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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특집/아랍 젊은 여성 3인의 소설/라니아 마문|일 년 열세 달 동안의 해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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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729회 작성일 12-11-0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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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특집/아랍 젊은 여성 3인의 소설

 

라니아 마문

 

일 년 열세 달 동안의 해돋이

 

 

숫자 13은 재수 없는 숫자가 아니다. 에티오피아 달력에는 특이하게도 열세 달이 있는데 숫자 13은 바로 에티오피아 달력에 있는 달의 수와 같다. 하지만 지금 에티오피아 달력의 특이함에 관해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짜증이 무척 많이 나 있었을 때였다. 전날 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고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처음엔 그가 수단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남자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 별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수단 사람들을 보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단 사람은 수단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그가 영어로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그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묻지 않았었다. 아마 내가 바빠서였을 것이다.

짜증나게 했던 컴퓨터 문제가 해결이 돼 마음이 좀 편해졌다. 옆에서 그가 플로피 디스크에 대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쓰지 말았어야 했어!”

“씨디나 플래시 디스크를 써야 해요. 훨씬 안정적이거든요.”

내가 말했다.

“절대로 플로피 디스크를 믿어선 안 돼요.”

“맞아요! 다시는 쓰지 않아야겠어요.”

“그 디스크에 파일 백업 복사본이 들어 있어요?”

“단지 원본 파일만 있어요. 편집 작업을 하려던 참이었거든요.”

“에리트레아 분이세요? 아님 에티오피아 분이세요?”

그에게 물었다.

“에티오피아 사람입니다!”

그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가 다른 나라라는 것을 몰랐었다. 게다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에리트레아라는 나라와 그 나라의 수도인 아스마라를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와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보다 왜 더 마음에 들어 했는지를 몰랐었다. 내 생각으로는 에리트레아와 아스마라의 발음 소리가 더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나는 두 나라를 다 좋아하고 아비시니아 지역 출신 사람들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왔다. 우리 가족은 아비시니아인 학교 근처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우리 가족에게는 ‘아비시니아 사람’이란 말은 수단에서 살고 있거나 수단으로 피신하는 에티오피아 혹은 에리트레아 출신 난민 둘 다를 함께 부르는 포괄적인 표현이었다.

어렸을 때는 독립 건물을 가진 작은 학교에서 문화와 사교행사가 열리곤 했었다. 건물 앞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젊은 남자들은 이곳을 축구장으로 썼다. 이 체육 ‘시설’의 한 구석은 여러 채의 집들과 맞붙어 있었다. 이 집들은 조그마한 정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철조망과 골풀 덩굴 울타리로 학교 땅과 경계를 짓고 있었다. 이 공터에서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축제를 열곤 했었다. 그들은 먼저 엄청나게 큰 천막을 치고 그 아래에 무대를 설치했다. 그 다음 무대 주위에 수많은 의자를 놓았다.

나는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그들 고유의 춤사위를 구경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춤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손에는 입구에서 그들이 나눠준 튀긴 콩을 한 움큼 쥐고, 입을 헤벌리고는, 무용수들의 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공연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춤에 빠져 있곤 했었다. 흰 드레스를 잘 차려입은 에티오피아 여인들은 무척 아름다웠다.

암하라 말로 부르는 노래와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노래의 곡조, 음정과 춤사위, 그리고 무대에서 발산되는 열기와 환호하는 관객들의 분위기에 압도되곤 했다. 그 곳은 축제 내내 생명력이 요동치는 장소로 탈바꿈했고 그 근처 주민들이나 나 같은 아이들이나 신명이 났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때야말로 아이들이 술래잡기 놀이를 하면서, 쏜살같이 뛰어 텐트 속을 들락날락하거나, 큰소리로 떠들면서 놀거나, 의자 먼저 차지하기 같은 놀이를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기회였다. 또한 이때가 아이들이 어른들의 엄한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아이들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저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좋아해요.”

그에게 말했다.

“에티오피아 사람과 수단 사람들은 생김새가 비슷하지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두 나라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유대가 생겨난 것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고, 우리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입는 옷과 비슷한 옷을 입고 계시네요.”

