변한다. 과거에 잘못을 했더라도, 죗값을 치르고 반성하는 사람에게는 바른 삶을 살 기회를 주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김구라 씨 개인에 대해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의 연예인일 따름이고, 자기 영역에서 자기 방식으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가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은 ‘막말’ 때문이었다. 그의 막말이 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 것에는 분명히 정치·사회적인 질곡이 그 배경으로 있었을 것이다. 그 질곡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이번에는 대중이 그의 ‘막말’에 대해 윤리의 이름으로 죄를 물었다. 그러나 이제 누가 우리의 질곡에 대해 과장된 언사로 풍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물어야 할 때다. 이제 대통령이 정치를 못해도 선술집에서 대통령 욕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야당이 정신을 못 차린다고 조금 격한 표현을 써가면서 트위터에 글을 남기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는 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쳐 자기만의 식견을 길러야 하고, 양식 있는 표현만을 골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가 예전에 했던 말들을 우리도 잊어버리고 있던 데서 들추어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다. 매우 반문학적인 통제사회의 비전 아닌가? 민중들이 민중들만의 이야기를 민중들끼리 할 수 있는 공간, 우리가 스스로 방기하고 있는 것은 이 이야기의 공간, 문학의 공간이 아닌가 싶다.
100분 토론 방청객 인터뷰에서 반드시 옳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전문가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트위터에 교양 있어 보이려고 시를 올릴 필요는 없다. 유명 소설가 트위터 RT할 필요 없다. <도가니>를 안 읽었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장사를 쉴 수 없어서 국회의원 선거에 투표하지 못한 것이 죄는 아니다. 맞춤법 틀려도 무식한 사람 아니다. 뉴스 보도와 내 생각이 다르다고 내 생각을 감출 필요는 없다. 강정마을 문제는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 잘 아는 사람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강정마을 문제에 대해 누구나 다 이야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주장이 소위 ‘정치의 귀환’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현실의 시대’에는 현실의 시대에 걸맞은 문학이 있다. 나 스스로도 사회학에 가까운 것들을 써온 셈이다. 그러나 사회학이나 심리학에 근접해 가더라도, 문학이 여전히 독자들에게 꿈을 주었으면 좋겠다. ≪리토피아≫가 독자들에게 어떤 꿈을 줄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잘 말씀드릴 수 없다. ≪리토피아≫는 계속 변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이 독자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큰 믿음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 믿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아마 앞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이번 호를 열면서는 ‘문학의 꿈’에 대한 약속을 독자 여러분께 드리고 싶다.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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