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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정우영의 시평에세이3/즘생의 시간과 모성의 위기-송진권과 박승민이라는 시어詩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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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117회 작성일 12-05-30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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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영의 시평에세이3/즘생의 시간과 모성의 위기-송진권과 박승민이라는 시어詩魚

 

 

오래 묵은 장맛 못잖게 오래 묵은 시들도 맛있다. 오래 묵은 장에서는 필연적으로 묵은내가 나지만, 오래 묵은 시에서는 상큼한 샛내가 맡아진다. 오래 묵은 장과 시는 여기에서 그 가치가 갈린다. 물론 새로 썼다고 해서 시가 다 새로운 것은 아니고 오래 묵은 시라고 해서 다 낡은 것도 아니다. 오랜 사유와 경륜 깊은 시들이 만만치 않은 새로움을 품고 우리 시문학에 등장한 예는 적잖다. 노년의 시퍼런 젊음을 보여준 문인수 시인이 그렇고 최근 활발하게 시의 경지를 열어가는 김신용 시인이 또한 그렇다.

나는 얼마 전 시단에는 다소 낯선, 송진권과 박승민 시인의 첫 시집을 받아들었다. 등단 시기로 보면 그리 오래지 않으나 오랫동안 야인으로 갈고 닦은 적공이 만만찮게 녹아 있다. 곰삭은 시의 새로움이라고 할 청신함이 편편에서 풍겨 나온다. 간난신고의 애환도 절절해 보인다. 강호의 시객詩客이 시단의 전부가 아님을 새삼 확인한다. 시공詩功 녹록잖은 기인이사들이 처처에서 시를 쓰며 한 시절을 연마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와 같은 시가 한 사람의 사적 기록에 머물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빛나는 별로 뜰지 안 뜰지는 두고 보더라도 동시대인의 눈에는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첫 시집을 펼쳐든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비교적 찬찬히 시집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편이다. 첫 시집에는 그 시인의 경로가 밝혀져 있기도 하고 이후 열릴 천변만화의 싹이 스며있기도 하는 까닭이다. 서투른 도약과 새로운 재기도 만나고, 연륜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푸르게 벼린 각오가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을 맛보기도 한다.

개중에는 독하다 싶게 자기 주관을 펼쳐내는 시집도 있다. 그 어디서도 느끼지 못한 참신함을 갖춘 이런 시집을 대할 때면 문득 경건해진다. 대개 이런 시집은 집약된 참신함이라고 부를 만한 이슈issue를 품고 있다. 아마도 근래에 나온 첫 시집 중에서는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싶다.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와 더불어 이 시집은 오랜만에 우리 시에 활발한 논의의 장을 열어젖혔다. 통칭 미래시 논쟁은 이들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들의 호오好惡와는 상관없이 덕분에 나도 이들 첫 시집이 이끌어낸 떨림을 상당히 깊게 들이마신 바 있다.

이들만큼의 파괴력은 아니지만 송진권과 박승민은, 김경주의 이슈와는 대척되는 지점에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열어 가고 있다. 김경주가 혼돈과 무질서의 비정형 상상력을 시적 에너지로 삼는다면 이들은 통시적通時的 질서의 전형적 상상력을 시적 에너지로 삼는다. 이런 전형성이 언뜻 눈에 익고 편해서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기존에 보인 서정시 틀과 뭐가 다르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이들 시에서 민중서정의 새로운 변모를 맛보는 중이다. 이 느낌은 이른바 ‘극서정시’와 같은 명명에서 오는 이질감 과는 다르다. 새로운 눈으로 만나는 깊은 시의 풍치風致를 보인다. 겨울 서정의 다사로움을 간직한 겨울 시어詩魚들의 눈부심을 만나보시라.

2. 송진권, 즘생의 시간을 열어젖히다

대숲은, 그 존재감으로도 신비로운 곳이다. 외관으로는 집과 산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지만, 내밀하게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자 의식과 무의식의 접경이다. 하여, 대숲에서는 흔히 귀신과의 접신이 이뤄지기도 하고 ‘나’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문이 열리기 전 대숲은 웅크린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숲에서 짐승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이다. 아마도 어둑한 그늘을 그려내는 대숲과 거기서 들려오는 묘한 댓잎소리, 그리고 덩어리져 움직이는 대숲의 우묵함 같은 것이 이런 심상을 이끌어내지 않나 싶다.

송진권의 시집 「자라는 돌」에 그려진 대숲은 어떨까.

