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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특집/아랍 젊은 여성 3인의 소설/이강진|남겨진 날들의 해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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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266회 작성일 12-11-0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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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특집/아랍 젊은 여성 3인의 소설

 

이강진

 

남겨진 날들의 해돋이

 

 

1.

「일 년 열세 달 동안의 해돋이」라니, 조금 엉뚱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이 제목을 본 순간 어릴 적 읽었던 에리히 캐스트너의 「5월 35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없는 것이라 여겼던 “5월 35일”이 가져다준 마법같은 여행처럼, 이 달력에 그려져 있지 않는 “열세 달” 또한 어떤 환상적인 풍경을 내 앞에 펼쳐놓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이 소설에 등장한 열세 번째 달이란 환상 속을 달리는 시간 따위가 아니었다. 소설은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에티오피아 달력에는 특이하게도 열세 달이 있는데 숫자 13은 바로 에티오피아 달력에 있는 달의 수와 같다”고 써내려간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는 듯한 저 말투. 하지만 일부러 그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써내려간 문장이 오히려 읽는 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언뜻 생각하기에 이 첫머리에 언급된 “숫자 13”은 이 소설에서 이야기 전개의 아주 중요한 매개물인 동시에, 무언가 애틋한 이미지를 지니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비중있는 상징물이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숫자는, 제가 가진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스러진다. 다만 작은 흔적을 남겨둔 채. 그렇다. 이 소설은 지금 이 곳에 없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 그러니까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 남겨지고 말았던 많은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2.

우리가 만들어가는 모든 관계는 타동사적이다. 반대로 나의 존재는 어떤 지향성이나 관계도 없기에,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이다. 이러한 존재의 역설로부터 우리는 고독이란 우리가 스스로 고립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외로움은 흔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관계의 단절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그렇다면 이 고독을 극복할 수 있을 사랑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가리켜 두 사람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서로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숭고한 감정의 발현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를테면, 사랑이야말로 서로가 서로를 온전한 타동사로 받아들이는 이상적인 관계의 형태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사랑, 성, 언어를 연구하는 데 반세기를 바친 뒤, 1960년대 후반에 라캉은 이러한 기대를 온전히 배반하며, 그를 널리 알려지게 했던 폭탄 같은 표현들 중의 하나를 내놓았다.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al라는 선언이 그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분석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만한 심리학적 분석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라캉은 오히려 “성차의 ‘파트너’들은 대칭적이지도 겹치지도 않는다”고 말하며 확고하게 사랑에 대한 저 환상들을 거절한다.

그는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설명은 생략한 채 자신은 남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지 못해서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자신을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고, 나는 그를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에티오피아를 보여주는 일종의 창窓으로 생각했다. 그를 통해 에티오피아를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일 년 열세 달 동안의 해돋이」에서 라야나와 키다네의 관계는 “성적 관계란 없다”는 라캉의 명제를 전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사랑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자동사적인 개인의 고독을 메우려는 타동사적 희구의 발현이라고 할 때, 우리는 키다네에게 있어 라야나의 존재란 이미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 되어 자리잡고 있음을 금세 눈치 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라캉은 이것을 ‘쾌락’이라 쓰고 있다)의 기표에 의해 온전히 규정되는 데 반해, 라야나의 경우 그것은 “에티오피아”라는 대체적 기표에 의해 부분적으로 규정되는 데 그칠 뿐이며 전적으로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여자들은 남근적 향유와 다른 향유를 모두 경험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남자에게 사랑의 기표가 전부인 반면, 여자에게 그것은 오로지 여러 가지의 선택적 가능성들 중 하나일 뿐인 셈이다. 그렇기에 키다네가 “에티오피아의 음식에서부터 시작해서 에티오피아의 정치상황, 식민통치를 했던 이탈리아가 임의로 설정한 국경 때문에 생긴 에리트레아와의 국경 갈등, 이탈리아 식민통치가 남겨놓은 식민유산, 소수 민족들에게 가해지는 분리정책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장면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그는 (상대방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한에서)자신의 내면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발화의 양식을 채택하고 있었던 반면에, 라야나는 그것을 에티오피아라는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 정도로 여기고 마는 까닭이다. 때문에 그녀의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키다네가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에서 살아오면서 만들어왔을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멜레스 제나위가 에리트레아 사람들을 기만했던 일”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일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듯 여겨지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만 같은 이 아슬아슬한 대화의 양식은, 우리로 하여금 라캉이 성적 관계의 공식을 “sin²x+cos²x=1”이라고 표현한 인상적인 도식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이 도식에 나타나는 두 개의 그래프는 그 위치가 다를 뿐, 정확히 같은 모양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무한하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결코 둘은 서로 만날 수 없다. 한 곡선이 약간의 평행이동을 허락한다면 두 그래프가 온전한 합일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라캉의 표현을 하나 빌자면, 그럴 가능성이란 “그렇기는커녕”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제 생각이 나겠죠?”