그때 나는 손베틀로 짠 이바 윗도리와 이것과 함께 입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흰색이었고 고동색 자수 무늬가 들어가 있었고, 양 옆 선에는 빨간 색줄 세 개가 세로로 나 있어서 마치 군복처럼 보였다. 바지를 만든 사람이 군복처럼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빨간 색줄을 넣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그 날 입고 있던 바로 그 이바 의상이 그 남자의 시선을 끌었고 결국 내게 말을 걸게까지 되었다. 어쨌든 이바 의상 때문에 고향생각이 났던 게 분명했다.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국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즉, 그것이 사람이든, 언어든, 나라의 대표 건물이든, 혹은 허접스러운 것이든, 그저 고국과 관련된 것들을 보면 향수병에 걸리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이런 것들을 타향살이를 할 때 보는 것과 고향에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그와 나는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리가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때였다. 그는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설명은 생략한 채 자신은 남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지 못해서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자신을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고, 나는 그를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에티오피아를 보여주는 일종의 창으로 생각했다. 그를 통해 에티오피아를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나를 라야나(앞의 철자 r의 발음을 제대로 굴리지 못하며)라고 나는 그 남자를 키다네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에티오피아에서 키다네라는 이름은 여자에게 사용하는 이름이라고 했다.

“마지막 철자가 a로 끝나는 것만 다를 뿐, 그 이름은 여기서도 여자 이름이에요.”

내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에티오피아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나의 질문은 에티오피아의 음식에서부터 시작해서 에티오피아의 정치상황, 식민통치를 했던 이탈리아가 임의로 설정한 국경 때문에 생긴 에리트레아와의 국경 갈등, 이탈리아 식민통치가 남겨놓은 식민유산, 소수 민족들에게 가해지는 분리정책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그는 에리트레아 사람들이 에티오피아의 통화인 비르를 대체할 자기 나라만의 고유 통화를 원했을 때 멜레스 제나위가 에리트레아 사람들을 기만했던 일에 관해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제나위는 단지 비르 통화의 디자인만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는 크건 작건 수단의 모든 것들을 늘 고국의 것들과 비교하였다. 한 번은 내게 말하길 자신은 수단 여자와 친구가 되어 같이 앉아 차나 소다를 마시거나, 아니면 에티오피아에서 마시던 술을 연상시키는 그 특유의 갈색 아랍 주스를 마시면서 함께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리라고는 상당도 못했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었다. 그에게 말했다.

“자, 지금 그런 일이 막 일어나고 있다고 어서 가서 사람들에게 전하세요.”

며칠 후, 그는 가족이나 친구 아니면 그 누가 되었든 수단이라는 나라와 수단 여자, 수단의 풍습과 전통, 그리고 수단의 이슬람 문화에 관해서 물어보면 그에 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답장을 해주고 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한 통 내게 보냈다.

어느 날, 그가 수단 음악 테이프를 사고 싶다고 해서 함께 아딜 스튜디오로 갔다. 거기서 나는 수단에서 제일 유명한 가수들이 부른 노래 테이프를 골라주었다. 또한 하피즈 아브두라만의 플루트 연주곡인 ‘잊을 수 없는 나날들’이란 앨범을 골라주었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제 생각이 나겠죠?”

“그러면 저는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에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늘 당신을 생각할게요.”

그가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저를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 거니까요.”

“아니에요. 전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물론 저만의 방식으로지만요.”

“저 역시 제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요.”

어느 휴일날 우리는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열두 살 먹은 모하메드가 일을 하는 척 하면서 가까이에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날 모하메드가 물었다.

“그 아저씨 수단사람 맞아요?”

“응!”

“근데 왜 아랍 말을 못해요? 미국에서 살다 왔어요?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살다 왔어요?”

모하메드의 질문에 나는 그저 막연히 미소만 지어 보였다. 나중에 이 질문을 키다네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 역시 미소만 지었다.

“그 아저씨는 에티오피아 분이란다.”

모하메드에게 말했다.

“아비시니아 사람이라고요?”

“그래, 아비시니아 사람이야.”

대답했다.

“그럼 아줌마는요? 아줌마도 아비시니아 사람이에요?”

이 질문이 나를 또 다시 미소 짓게 했다.

“우리 엄마가 아비시니아 사람이야.”

“그럼 그 아저씨는 아줌마의 친척이세요?”

“그래, 우린 사촌 간이지.”

그러자 모하메드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영어 실력이라고 해야 겨우 단어 열 개를 아는 정도밖에는 안 되었지만. 키다네는 모하메드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관심과 영어로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이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내가 그 카페에 갈 때마다 모하메드는 언제나 키다네의 안부를 물었다. 나중 키다네가 나와 사촌 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나서부터는 모하메드의 질문은 ‘두 분이 처음에 어떻게 사귀게 되었어요?’로 바뀌었다.

내 영어가 수단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을 부르는 말인 ‘존의 자식들’만큼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둘 사이의 감정이입 덕분에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한 문장을 말하면 그 문장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려던 말을 난 이미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 내 영어가 틀려도 그는 내 말을 교정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창피해 하지 않아도 됐다.

