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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인상(시)/밥알 하나가 말을 건네 온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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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열
밥알 하나가 말을 건네 온다 외 4편
밥알 하나가 말을 건네 온다.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신근리 탑산지하구도
바지배미가 고향이란다.
깜짝 놀라 숟가락을 내린다.
오뉴월 논두렁 뙤약볕
네 아비의 구슬땀을 먹고 자란 화신이란다.
새참 둥주리 자라목에 올려 광대 곡예하듯 단숨에 달려와
허기진 배를 참으며 고시래,
막걸리 한 잔 부어주던 내 어미의 영혼이란다.
두엄 한 줌 주어 보았느냐.
물꼬 한 번 터보았느냐.
피사리 한 번 해보았느냐.
참새의 무서운 주둥이 하루 종일 피해 보았느냐.
밥알 하나가 말을 건네온다.
손톱을 깎으며
아무생각 없이 잘라내고 있지만
손끝, 발끝, 몸뚱이 끝은 끝이 아니라고
잘려나가는 것들이 아우성이다.
바라보면서도 실은 보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은 아니라고
떨어져 나가면서도 아우성이다.
열병을 앓던 그 날에도 쉬지 않고 자라던 것들
자라면서 지켜주고 사랑해 주었던 것들
잘린다고 잘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허공 중에 흩어지면서도 아우성이다.
쏟아져 내리는 초승달은
무덤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꽃이라고
잘리면서도 잘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이다.
간을 쳐야 제 맛이 나지
아버지 아침 밥상 미역국이 싱겁다.
간장 한 숟가락 휘휘 저으신다.
그래도 간이 맞지 않는지 다시 한 숟가락 넣으신다.
막걸리도 간이 맞지 않는다 소주 한 잔 부으신다.
벼농사가 싱거우면 땅콩농사로
병아리, 오리, 돼지로 간을 보시더니,
외양간 두어 마리 송아지 밤손님에게 헌납하고
수북이 쌓여 가는 빈 소주병,
새벽달 내려 받으며 눈물로 간을 맞춘다.
간이란 간은 다 맞추어 보시고
저승길은 노을빛 추억으로 간을 보겠노라
허공에 눈빛 아스라이 흩날리셨다.
철새 한 마리
어디론가 바삐 날아간다. 어둠에 간을 맞추며,
개안開眼
산새 소리에 취한
내 눈은 눈이 아니다.
눈이 멀고서야 비로소
동트는 태양 속에 숨은
저녁노을이 보인다.
길가에 핀
풀꽃 한 송이에
영혼을 내어주고서야
한 줄기 빗소리에도
파도가 꽃피는 소리로 들려온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하, 나를 눈멀게 하는 이 기쁨
심봉사 눈을 뜨듯
세상아 반갑구나.
닭과 알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도끼자루 온데간데없고
흰머리에 노을이 둥지를 튼다.
새벽녘 꼬끼욱 꼬끼욱,
장닭 퍼드득 퍼드득 홰를 친다.
닭도 아니요, 알도 아니라 한다.
꼬끼욱, 꼬끼욱,
먼저 일어나면
새벽도 먼저 온다.
소감/마법의 노로 나의 뱃길 내고파
유년시절 뱃길을 하나 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나 일상이라는 바다는 좀처럼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뱃사공이 되고 싶은 꿈은 접을 수가 없었다.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잊혀졌는가 싶으면 다시 피어오르곤 했다. 32년간 출퇴근이라는 쳇바퀴를 돌리면서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 쳇바퀴 돌리는 일을 그만두니 리토피아가 노를 하나 주신다.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튼튼해지는 마법의 노를 주신 게다. 한 삼십 년 열심히 젓다보면 제대로 된 뱃길 하나 열리지 않겠는가? 평생을 두고 닦아도 다 이루어지지 않는 꿈 하나가 잠을 깨운다. 부족한 글 추천해 주신 추천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이경열
추천평/전통 서정시의 미의식에 충실
신인으로서 믿기지 않을 만큼 이경열의 시는 농익어 있다. 「간을 쳐야 제 맛이 나지」 외 4편 모두 제 각기 시적 완성도가 높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삶의 오묘함과 비의성을 절제된 시의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서정시의 시적 감동을 자연스레 끌어내고 있다. 농부인 아버지가 매사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특유의 일처리를 ‘간을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시적 인식은 일상에 대한 성찰적 시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특히 저승길을 ‘노을빛 추억’으로 간을 친다는 것과 철새가 어둠 속으로 비상하는 것을 “어둠에 간을 맞추며”와 같은 시구로 형상화하고 있는 데서 이경열은 시인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간을 쳐야 제 맛이 나지」). 또한 좋은 시인의 갖춰야 할 시안詩眼에 대한 절차탁마의 욕망을 자연스레 노래하고 있는 「개안」에서 이후 시쓰기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최근 신인들의 시쓰기가 서정시의 맛과 멋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터에 이경열의 시는 전통 서정시의 미의식에 충실하되, 그것에 안주하는 게 결코 아니라, 시인의 갈고 다듬은 참신한 시적 감각의 언어를 통해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는 점이 큰 미덕이다. 이후 한층 웅숭깊은 서정시의 세계를 펼쳐나가길 기대한다./추천위원:강우식(시인), 장종권(시인), 고명철(문학평론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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