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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집중조명/해설/고명철|‘진득하니’ 수행해온 중견시인의 씻김굿―배진성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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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142회 작성일 12-11-0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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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집중조명/해설/

 

고명철

 

‘진득하니’ 수행해온 중견시인의 씻김굿―배진성의 시세계

 

 

 

배진성 시인은 20여년의 시력詩歷 동안 세 권의 시집을 갖고 있는 중견시인이다. 최근 시인들의 시쓰기 동향을 살펴볼 때 그는 과작寡作의 시인으로, 그 이유를 시인에게 묻는 일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시편으로부터 그동안 시인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헤아려보는 것은 이후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효하고 흥미로운 참조점을 제공해준다.

 

 

바다에 빠진 빈 항아리 하나

20년 째 몸과 마음을 비우고 있다

뻥 뚫린 가슴속으로

물고기들이 헤엄쳐 지나가고

푸른 바닷물이 수시로 넘나들었다

하늘바다에 머릿속까지 감고 서 있는

겨울나무 한 그루 가까스로 묵언 수행 중이다

―「항아리」 부분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사과꽃망울」 부분

 

 

사람 밖에 있던 나는 사람 안으로

길 밖에 있던 나는 길 안으로

이제 돌아가련다

서툴게라도 말하고

서툴게라도 통곡하련다

―「탁발」 부분

 

 

그렇다. 시인은 “20년 째 몸과 마음을 비우고” “묵언 수행 중”이었다. “바다에 빠진 빈 항아리”의 안팎으로 물고기들과 “푸른 바닷물이 수시로 넘나들”듯, 시인은 그렇게 망망대해의 심연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고 있었다. 그 수행의 과정은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견디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해야 할 일을 본디 망각하지 않고 그 일에 전심전력을 다 쏟는 것이다. 시인은 이것을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사과나무는/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는 것에 비유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득하니’라는 형용사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모자람 없이, 때마침 적절한 시기까지 인내하는 각고의 정성과 노력이 이 단어 하나에 집약돼 있다. 배진성 시인의 시작詩作에 임하는 시적 염결성을 적실히 포착하고 있다. 하여, 시인은 이제 귀환하고 싶은 시적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지금까지 “사람 밖”과 “길 밖에 있”다가 그 “안으로” 돌아가 비록 서툴지만, 그 만큼 “말하고” “통곡하”려 한다. 배진성 시인은 정직하다. 그에게 시는 ‘진득하니’ ‘묵언 수행’을 거친 만큼만 다가오는, 그래서 그는 육화한 만큼의 시적 진실을 노래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어떻게 노래하고 싶을까.

 

 

겨울나무는 하늘에 사는 식구들을 위하여

스스로 하늘에 주사바늘을 꼽고 하늘에 수혈을 한다

땅속의 따뜻한 혈액을 수혈 받은 별들이 눈을 뜬다

며칠 후면 고드름도 땅에 주사바늘을 꼽고

하늘의 영혼을 지상에 사는 식구들에게 수혈할 것이다

그렇게 땅과 하늘은 피를 나눈 형제로 함께 살 것이다

―「수혈에 대하여」 부분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이어주는 섬」 전문

 

 

‘진득하니’ 기다려온 시인에게 절실한 시적 과제는 ‘소통’에 대한 욕망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동안 일부러 세상과 거리를 둔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세계의 뭇존재들과의 관계 회복이다.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그 과정에서 망실되었던 세계를 향한 시인의 민활한 감각을 벼리는 일이야말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겨울나무와 하늘, 그리고 고드름과 땅 사이에 절로 흐르는 피의 메타포뿐만 아니라 징검다리처럼 단속斷續적으로 이어져 있는 섬들이 시적 화자인 ‘나’의 “가슴 속에 이어주는 섬”, 즉 ‘이어도’로 이어지는 시적 환상에 깃든 시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에게 관계 회복은 ‘겨울나무-하늘(및 고드름)’ 사이의 수혈로 환기되는 하늘과 대지의 소통인바, 이것은 우주의 수직 관계에 대한 회복을 뜻하는 것이라면, ‘섬-이어도’의 이어짐은 우주의 수평 관계에 대한 시인의 욕망을 함의하는 것인바, 결국 배진성 시인의 절실한 시적 과제는 우주와의 관계 회복이고, 이 과정은 시적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피를 나누고, 밟고 지나가는 섬들로 이어지는 시적 구체성을 통해 이뤄진다.

이처럼 우주와의 관계 회복이 이뤄질 때, 시인은 감나무로 날아온 까치 두 마리의 사랑 행각을 목격하면서 혼자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새들의 애무 행위에 대한 질투가 뒤섞인 관음증적 시선을 보내지만, 그 새들이 먹던 감을 먹으며 그 감이 왜 그토록 맛이 단지에 대해 음미하게 된다(“아, 참 달다/새 입술이 참으로 달고 맛있다”―「새 입술이 달다」). 우주의 뭇존재들이 나누는 순연한 사랑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 아름답고 달콤하다. 하여, 사랑하는 새들이 쪼아 먹은 감은 시인에게 불결하거나 추한 게 아니라 사랑의 정염이 깊게 스며든 아름다운 대상이다.

여기서 우주와의 진정한 관계 회복이 이뤄질 때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대상에 대한 진실을 탐문하는 핍진성逼眞性이다. 혹시 어떤 대상의 진실을 시인의 자의적 관점으로만 탐문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배진성 시인은 발본적 성찰을 하다.