 

오밤중, 대숲이 날 거두어들였을 적에는

대숲에 들러붙은 별들이 댓잎을 갉아대고 있었습니다

흠뻑 물기 머금은 바람이 그것들을 쓸어서는

한 섬이나 산 능선에 모아놓자

너울너울한 대숲은 빼곡히 수직으로 기립해서

제 무슨 비늘 달린 즘생이나 되는 듯이

숨을 몰아쉬며 웅크렸는데요

댓잎들이 몸을 뒤채 비늘 단 즘생의 몸을 이루고

후두둑 한번 몸을 떤 뒤

펄쩍 몸을 솟구쳐 중천으로 뛰어오르면

산이며 들이며 먼 인가의 불빛들이며는

다 그 앞에 부복할 터인데요

중천을 치받으며 즘생을 이룬 몸뚱이서

별들은 툭툭 떨어져내리다가 팽그르르 돌다가

희미하게 가물가물 삭아 없어지기도 했는데요

중천의 달 모가지를 거머쥐며

슬슬 큰 즘생을 거느리고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었는데요

―「대숲」 전문

 

송진권도 대숲에서 짐승을 본다. 그런데 그 짐승은 ‘짐승’이 아니라 ‘즘생’이다. 그는 ‘즘생’으로 표기되는 짐승을 만나는 것이다. 왜 즘생일까. ‘즘생’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흔히 불리워지는 ‘짐승’의 고장말이다. 동시에 이 말은 짐승으로 바뀌기 이전에 쓰였던 과거의 말이기도 하다.(‘즁생’이 ‘즘생’으로, ‘즘생’이 다시 ‘짐승’으로 바뀐 것은 국어학자들이 증명하고 있다) 나는 이 시 속 ‘즘생’은 이 둘의 혼용이라고 본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오롯이 살아난 존재가 ‘즘생’인 것이다. 이는 단지 표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즘생이라는 존재는 ‘즘생’으로 호명되면서 야생의 짐승과는 달라지게 되며 이들과는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즘생의 시간’이라 부르고자 하는데, 그러면 이 즘생의 시간은 과연 어떤 시간인가. 이 시간은 “중천의 달 모가지를 거머쥐며”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시간이다. 변전의 시간, 곧 신화의 시간인 것이다. 이 신화의 시간 속에서는 “댓잎들이 몸을 뒤채 비늘 단 즘생의 몸을 이루고/후두둑 한 번 몸을 떤 뒤/펄쩍 몸을 솟구쳐 중천으로 뛰어오르면/산이며 들이며 먼 인가의 불빛들이며는/다 그 앞에 부복”한다. 나는 여기서 송진권이 바라는 꿈의 세계를 목도한다. 그는 즘생의 시간을 살고 싶은 것이다. 식물성인 댓잎들이 즘생의 몸을 이루고 다시 중천으로 뛰어올라 달이 되는 세계. 이는 논리 이전의 세계이며 의식 이전의 세계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태초의 시간이자 원형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의 대숲에는 즘생의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와 같은 원시성이 흐르고 있다. 어디 대숲뿐으랴.

 

너무 여물어 빨빨 쇤 보리밭 말고

아직 연한 보리밭쯤이면 될랑가

그것도 평지에 펀펀히 드러누운 보리밭 말고

산날망 넘어오는 뙤똥한 보리밭쯤이면 어떨랑가

막 비 온 뒤끝이라 파릇파릇 웃자라서

대공을 잘근잘근 씹으면 단물이 배어나는

배동 오른 보리밭쯤이면 될랑가

아지랑이 아물아물한 데서

하늘아이들이 시시덕대며 내려와 소꿉놀이하며

풀꽃 따다 밥 짓고 반찬 하고

보리피리 불다 돌아간 뒤

그나마 정든 구천도 어두워지고

살도 뼈도 다 저 갈 데로 가버리면

파릇한 혼백 하나

착하고 뚱뚱한 구름 속으로 둥둥 날아가

왼어깨에는 해를 앉히고

오른어깨에는 달을 얹고

머리카락엔 솜솜 별을 뜯어붙이고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할랑가

할 수나 있을랑가

―「보리밭의 잠」 전문

 

