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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특집/아랍 젊은 여성 3인의 소설/유승호|진정으로 타자가 되었을 때 마주 할 가능한 변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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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특집/아랍 젊은 여성 3인의 소설
유승호
진정으로 타자가 되었을 때 마주 할 가능한 변화들
1.
인간 상호간의 공존과 공감의 공통 영역을 만드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후자마 하바이에브는 자문한다. “과연 우리가 타자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자로 하여금 우리에게 오도록 해야 하는 것인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용인하고 따르고 있는 주류 질서는 특별하고 독특하여 약분 불가능한 개별적인 존재의 특이한 개성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완전한 타자들끼리 “이해 가능한 세계관”을 형성해서 공존의 지혜를 구성하는 일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부에서건 공동체를 넘어 국제적인 연대에서 도모되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경험이며 친근한 풍경이란 이유만으로 타인의 유별나고 하물며 무례하게 보이기까지 한 행위를 별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곧이어 스스로의 넓은 관용과 사려 깊음에 짐짓 고양되어 우습게도 감탄하기까지 한다.
반면 자신에겐 너무도 생소한 체험이고 낯선 광경이나 타인에게는 자연스럽다 못해 오히려 관례적이기까지 한 행동에 지나칠 정도의 과민함과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소심하다 못해 편협한 인식의 한계를 주저함 없이 섬세함과 예민한 감각으로 포장해선 합리화하곤 안도한다.
이처럼 본인이 보고 듣고 느끼고 싶은 것만을 선별하여 선택한 한계치가 명백한 공감 영역이 우습게도 자신을 포함하여 일반에게 용인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미덕이나 윤리적 감각으로 둔갑되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현실 세계에서 타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은 결코 수평적이며 사심 없는 순수한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분히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며 속내를 실질적으로 관철시키는 힘 또한 위계가 분명하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현실 세계에서 각자에게 내면화된 규율로 작용하는 현실적인 공감 능력은 다분히 형식적으로만 보장된 자발성에 머물고 말 공산이 크다. 말하자면 “타자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받아들이라고” 강제적으로 “요청”하거나 지극히 형식적인 방식으로 ‘상대성’을 인정하는 선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인정’과 ‘공감’을 가장한 ‘방치’나 ‘방관’, 왜곡된 전유에 가깝다.
물론 질서는 상투적이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하며 특정의 누군가에게 편중된 권리 장전마저도 ‘선택 받은’ 모두가 동의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홍보하겠지만 말이다. 인류가 고안해 놓은 권리 장전의 원리가 이미 열외를 사전에 전제하고 있는 한 몫이 인정되지 않는 이들, 상상된 ‘모두’에서 누락된 이들의 욕망과 요구, 권리는 탐욕과 혐오스럽고 불결한 병적 이상 징후로 치부되거나 기괴한 괴물의 형상으로만 감지될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럴 듯하게 포장해 놓은 21세기 근대화되고 문명화된 ‘모두의 지도’에서 여전히 척결의 대상으로서 혹은 격리시켜 관리하고 배제시켜야 하는 ‘누락인종’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류가 규정하고 있는 다양한 관계의 목록을 관통하는 공통된 기준선은 그것이 세대, 계급, 젠더, 문명 등과 같이 다양한 입장에 선 듯 보이더라도 이들 열외 인종들에 대한 일종의 ‘잔혹사’로 봐도 무방할지 모른다. 지구인 일반인들의 암묵적인 동의와 연루 속에 지금, 여기 ‘평평한 지구’라는 슬로건 하 지구촌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리얼한 잔혹극 말이다.