 

 

다시 나무를 본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보니 나무가 나무로 보인다 그 동안 나는 나무를 자꾸만 사람으로 보려고 해서 나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무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뿐인 나무인 것이다

―「나무를 본다」 부분

 

 

나무를 보았으되, 그것도 나무를 자세히 살펴봤으되, 어찌된 일인지 나무는 ‘나’에게 사람으로만 보였다. ‘나’는 나무의 실재를 통해 나무가 지닌 진실을 보려고 애를 썼지만 나무가 아닌 사람의 형상과 사람살이와 관련한 것들만 보인다. 물론, 이 자체를 타매할 필요는 없다. 시적 대상이 어떤 것이든지 종국에는 인간의 삶과 관련한 진실을 탐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직면한다. 하지만, 시인은 바로 이 자명한 시적 물음 자체를 탐문한다. 시란, 세계의 뻔한 진실을 확인하는 게 결코 아니다. 게다가 시란, 사람(혹은 사람 살이)의 진실만 탐문하는 게 결코 아니다. 배진성 시인에게 시란, 사람은 물론 세상의 뭇존재를 포괄한, 즉 우주의 진실을 탐문하는 도정이다. 하여, 위 시에서 “나무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뿐인 나무인 것이다”에 깃든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나무’란 대상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하자는 게 아니라, 어떤 대상 그 자체가 본디 지닌 진실에 육박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일은 쉽지 않다. 마치 바닷가에 펼쳐진 모래밭의 모래들이 들고나는 파도 속에서 흩어지는 모래알들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야속한 운명처럼, 하지만 그 운명 속에서 모래밭은 우주-바다의 신비, 우주-바다의 진실을 온몸으로 품을 수 있다(“그리하여 모래밭은 온통//그를 찾아다닌 길로 가득하다//가슴속 모래밭까지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파도무늬」).

이 가혹하고 야속한 운명이 바로 시인에게 주어진 천형天刑인 바, 배진성 시인은 영매靈媒의 씻김굿의 형식으로 이 천형을 승화시킨다.

 

 

산책은

씻김굿이다

발로 하는 세수다

발로 씻는 씻김굿이다

발로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을 한다

산토끼 한 마리 가만 앉아서

발로 세수를 한다

산토끼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산 새 한 마리 가만 앉아서

깃을 다듬던 부리를 발로 씻는다

산 새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바람소리가 내 몸을 씻어준다

쑥 향기가 내 코를 씻어준다

하늘을 쓸고 있는 나무들이 내 눈을 씻어준다

꽃들이 내 영혼을 씻어준다

하늘이 하늘까지 내 길을 닦는다

나의 산책은 바리데기를 만나

길을 닦는 씻김굿이다

바람소리가 나를 씻어준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내 발이 나를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눈을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길을 닦아준다

나를 스스로 씻겨주는 씻김굿 춤이다

나의 산책은 스스로 씻는 씻음굿 춤이다

―「발로 하는 세수」 전문

 

 

시적 화자인 ‘나’는 씻김굿을 하는 영매이며, 달리 말해 ‘나’는 시인이다. ‘나’의 씻김굿 행위에서 각별히 눈여겨 볼 게 있다. 바로 ‘발’로 굿을 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시적 행위다. 여기서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나’에게 씻김굿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 굿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 달리 말해 굿의 수행적performative 차원 역시 중요하다. ‘나’는 ‘발’을 이용하여 굿을 수행한다. 여기에 시적 진정성이 깃들어 있다. 씻김굿을 하는 데에는 비루하고 번잡한 일상 속에서 숱한 상처들로 인해 맺힌 것들을 풀어줌으로써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삶의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함이다. 비루함으로부터 생긴 상처와 맺힘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제공한 ‘발’을 통해 풀어줘야 한다. 대지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발’을 적극 이용한 굿의 수행은 그 관계로부터 빚어진 맺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가장 적실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발’을 이용하여 얼굴을 씻는다. 세상과 기민하게 소통하는 얼굴의 주요 부위들―눈, 귀, 코를 깨끗이 씻는다. 그 수행은 ‘나’의 육체를 닦는 것이기도 하되, 동시에 ‘나’의 상처받은 영혼을 씻어주는 일이다. 이 일은 마침내 인간의 씻김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자연의 대상들 스스로 정화하는 차원으로 확산된다. 그러기에 이 씻김굿이 “바리데기를 만나”는 성격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바리데기가 고된 수행의 길을 가면서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성속일여聖俗一如의 가치를 현현하는 것인 셈이다. 그렇다면, 위 시가 “나의 산책은 스스로 씻는 씻음굿 춤이다”로 끝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배진성 시인에게 산책은, 근대의 개별자가 근대의 풍경 속에서 미적 거리를 둔 채 근대 그 자체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네 비루하고 저속한 삶에서 맺힌 숱한 상처들을 씻겨주는 씻김굿으로서의 시적 행위다.

이제 우리는 기대하고 욕망한다. 이후 배진성 시인의 심연으로부터 어떤 시들이 솟구쳐나올까. 벌써부터 설레인다. 한 중견시인의 새로운 시작詩作을 맞이하는 아침에 우리는 함께 서 있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스스로 아침 같은 사람에게로 간다

아침 시에게로 간다

―「액자」 부분

 

 

고명철∙1970년 제주 출생. 문학평론가. 현재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주요 저서로는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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