대숲에서 보이는 신화의 시간은 음지의 대숲뿐 아니라 양지의 보리밭으로도 그 영역을 확장한다. “아직 연한 보리밭”은 말할 것도 없고 “산날망 넘어오는 뙤똥한 보리밭”인 무덤에도 신화는 내린다. 그러면 “하늘아이들이 시시덕대며 내려와 소꿉놀이하”고 “풀꽃 따다 밥 짓고 반찬 하고/보리피리 불다 돌아간”다. 하늘아이들 다 돌아간 뒤 “그나마 정든 구천도 어두워지고/살도 뼈도 다 저 갈 데로 가버리면/파릇한 혼백 하나” 남아서 “착하고 뚱뚱한 구름 속으로 둥둥 날아”간다. 그러고는 “왼어깨에는 해를 앉히고/오른어깨에는 달을 얹고/머리카락엔 솜솜 별을 뜯어붙이고/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때, ‘파릇한 혼백’이 안녕이라고 말할 때, 인간은 비로소 신화의 시간에서 깨어난다. 송진권은 그것을 보리밭에서의 잠이라고 여긴다.

그럼 물어보자. 송진권은 왜 이같은 신화의 시간을 그리고 있을까. 신화의 시간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현재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영원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시집 3부에 실린 「못골」 연작 21편을 뜻깊게 바라본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못골」은 실은 통시적 공동체의 공간이다. 그리하여 「못골」 연작은 과거를 과거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시간은 새로운 과거이며 지나간 미래이다. 무엇보다 그 시간은 우리 가슴에 여전히 찰랑찰랑 고여 있다는 점에서 영원한 현재의 시간이다.

 

여가 워디여 까치둥우리 머리 매만지며 고대 가겄던 냥반이 시난고난 살아나서는 정신도 온전치 못한 이가 뜰팡에 주저앉아 꽃구경한다고 속치마 바람으로 흙더버기 되어서는 무꽃에 나비 날아와 엉기는 시상천지 언제나 또 와보겄냐 고와라 고와라 쭈그려앉아 족두리 위에 앉아 팔랑대는 나비거치 나부대는디 파르르 꽃잎 지는 저 워미메서 저 니들이 다 뭐라는겨 꽃잎 속에 섞여가지구 저 니들이 다 뭐라는겨 가자구 가자구 신발 속에도 봄볕 낙낙하니 신발 신구 따라나스라구 큰애기 적 바구니 끼고 나물 뜯으러 가던 날거치 거기 가면 다들 볼 거인디 이쁘게 하구 가야햐 주름 깊은 얼굴에 분을 찍으며 아끼던 치마저고리 꺼내놓고 야야 이쟈 갈란다 신발 신고 구부정히 가다가 어드멘가서 제 살던 데를 돌아보드끼

―「늦봄-못골․2」 전문

 

늦봄, 아지랑이 오르는 늦봄에는 “고대 가겄던 냥반이 시난고난 살아”난다. “살아나서는 정신도 온전치 못한 이가 뜰팡에 주저앉아 꽃구경한다고 속치마 바람으로 흙더버기 되어서는 무꽃에 나비 날아와 엉기는 시상천지 언제나 또 와보겄냐 고와라 고와라 쭈그려앉아 족두리 위에 앉아 팔랑대는 나비거치 나부대는” 것이다. 그러면서 “큰애기 적 바구니 끼고 나물 뜯으러 가던 날거치 거기 가면 다들 볼 거”라고 동무들한테 이쁘게 하고 가겠노라고 “주름 깊은 얼굴에 분을 찍으며 아끼던 치마저고리 꺼내놓고 야야 이쟈 갈란다” 하는 것이다. 실성한 노인네의 넋두리 같은 이 사설이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심저에 눌려 있는 어떤 무의식적 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얼까. 나는 ‘마지막 응축의 공감대’라고 본다. 누구에게나 절정의 시간은 있다. 영원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는 마지막 순간에 그 절정의 시간을 응축으로 만난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시간을 맞아야 하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걸 감지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이같은 응축의 시간은 그러나 부차적이다.(아니, 부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장황한 듯한 이 사설이 다음 시행을 위한 예비적 정황처럼 비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신발 신고 구부정히 가다가 어드멘가서 제 살던 데를 돌아보드끼”라는 구절은 그만큼 문제적으로 내게 다가온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연상되는 이 구절에는 경계를 넘어가야 하는 자의 안타까움과 더불어 평생을 끌고온 육신을 바라보는 “파릇한 혼백”의 홀가분한 공허가 함께 한다. ‘제 살던 데를 돌아봄’은 생애에 대한 슬픔이 아니다. 새로운 과거인 미래의 시간, 곧 신화의 시간 속으로 들어서는 자의,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의 발로인 것이다.