2.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어지는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쿠웨이트에서 출생하여 현재는 요르단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작가 ‘후자마 하바이에브’의 아주 짧지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단편에 시선이 머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편소설’掌篇小說로서 「내인생 최고의 밤」은 인류가 고안한 가장(정)된 보편 질서가 ‘영원한 타자’로서 너무나 뻔뻔한 무관심과 몰이해 속에서 방치하고 제외시킨 ‘열외 인종’과 ‘누락 인류’의 상징적 이미지로서 ‘이슬람 문화권’에 사는 ‘노인’들의 삶들을 다루고 있다. 자칫 소재나 주제가 함의한 진중함으로 인해 이야기가 형상화하고 있는 삶의 실체보다는 주제의 추상적인 관념 자체가 부각될 수도 있는 점을 작가는 ‘장편’掌篇이란 장르 특성을 십분 활용함으로써 절묘하게 넘어서고 있다. 반면 짧은 분량의 한계 상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반전을 가미한 구성의 절묘한 배치는 행간의 여백을 독자들이 스스로의 상상력을 작동하여 채우기에 충분할 만큼 강한 여운을 만들어 낸다. 더불어 세심하게 선택된 유머 있는 필치는 이들 ‘몫이 없는 자’들의 소소한 일상을 예외적 존재로서의 특별한 삶으로 치장하기보다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다분히 세속적인 차원으로 볼 수도 있는 경지까지 끌어내림으로써 충분하게 현실감 있는 형상화로 이끈다. 즉 누구에게나 가능한 보편적인 정서로서 ‘사랑’이란 감정에 초점이 맞춰짐으로써 본인들의 의지와 선택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사랑담’의 주인공에서 추방되었던 ‘노인들’이 “또 다른 봄”을 준비하며 ‘회춘’하는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채석장에서 힘깨나” 쓸 수 있던 시절같이 육체적 자산이 온전했을 때 세상으로부터 그나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며 미흡하나마 소위 품위 있는 삶이 가능했던 노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요르단의 작은 도시 알-루이세파에 살고 있는 일흔 살의 쇼카트와 그의 친구들의 삶은 생물학적 연한의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다. 젊은 자식 세대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홀대 받으며 품위는 고사하고 옹색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삶을 유지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다. “노인들의 대화는 오로지” ‘건강’ 하나에만 집중될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오로지 자신이 처한 현재 처지를 이해하고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의 삶을 “공매에 붙”이듯 “무의식적으로 누가 더 불쌍하고 아프며 노쇠한지를 두고 서로 경쟁”하듯 푸념을 늘어놓거나 더 이상 자신들의 삶과 존재 가치에 대해 존중과 경의를 표하지 않는 젊은 자식 세대와 세상을 향해 거듭해서 욕이나 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이 정도의 야단법석을 반복해야만 그나마 자식들한테 다분히 의례적이고 형식적일 뿐이지만 “건강이 어떤지 등에 관한 안부인사”정도의 답례를 기대할 수 있다. 가까운 피붙이의 처사마저 이 정도인데 하물며 세상으로부터의 존중을 바란다는 것은 망상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의사는 그에게 다행히도 신의 가호로 그의 몸이 시계태엽처럼 잘 작동하고 있다고 전하며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골동품 시계처럼 유리는 긁히고 희미하고 손목밴드는 낡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시간에 맞게 잘 가니까 시계는 시계지요.”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은 쇼카트 씨에게 젊은 의사가 위로랍시고 내뱉은 말 속에는 주인공이 딛고 있는 세상이 그를 위시해 노인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삐걱거리지만 완전하게 멈추지 않은 신체적 기능이라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덧붙여 거동도 힘든 주위의 다른 노인들을 보며 위안하라는 의사의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골동품의 가치는 애초에 그 물건이 지녔던 기능적 작동 여부의 유무보다 ‘긁히고’, ‘낡’은 정도의 차이, 바로 세월의 연륜에 좌우 된다는 데 있다. 하찮은 기계조차 응당 생물학적인 연한 이상의 세월의 깊이를 인정받는 데 비해 정말로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그가 받는 처우와 배려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노인들이 생물학적 기능 저하에 상응하는 만큼의 다양한 인생 경험을 통해 단순하게 달콤하고 편한 삶의 온기뿐만이 아니라 ‘쓰고 불편한’ 삶의 냉기마저도 견디고 음미할 수 있는 소위 ‘인생의 경륜’, 삶의 참된 경험으로서의 ‘연륜’을 지녔다는 것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영화의 제목처럼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대체 가능한 기계 이하의 인력일 뿐이다.
