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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시/신현락/수작酬酌의 감각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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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008회 작성일 13-03-0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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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酬酌의 감각 외 1편

―-달마절로도강도, 김명국(1600-1662) 작, 지본수묵, 97.6×48.2cm

 

 

명정酩酊은 외로움의 극치에서 오히려 간결하다

 

자유롭게 스쳐가던 묵선은

짙은 눈썹에 닿아서 잠시 촘촘해지다가

솔기 없는 가사를 입히고 나면

이전에 없었고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한 사람이 서쪽에서 왔던 것

벽에 걸어두거나 지갑에 넣어 정표로 섬기는 일은

후세의 괴이한 풍습,

늙은 정인은 이미 강을 건넜는데

당신과 나 사이에 백 년을 격하여 주고받는 수작이란

 

술잔에 뜬 달을 나누는 일?

팔만사천 모공이 달처럼 열려야

한 줄기 갈잎에 몸을 실을 수 있다

외통수를 부른다 잔을 받으란다

시시한 수작은 통하지 않으니

외로움은 내통內痛하고 외통外通하단다

목숨을 두고 간통間通하자고 꼬드기지만

잔을 거두면 자작자작自作自酌 훨훨 강을 밀며

날아갈 저놈의 달!

 

혼자서 곰곰 문질러보는 눈썹의 안쪽이 흐릿해진다

순순히 곁을 따르는 내외가 여백이므로 월인月印이 도강에서 오히려 자유自遊한 것은 선대의 오래 묵은 전언, 그것을 동쪽으로 갔다, 그가 누군지 모른다 한들

오직 한 사람이 당신 바깥에 서성이는 것

 

남은 잔을 들고 바라본다

주거니 받았거니 흰 달을 두고 멀리서 짖는

목쉰 개의 울음 몇 점 그림 밖으로 흩어진다

 

 

 

 

편도여행

 

 

1. 고독

나는 고독과 가장 잘 어울린다

시인이 썼는가? 했는데 아니다

화성여행의 지원자 중 컴퓨터프로그래머가 쓴 지원동기이다

목사, 간호사, 대학생 등 다양한 지원자 중에

시인은 없었다

 

나는 시를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하던 어느 시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아직도 월곡 중에 둥둥 떠 있을

내 직업은 시인이 아니다, 고 한 김종삼 시인의 영혼을 떠올렸다

지구에서 고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은 우주에서

아직도 귀환 미정이다

 

2. 직업

편도임에도

화성여행 지원자가 4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돌아오는 여행은 여행이 아닌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행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글은 한 번만 읽는다

같은 길을 왕복하기 때문이다

 

3. 고향

누군가 고향을 물어보면

나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대답한다

 

4억 5000만 킬로미터

지구와 화성까지의 거리

 

아무도 떠나가지 않은 고향이 없듯이

아무도 죽지 않는 별은 없다

 

내 고향에는 아버지의 무덤만 붉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나와 고향까지의 거리는

아버지와 화성까지의 거리이다

 

4. 화성의 얼굴

당신은 붉은 얼굴로 다가온다

돌멩이 하나를 내게 건네주며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을 용서하겠느냐?

묻는다 나는 말없이 돌을 받는다

 

생의 건너편에서

가슴에 박힌 돌멩이, 그 취한 살냄새에 얼굴을 묻고

미워하고 용서하는 슬픔으로

불멸하는 별을 만나러

편도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떠날 때는 별이 하나 떨어진다고 한다

가장 고독한 자의 가슴에 떨어진

별은 돌멩이의 근친이다 화산 분화구도

고요하게 고통의 침전물을 눈 안에 담는다

 

나는 돌멩이의 시선으로 당신을 본다

스스로 궤도를 이루고 태양의 인력을 견디느라

이목구비 다 지워버린 얼굴, 그러나

아직 그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다

당신과 나는 외계가 서로의 본적이다

 

5. 이 풍진 세상

화성으로 여행을 가실 때는 확인하세요

우선 출발점은 당신이 선 자리예요

슬픔의 군주가 되어

용서가 어떻게 한 왕조의 성곽을 이루었는지

친절하게 안내한 지도를 보아도 좋구요

은하철도를 타도 좋아요

여행이 직업인 여행자는 걸어도 되구요

별의 운행 질서만 따르면 상관 없어요

가다보면 누각 아래에 성문이 있을 거예요

성문 밖으로는 나가지 마세요

우주 미아가 될지도 몰라요

화성은 화성 안에서만 살아요

 

화성 밖에 대해 언급한 안내도는 엉터리예요

그 밖의 영역은 바람과 먼지가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화성으로 여행을 가실 때에는

도착점을 확인하세요

도착점은 물론 이 풍진 세상에서

별의 왕국을 꿈꾸었던

고독한 성주의 성좌예요

 

6. 종말

최근 이십 년 동안 화성에서

영구미제사건이 십여 건 이상 발생했다

어떤 이는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를 만들었고

어떤 이는 화성으로 여행을 떠났다, 고 추측하고

예언자는 지구 종말이 가까워졌다, 는 등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붉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어서

믿기지 않는 일이란 점에서 영화와 같고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났다는 점에서 편도여행과 같다

시간의 지문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재판장에는

먼지와 바람만이 증인으로 불려나왔다

그 동안 몇 번이나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화성을 향하여 무인탐색선을 띄웠다

탐색선은 높이가 8킬로미터에 이르는 황사폭풍과

분화구에 눈물의 흔적을 담은 돌멩이 사진을 보내왔으나

어느 것도 증거물로 채택되지 않았다

미구에 있을 화성여행에 차질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건의 추이는 시대와 더불어 묻혀져 갔다

오랜 시간을 가진 돌멩이를 화석으로 읽는 사람은

최소한 종말론자는 아니다

 

7. 귀향 미정

당신이 그곳에 있음을 압니다

당신의 평생이 가 닿은 그곳

먼지바람이 손 뻗어 가리키는 방향이

당신의 외계입니다

 

가장 고독한 자만이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납니다

귀향은 미정일수록 애틋합니다

편도여행은 미지의 별에게 이름 하나 붙여주는 것이라고

지금 떠나려는 바람이 귀뜸해 주고 있습니다

*권혁수의 시 「건너편 아파트」에서.

 

신현락∙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따뜻한 물방울>,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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