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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특집/아랍 젊은 여성 3인의 소설/전철희|‘천막’과 ‘집’ 사이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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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특집/아랍 젊은 여성 3인의 소설
전철희
‘천막’과 ‘집’ 사이의 간극
마리암 알 사에디Mariam Al Saedi는 1974년에 태어나 현재 아부다비에 거주하고 있는 여성작가이다. 그녀의 작품 중 번역된 것으로는 「기름 오일」(<아랍 여성 단편소설선>, 글누림, 2012)이 유일하다. 이 지면에서 살펴볼 작품은 「노인네」이다. 아랍에서는 단편소설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원고지 20매 정도의 짧은 분량이기 때문에 우리의 개념에서는 콩트에 가까운 것이다. 짧은 분량에서 예상할 수 있듯 줄거리는 단순하다. ‘노인네’라 불리는 베두인족 여성이 있다. 그녀는 천막에 거주하고 양을 키우며 일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입신양명하며 사는 자식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체신을 위해 천막에 살던 어머니를 반강제적으로 ‘집’으로 데려온다. 불효자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평생 살아온 곳과 너무나 이질적인 공간에서 외로움과 추위를 느끼며 ‘노인네’는 죽어간다. 그녀가 죽자 자식들은 기다렸다는 듯 호화스러운 장례식을 치른다. 그리고 이 장례식 덕에 자식들의 사회적 위신과 체면은 그럭저럭 지켜지게 된다.
시니컬하고 군더더기 없는 서술이 눈에 띄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먼저 낯선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가족보다 양에게 애정을 느끼는 ‘노인네’의 삶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몇몇 설정을 제외하고 본다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서는 대단히 근대적이다. 단순히 ‘노인네’의 자식들이 사는 세태나 그들의 배금주의적 가치관 때문에만 하는 말이 아니다. 전통적 공간인 ‘천막’과 현대적 공간인 ‘집’을 대비시킨 작가의 사고가, 즉 현재에 대비되는 ‘전통’이 즉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구도 자체가 이미 근대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종종 아랍인들이 근대화의 수혜를 받지 못한 채, 전근대적인 이슬람 문화만을 향유하고 살아가는 양 착각하고 있지만, 「노인네」는 아랍 역시 ‘근대화’가 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름의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인네」는 한국 문학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귀환서사, 산업화 소설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다고도 할 수도 있다. 특히 이태준의 몇몇 작품들은 「노인네」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성공한 자식이 부모를 신경 쓰지 않으며 살다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장례식만 거창하게 치렀다는 설정은 「복덕방」이 선취하고 있으며, 자식과 부모로 상징되는 세대 간의 갈등 역시 「돌다리」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구도이다. 이 작품들을 썼을 당시에 이태준은 30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시선을 고집했다. 그런 시선은 30대의 젊음보다는 노년의 세계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해방 이후 미래에 대한 기대와 대책 없는 열정과 의지에 가득 찼을 때 이태준은 오히려 해방 이전보다 훨씬 ‘젊음’에 가까운 시각을 보여주게 된다. 그렇다면 해방 이전에 이태준이 발표한 작품들은, 해방기에 발표된 작품보다 훨씬 노후해 있었던 셈이다. 당시에 그를 조숙하게 것은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도 불허하는 ‘암흑기’라는 시대적 배경이었다. 이태준은 비록 일관되지는 않았을 수 있을지언정 그런 억압적인 체제에 저항하고자 노력했고, 그렇기 때문에 근대 질서의 반대편에 ‘전통적’인 공간을 상정하며 ‘노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갈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30대의 나이인 마리암 알 사에디에게 당시의 이태준과 같은 양태의 노인의 이야기를 회고적인 시각으로 풀어내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그녀가 살고 있는 아랍 에미리트UAE는 세계에서 6번째로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나라이다. 한국도 이 지역에 유전을 개발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전파를 타고 전해진 바 있다. 석유를 외국에 판매한다는 것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자원 시장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유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욕망이 아랍을 불안정하게 ‘근대화’시키는 와중에, 자국의 지배자들은 어떤 면에서 이슬람 문화의 ‘전통’을 교활하게 이용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고 있다. 이런 요인들이 착종되는 과정에서 ‘근대화’가 속물적인 배금주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천막’으로 표상되는 전통적 공간과 ‘집’으로 인유되는 근대적 공간의 대비는 이런 아랍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노인네」는 우리에게 이슬람 문화에서 여인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현재적 논점을 제공한다. 바야흐로 ‘다문화주의’라는 말이 시대적 담론이 되고, 이질적인 문화를 포용하자는 미덕이 설파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런 미덕도 아랍과 이슬람 문화에 대해서만큼은 통용되지 않는다. 2000년대에 서양 대학들이 이슬람 복장을 불허했던 사례를 떠올려보자. 당시에 많은 대학들은 이슬람권의 여학생들이 차도르나 히잡 등을 입지 못하게 했다. 표면적 이유는 그런 복장이 여성차별적인 이슬람 문화의 산물이고, 때문에 여학생들이 그런 문화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슬람 문화에 여성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이 있다는 전제는 대체로 사실이었기에, 이런 대학의 조치에는 정치적 좌우를 막론하고 꽤나 많은 이들이 찬성했다. 그러나 이슬람 출신의 학생들에게는 서양식의 복장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슬람 문화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억압적이라고 해도, 그 문화의 산물인 복장을 고집하는 행위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식이나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복장 불허 조치가 9.11과 이라크 전쟁 이후 기승을 펼치는 이슬람 혐오를 근저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이슬람 전통에 대한 이런 관점은 「노인네」를 독해할 때 유의미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집’에 사는 자식들의 배금주의적인 불효 행위는 아무래도 고까워 보인다. 