쇼카트는 자신의 삶이 “허구한 날 인력이 바뀌고 전문 기술과 특수 장비가 턱없이 부족한 공립 병원”같은 곳에 다달아 있음을 인지한다. 오히려 이런 현실에 친구들과 부화뇌동하여 이유 있는 항변이라 할지라도 비루하기 짝이 없는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것 자체 또한 최소한이나마 삶의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으론 적절치 않음을 깨닫는다. 주위의 인정과는 관계없이 “고독, 우울, 권태, 은둔을 느끼면서 집에 홀로 있는 편”이 오히려 수세적이지만 궁색하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터득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언제든지 기꺼이 그의 존재를 편견 없이 알아봐 주면서 “문을 두드리며 찾아 올” 누군가를 맞이할 기대감 또한 없지 않다. 그것을 대비해서 삶의 경륜에 값하는 달콤한 “캔디로 가득”한 주머니마냥 삶의 한켠을 내어 놓고 기다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짜증이나 날선 비난을 퍼 붙는 따위보다 너그러운 공처가처럼 아내의 냉대를 감내하고 용서하는 마음가짐이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연륜의 표현임을 알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이러한 노년의 일상에 잔잔하지만 강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리멸렬하고 따분했던 여름 한낮의 길고 긴 잔인한 시간을 무사히 버티고 자신의 집 마당에서 “재스민과 라벤더 향이 뒤섞인 시원한 산들바람”과 벗하며 “거리의 고요함”과 스스로의 고독을 음미하던 쇼카트 씨는 우연하게 옆집에 사는 중년의 여인 바쌈 부인과 마주친다.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사람 중 현재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이는 쇼카트 씨만이다. 거추장스럽기만 한 차도르를 걷어내고 “점잖기는 했지만 하얀 면 잠옷”만을 걸친 그녀는 낮에 익히 알고 있던 바쌈 부인이 아니었다. 친척이건 이웃이건 아랑 곳 하지 않고 매일같이 시비를 걸어대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속한 언쟁도 불사하는 전형적인 제 3의 성으로서 “고정된 변함없는” 아줌마의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표면적으로 달빛과 가로등 빛이 쏟아져 내리는 여름밤의 묘한 분위기와 정취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출한 모습임에 분명하지만 ‘잔인한’ 한낮의 강렬한 태양빛으로 상징되는 일상의 가부장적 질서가 지워버리고 허용하지 않았던 그녀의 본 모습을 묘사한 대목으로 읽을 수도 있는 장면이다. 일상의 대부분을 세상과 악다구니를 하며 보내는 낮의 바쌈 부인의 모습은 제한적이지만 온전하게 자신의 본성을 지키고 한낮의 강한 열기를 견뎌낼 수 있는 의도된 선택이다. 그만큼 힘겹게 견디면서 지켜낸 그녀의 맨 얼굴이기에 월광으로 표상되는 자연의 순리에 힘입어 비로소 차도르를 걷어내고 본연의 얼굴로 드러나며 빛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정원을 거닐며 박자와 가사에 구애받음 없이 스스로의 만족감과 평온함을 칭송하는 노랫가락은 타인에게는 전혀 아름다운 소리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솔직한 표현이라는 점만으로 그녀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한 명의 온전한 여인으로서 바쌈 부인의 모습이 주인공에게 재인식 되는 순간이다. 순간 한 발짝 더 나아가 바쌈 부인이 자신의 궁둥이를 훤히 드러내 놓고 배뇨하는 장면과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담벼락 사이의 작은 구멍으로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고 믿기 어려운 너무나 솔직한 광경에 절규하는 쇼카트 씨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상스럽고 말초적인 욕정을 자극하는 장면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상황의 그로테스크한 측면을 부각해서 묘사한 이유는 배뇨라는 배설의 이미지를 단순히 생리적인 현상에 국한하고 거기에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그야말로 생리적이며 관음증적인 변태적인 욕망의 분출을 전달하려는 데 있지 않다. 세계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실의 질서가 거추장스럽게 개별 존재들에게 덧 씌어 놓은 규율과 권위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타자들의 솔직한 자각의 표현이 감각적으로 묘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귀를 찢는 듯”하게 거침없이 분출되며 하부를 향해 배설되는 이미지는 외부의 제약과 스스로 위축됨으로 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주인공을 억누르고 있던 모든 억압의 장막이 찢어지며 삶의 활력, 생기가 회복되는 말 그대로 ‘회춘’의 계기를 의미하며 동시에 한 명의 온전한 여성으로서 제한적이지만 솔직하게 자신과 대면하는 존재의 표현으로 가치가 있다. 바로 이 짧은 순간의 작지만 길고 강한 여운을 남긴 사건의 경험을 통해 쇼카트 씨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바쌈 부인의 모습이 결코 아닌” 진정한 타자로서 한 명의 여성과 마주한다. “그랬다.” 바쌈 부인은 “바로 여자였다.”