이제 나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왜 그가 그리는 즘생의 시간, 신화의 시간에 이토록 집중하는가. 그가 그리는 세계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상투적 재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롯한 고장말과 오래된 정서로 자기만의 진경산수를 화폭에 펼친다. 그 화폭에는 사라진 과거가 아니라 지나온 미래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가 복원해야 할 원시적인 생동감과 가치가 담겨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펼쳐내는 새로운 과거로 들어가 지나온 미래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3. 박승민, 모성의 위기를 직감하다

대체로 집은 남자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집을 지탱하는 이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다. 엄마이며 모성母性이다. 엄마의 등과 모성의 힘이 집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가문의 대체적인 종말과 함께 아버지로 상징되는 집의 생애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집은 이제 모성의 공간이다. 최근에 들어 이 경향은 더욱 심해져 집에서 부성父性의 공간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공간과 함께 부성의 존재도 미미하다. 아이들의 그림을 주의 깊게 바라보라.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가. 아버지는 주로 집밖에 그려져 있다.

이는 시골에 가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망가지고 부서져 휑한 마을 집들 중 그나마 괜찮은 집 버텨주는 이는 어머니들이다. 그 집에서 어머니 혼자 밥 먹고 어머니 혼자 잠잔다. 어디로 갔는지 아버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집을 지키는 사람도 어머니요 농사를 짓는 사람도 어머니다. 우리 농촌은 지금 부성 부재의 엄혹한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모성의 힘이 아니라면 이나마도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박승민은 바로 이 지점에 시의 눈을 모았으며 시의 맘을 열었다. 그는 시집의 표제작 「지붕의 등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노인성 척추 측만증을 앓는

지붕의 등뼈는 난감하다

너무 오래 비를 맞아

가벼운 새의 발놀림에도

얇은 비스킷처럼 부서진다

어떤 기와는 살갗이 벗겨져

갈비뼈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수많은 모래와 모래가 만나

물이끼 같은 한 세월 이루었으나

밤새도록 내리는 장대비를 맞고 있는

한사코 제 등으로 비를 막는

어머니의 등뼈,

낡은 빨랫줄처럼 위태롭다

―「지붕의 등뼈」 전문

 

그가 읽어낸 모성의 힘은 집을 떠받치고 있는 ‘지붕의 등뼈’로 현현顯現한다. 집과 모성인 어머니의 동일시가 뼈아프게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사코 제 등으로 비를 막는/어머니의 등뼈”는 “낡은 빨랫줄처럼 위태롭다.” 어머니는 등뼈가 견딜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다 소진해 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의 어머니들은 “노인성 척추 측만증을 앓”고 있다. 물론 이때의 ‘노인성 척추 측만증’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병증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모성의 힘도 그 중심에 있는 골수가 다 빈 채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와 같아서 나의 눈은 이 시의 2연을 넘지 못하고 자꾸 맴돌이친다. “가벼운 새의 발놀림에도/얇은 비스킷처럼 부서진다”라는 시행과 “어떤 기와는 살갗이 벗겨져/갈비뼈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라는 시행이 도무지 집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영상도 겹쳐져 집은 문득 사라지고 병골의 어머니만 집채로 뚜렷하다. 그러므로 이제 난감한 것은 지붕의 등뼈가 아니다. 저 모성을, 저 병골의 어머니를, 저 대지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이다. ‘나’는 스러지는 모성의 위기 앞에 아무런 대책을 취할 수 없다. 그저 스러지는 모성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볼 뿐이다. 모성의 전이라도 일어나야 어떤 에너지를 얻을 것인데 정황으로 보건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모성 무너지면 한꺼번에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이 위태로울 정도로 팽배하다. 모성은 어찌 될 것인가.

 

늦가을 볕의 긴 손가락이

허공을 가만히 감았다 놓았다 하는 사이

뒷산 갈참나무숲에는

누가 죽어 가는지

흙이 붉어 가는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어쩔 수 없어

장수반점을 지나

흥농종묘를 지나

고추밭에 든 추월댁

체육복 등에 기대인 채

둘은 한참 동안 따사로운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잡을 수 없어

늦가을 볕은 늦가을과 함께 자꾸 늙어가서

수숫단 꼭대기

잠자리 마지막 날개 위에서

한 줌 골고루 금광金光으로 번진 뒤에야

턱, 숨을 내려놓는데

체육복 등엔

어둠이 파스처럼 한 장 붙는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어쩔 수 없어」 전문

 