“그러면 저는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에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늘 당신을 생각할 게요.”

그가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저를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 거니까요.”

“아니에요. 전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물론 저만의 방식으로지만요.”

“저 역시 제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요.”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저만의 방식으로”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발화된 기표에게 훌륭한 우회로를 제공해준다. 라야나와 키다네는 “사랑하고 있”다는 기표를 공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랑’이라는 중핵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미묘한 미끄러지기의 방법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나는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저 수많은 사랑의 행위들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저들 모두를 거짓된 우회로 보아 마땅하다는 말인가?

3.

그가 말했다.

“에티오피아 달력에는 모든 달이 다 삼십일로만 돼 있어서 삼십일 일이 들어가는 달의 서른한 번째 날을 전부 따로 모아다가 열세 번째 달을 별도로 만들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달을 파구멘이라고 부르지요. 따라서 매 사년 마다 오일 혹은 육일로 구성된 달이 생겨나지요. ‘그런데 혹,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일주일 보다 짧은 달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궁금해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바로 경이로움 그 자체인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에요.”

그러니 이쯤에서, 나는 ‘남겨진 어떤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야만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모든 것들을 질서정연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마련이다. “모든 달이 다 삼십일로만 돼 있”는 에티오피아의 달력은 그런 획일화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랑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적 관계란 없다”는 라캉의 언명은 어디까지나 남자와 여자가 자신의 자기동일성의 현상유지를 포기하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기능할 수 있는 듯 보인다. 바꿔 말하자면, 나와 당신이 이 자기동일성에 대한 욕망을 일정 부분 유예하거나 포기할 수 있다면, 사랑이야말로 가장 쉽게 성취될 수 있는 나와 타인의 이상적 관계맺음으로 자리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보의 행위는 바로 “서른한 번째 날”이라는 잔여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획일화된 완결성을 위해 배제했던 어떤 것들, 그 억압된 것들을 귀환시키는 것. 따라서 “서른한 번째 날을 전부 따로 모아다가 열세 번째 달을 별도로 만”드는 “파구멘”이란, 내가 ‘나’라는 자기동일성을 넘어설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에 대한 특별한 은유인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 속에서 키다네는 이것을 가리켜 “에티오피아라는 나라”만의 독특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서 “경이로움 그 자체”인 사랑의 힘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라캉이 강조했듯이 우리는 결코 서로에게 온전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로 그 대신에, 우리들 각자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타인들에게 자신의 “서른한 번째 날”을 새겨놓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모여 만들어진 “열세 번째 달”이야말로 “경이로”운 사랑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카페를 나서려고 돌아서는 그를 보자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손이 내 심장에서 무엇인가를 짜내려는 듯 내 심장을 꽉 쥐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될 때는 언제인가. 아마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대상이 자신에게서 떠나버리고 난 뒤가 될 것이다. 타동사적인 관계의 소멸이 나의 자동사적인 순환에 어떠한 오류를 일으킬 때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내게 그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특별했는가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다네가 떠나고 나서야, 라야나는 그가 그녀에게 있어 단순히 “에티오피아”를 사랑하는 한 “아비니시아 사람” 이상의 의미였음을 사무치게 깨닫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녀는 자신이 궁금해해왔던 것들을 충족하기 위해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지만, 사실 그 관계 속에서 정말로 그녀의 가슴 속에 들어온 것은 키다네의 무수한 “서른한 번째 날”이었던 것이다. 처음 키다네를 만났을 당시 “그가 영어로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그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묻지 않았었다”던 그녀의 태도는 온전히 그녀 자신의 원 안에 갇힌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이었었다”고 느끼게 된 그 순간, 라야나는 그가 뿌려놓은 무수한 잔여들이 자기의 흐름을 얼마만큼 다르게 만들었는가를 비로소 깨닫는다. 특별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소리 없이 남겨진 것들이야말로 그녀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가능케 했다. 바로 이 전회, 스쳐지나가고 말았던 작디작은 것들이야말로 사랑의 아름다움이자 위대함을 이룬다는 숭고한 역설. 별다른 ‘소설적인’ 사건도 없이 지극히 잔잔하게 흘러간 「일 년 열세 달 동안의 해돋이」가 우리에게 말하려던 것은, 바로 이 남겨진 날들의 열세 번째 해돋이야말로 사랑의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는 어떤 희망이 아니었을지.

 

 

이강진∙1988생. 2012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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