3.
작가는 진부한 ‘사랑의 판타지’ 구조 속에서 단순하게 주인공들의 연령만을 끌어 올려 세대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경험이 되고 마는 상투적인 ‘황혼의 로맨스’를 반복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감정을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에게나 다양하게 실현 “가능한 모든 삶의 형태”의 다채로움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말하자면 특정한 세대의 전유물이었기에 익숙하면서도 ‘특별’했던 작위적인 사랑의 감각이 아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이들이 발산하며 교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욕망과 정서의 형태로 그려진 ‘사랑’이기 때문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경이로’울 수 있는 타자의 실재적인 삶이 창조된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말대로 “언제든지 어느 곳에든지” 동시에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면서도 개별적 존재 자체의 특이한 삶 속에서 생동하며 꿈틀거리는 ‘너무나’ 사실적이며 구체적 모습으로 묘사될 때만이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빛날 수 있는 사랑의 ‘진실’이 만들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대로 문학적 글쓰기는 ‘무언가 표현하는 창의적인 모든 장르가 그러하듯이’, 현실 세계가 견고하게 쌓아 놓은 ‘상투적’이면서 동시에 ‘신성화된 영역’의 경계석들을 비집고 들어가 ‘침범’한다. 새로운 발견과 발명으로서의 문학적 언어는 알려진 규칙과 배열 속에 익숙해져 무뎌진 우리들의 감각 촉수를 자극하여 봉인된 존재들의 삶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허위의 경계심을 무너뜨려 사심 없는 순수한 관계로서 타자와 조우하게 만들 수 있는 발견적 정복으로서 창의적 글쓰기의 묘미는 바로 이렇듯 타자와의 진정한 대면으로 우리들을 이끄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관례를 유지하고 삶의 안전판 속에 기생하며 자신을 보존하는 데 급급한 일상적 삶에 작지만 강한 파문을 일으켜 우리의 둔감해진 공감 영역을 자극해 상투적인 삶의 영역을 박차고 뛰어 나와 새로운 영토 개척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주류 질서가 관철시키는 규율의 힘이란 타자와의 관계를 형식적인 관성에 얽매게 하여 관례화 시키고 생기 없는 의례적인 불완전한 동거로 만들어 버리는 데 있다. 결국 이해 불가능한 세계로 추방되고 기약 없이 연기延期된 누군가의 당연한 권리이자 존재의 자취는 현실 세계의 둔감하고 인색한 표현력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삶을 변화시키고 성장하게끔 만드는 삶의 활력을 두터운 외투로 뒤집어 씌워 질식시키는 것이지만 익숙해진 오래된 외투가 주는 안락함은 아주 오랫동안 서서히 조여와 마침내 삶을 마비시키기까지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교묘하다. 일종의 자가 면역 체계가 교란되는 셈이다. 분별없이 작동된 면역 체계는 긍정적인 변화와 성장을 수반하는 타자와의 교류 자체를 오인하여 공격하며 삶의 잠재된 역량을 잠식하는데 이르게 된다. 성장통 자체가 차단되고 만다. 이질적인 것과의 결합은 통증 없이 내 삶에 접합 될 수 없으며 이종 결합을 통과하지 않고 경계 없는 거대한 우주와의 합일에 이르는 순수한 관계로써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은 불가능하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짧은 단편이지만 작품이 남긴 긴 여운을 음미하며 작가의 말처럼 진정한 타자가 될 때만이 진정한 우리가 될 수 있음에 주목해 보자.
유승호∙1973년 서울생.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 취득. <한국 소설 읽기의 열두 가지 시각>(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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