“고추밭에 든 추월댁”이 죽은 것인지 아니면 따스한 볕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음이든 잠이든 그게 뭐 대수랴. 이쯤 되는 사정이라면 추월댁은 이미 사선을 넘은 것이다.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잡을 수 없”고 사람도 “늦가을과 함께 자꾸 늙어가”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때가 되면 저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을 거스르며 자기 몸을 추스르는 게 우리 어머니들이다. 기진하고 기진하여 온몸의 진액을 다 빼내어서라도 식솔들 거두고자 한다. “어둠이 파스처럼 한 장 붙”어도 모성의 눈은 밝혀 떠진다. 자연의 낮은 저물었어도 식솔들을 향한 모정은 밤을 낮같이 보이도록 만든다. 해 떨어졌어도 곡식 거두는 손짓 멈추지 않는 어머니들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추월댁의 현실이 식솔들과 함께라면 추월댁은 잠에서 깨어날 것이고, 식솔들에서 자유롭다면 “턱, 숨을 내려놓”고 영원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느낀다. 추월댁은 아직 영원의 휴식에 빠져들고 싶지 않음을. 그가 걸쳐 입은 저 체육복이 누구의 옷인가. 자식이거나 아니면 남편 혹은 그 누구든 식솔 옷일 것이다. 아마 죽음이 파스처럼 체육복 등에 붙어도 그는 떼어낼 것이다. 추월댁의 체육복은 단순히 간편함만을 뜻하지 않는다. 식솔과 자신을 이어주고 모성을 각인시키는 중요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추월댁이 체육복을 선택하는 한, 추월댁은 영원의 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잡을 수 없”고 “늦가을 볕은 늦가을과 함께 자꾸 늙어”갈지라도 모성의 힘은 쉬 낡지 않는 까닭이다.

하지만, 모성도 결국에는 쇠잔해질 것이다. 무언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너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는 “다리를 접고/땅에 엎드리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숙명이다. 거스를 수 없다. 다만, 아직 그 때가 아니라 유보하고 있을 뿐이다.

 

폐교 운동장 구석에

서 있는 의자

일생을 누군가의 엉덩이만을

받아주던 의자

정작 자신은 한 번도 누군가에게

앉아보지 못한 늙은 의자

세월은 강 밑으로 흐르는 모래 같아서

뼛속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소리는

정작 자신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 따라

왼쪽 어깨가 자꾸 한 쪽으로 기운다

어제는

백일홍 마른 흙담에 붙어서

누런 잇바디 사이로 담배를 뿜던

퇴역 농부의 낡은 경운기 소리 같은

장한가에 젓가락을 맞추었고

새벽녘엔

포플러 마른 나뭇잎의

뜨거운 임종을 받아냈다

문득, 별을 본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이젠 다리를 접고

땅에 엎드리고 싶다

―「늙은 의자」 전문

 

늙은 의자에 성이 없기는 하나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대뜸 어머니가 떠올랐다. 내 무의식 속에서 ‘의자’라는 발음을 ‘여자’라는 발음으로 환치한 것일까. 그러나 그보다는, “일생을 누군가의 엉덩이만을/받아주던 의자”와 “정작 자신은 한 번도 누군가에게/앉아보지 못한 늙은 의자”라는 표현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희생적 피동성을 일생 동안 펼칠 수 있는 이는 오직 우리의 어머니뿐이다. 세상에 그 무엇도 이런 헌신을 삶의 의미로 여기며 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의자도 이젠 삶의 끝자락에 와 있다. “오늘 따라/왼쪽 어깨가 자꾸 한 쪽으로 기”울고 “포플러 마른 나뭇잎의/뜨거운 임종을 받아냈다.” 예사롭지 않다. 그는 “문득, 별을 본다.” 돌아갈 자리를 가늠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닐 것이다. 모성의 힘이 여기서 그친다면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알량한 농촌공동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테니까. 무엇보다 모성으로 상징되는 대지가 다 파괴되고 말 것이니까.

박승민은 어떤가. 그는 단지 직감할 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는 아이의 병마와 영원한 이별을 통해 모성의 전이를 겪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 전이를 확장하는 데 어려워 한다는 점이다. 그는 태생적으로 수렴의 통로에 길들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은 우리의 몫이 아닐까. 늙은 모성을 이을 수 있는 에너지원을 찾는 일. 송진권에게 묻는다면 그는 즘생의 시간과 못골을 가리킬 것이다. 박승민이 이에 동의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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