그런데 ‘천막’에 살고 있는 ‘노인네’의 삶 역시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타인과의 소통을 할 기회가 그다지 없는 곳에서 고립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자존감을 확보하지 못한 채 한 평생을 지낸 그녀는 “얼굴은 신체 중 수치스러운 부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남편에게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채,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그런 여인”이었다. 여기에서 자신의 자아나 목표를 위해 살아가는 능동적인 삶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그녀의 삶을 따분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창구는 ‘양’과의 소통인데, 비판적으로 본다면 이 역시 유목을 여성들에게 맡긴 사회에서 생긴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노인네’의 삶을 우리가 천민적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작가 자신이 ‘노인네’의 삶을 어떻게 가치평가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그저 연민 섞인 눈빛으로 ‘노인네’의 삶을 담담히 서술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읽을 때는 이슬람 ‘전통’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이미 근대의 소용돌이가 충분히 휩쓸고 지나간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노인네」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된다. 세계적으로 열강들이 가장 탐내면서 각종 부정적인 인상을 덮어씌우고 있는 이슬람 지역과, 어느 정도는 폭력적인 구시대적 문화가 잔존한 아랍 지역의 ‘전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는 사실은 아마 우리가 유럽이나 북미가 아닌 다른 나라의 문학을 읽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노인네」는 절묘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천막’의 세계와 ‘집’의 세계가, 즉 전근대적 공간과 근대적 공간이 공존한다. 그러나 이 공존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노인네」의 교훈은 아랍지역에 ‘천막’과 ‘집’이 상존하고 있을 뿐, 그 사이의 어떤 완충지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천막’에서 ‘노인네’와 같은 삶을 살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자식들과 같은 삶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지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 두 가지가 아닌 어떤 양태의 삶도 허용되지 않는다. 둘 다 폭력적인 이데올로기 체제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이런 구도를 통해 「노인네」는 사회에서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선택지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아랍민중들의 처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비록 지금은 과도기적 상황이지만, 아랍에서도 근대화는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랍만의 특징을 가진 새로운 종류의 근대 자본주의가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우리는 종종 전근대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흡수하는 근대사회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가진다. 동양에는 ‘동양적’인 특색을 가진 자본주의가 가능하고, 인도나 중동에는 그 나라 고유의 전통들을 발전시킨 새로운 종류의 근대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런 환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한국식 민주주의’나 ‘우리식 사회주의’ 식의 레토릭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떠올려보는 것으로 족하다. 결국에는 아랍도 유럽이나 아시아가 그랬듯 균질화 된 사회로 나아갈 공산이 크다. 그렇게 본다면 「노인네」는 ‘천막’에서 ‘집’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근대화’를 표현한 알레고리로 읽혀질 수도 있다. ‘천막’이 ‘집’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결코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집’에 사는 자식들은 ‘천막’에 사는 자신의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사회적 질서에 편승하고, 그 과정에서 ‘노인네’는 조금씩 죽어간다. 이런 서사 구조는 근대화가 전근대적인 것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축자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모든 체제 변동에는 폭력이, 마르크스의 말을 따르자면 ‘본원적 축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더욱이 아랍은 풍부한 석유 매장량 때문에라도 평화적인 근대화를 이루기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들의 근대화는 세계적인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제국주의적 질서의 재편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과정이 없이 평화적으로 평화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라는 환상은, 자본주의가 발전됨에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분배될 수 있는 전체 파이가 커지고 부의 재분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리라는 생각만큼이나 허구이다. 세계체제의 억압 속에서 기만적인 지배자들의 통치가 수반되는 과정은 아랍을 우리가 사는 사회와 다름없는 또 하나의 자본주의 근대국가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런 단언은 일방적인 면이 있다. 카다피 정권에 맞서 싸운 리비아 민중들이 보여주었듯 아랍지역은 세계적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항쟁의 결말에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외세의 손을 빌리게 되었지만, 이 지역 자체에 점증하는 억압에 비례하여 저항의 불꽃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저항은 전근대적 공간인 ‘천막’과 천민 자본주의적 공간인 ‘집’ 사이에서의 선택을 강요하는 체제에 대한 반항이하고 해도 좋지 않을까. 「노인네」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세계체제 속에서 ‘천막’과 ‘집’의 세계가 공존하는 아랍의 실상을 보여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작품이다.
전철희∙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제8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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