이 당시 키다네는 나일강의 분지에 관해서 석사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나일강의 강물과 관련된 데이터가 필요했었다. 이런 데이터는 수단이나 이집트 둘 중의 한 곳에서만 구할 수 있었는데 키다네는 수단을 선택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모으고 있는 데이터는 아프리카 최대의 농업사업인 게지라 농업사업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바라카트에 있는 사업본부를 방문하거나, 혹은 훌와나 비카 마을의 농부들이나 알하사히사 시의 농부들을 직접 찾아가거나, 아니면 와드 메다니에 위치한 농업연구센터를 방문해야 했다.

“에티오피아 사람과 수단 사람들은 같은 물을 마시고 살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맞아요. 그런 사실 때문에 우리 두 나라는 형제국가가 되었지요.”

내가 대답했다.

수단의 마드니와 얀부를 관통하는 청 나일강은 에티오피아의 타나 호수에서 발원한다. 두 나라가 형제국가가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반대로 백 나일강은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청 나일강과 크지만 온화한 모습의 백 나일강, 이 두 강은 카르토움에 있는 알모그란에서 합류하면서 숨을 멎게 하는 기막힌 장관을 연출한다. 합쳐진 두 강은 이후 대 나일강이 돼 이집트를 관통한 후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중해로 흘러간다.

내가 차를 주문할 때마다 그는 차가 암하라 말로는 ‘샤이’라고 하고 티그레 말로는 ‘샤히’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암하라 말과 티그레 말 두 언어를 다 하는데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티그레 사람이고 어머니는 암하라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에티오피아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한 부족과 소수민족들의 이름을 내게 알려주었다. 남녀 모두 다 잘 생긴 것으로 유명한 이슬람교를 믿는 하라리 부족은 아직도 고대도시들처럼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살고 있고, 아파르 부족, 오움로우 부족, 사몰리 부족, 그리고 남부 지역에는 아누악 부족, 딩카 부족이 살고 있는 데 이들 중 일부가 수단의 남쪽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어렸을 때 한 친구가 자기 친척 중 한 명이 에티오피아에서 왔는데 그 친척이 에티오피아에는 일 년이 열두 달이 아니라 열세 달이라고 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키다네와 함께 인터넷에서 에티오피아에 관한 정보를 찾고 있다가 이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키다네에게 물어봤었다.

그가 말했다.

“에티오피아 달력에는 모든 달이 다 삼십일로만 돼있어서 삼십일 일이 들어가는 달의 서른한 번째 날을 전부 따로 모아다가 열세 번째 달을 별도로 만들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달을 파구멘이라고 부르지요. 따라서 매 사년마다 오일 혹은 육일로 구성된 달이 생겨나지요. ‘그런데 혹,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일주일보다 짧은 달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궁금해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바로 경이로움 그 자체인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에요.”

“이 세상에서 에티오피아와 같은 달력을 쓰는 나라는 한 곳도 없지요. 일 년에 한 달이 더 있는 나라는 없지요.”

그가 한 이 말이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내 친한 친구들에게 묻곤 했다.

“너희들 에티오피아는 일 년에 열세 달이 있다는 것 알고 있니?”

라고.

“이 자리 괜찮아요?”

언젠가 카페에서 어디에 앉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을 때 그가 물었었다.

“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누구와 앉느냐지요. 사람에 따라서 그 자리가 에덴동산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럼 나하고 앉아 있으니 이 자리가 에덴동산이네요.”

이 말 때문에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나와 함께 있으면 마치 고향에 있는 것처럼 편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내가 조금이나마 타향살이의 슬픔을 줄여주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카페를 나서려고 돌아서는 그를 보자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손이 내 심장에서 무엇인가를 짜내려는 듯 내 심장을 꽉 쥐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양 옆으로 어린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넓은 들판에 친구와 둘이 서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넓은 공간에 있으면 상상력도 커지지”

그와 만났던 마지막 날 저녁에 나도 그를 다르게 상상했던 걸까?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이었었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었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내 감정이 달랐었기 때문이다. ‘안녕’이라고 말하기 전에, 아마도 영원토록 ‘잘 지내세요.’, ‘연락 할게요.’, 그리고 ‘저를 잊지 마세요.’와 같은 이별의 인사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온갖 고통스러운 감정이 슬픔과 합세하여 나를 휘감았었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언제 다른 곳에서라도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름이 키다네 키로스인데.”

 

라니아 마문Rania Mamoun소설가. 1979년 수단에서 태어났다. 2006년에 장편소설을 출간하였고, 2009년에는 단편집을 낸 바 있다. 현재 수단 텔레비전 문화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고, 수단 문학잡지의 편집자이다. 그녀의 많은 단편소설들이 영어, 불어 그리고 덴마아크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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