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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시깊이읽기/박판식/재가 되지 않은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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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판식
재가 되지 않은 불
제1한강교에 날아든 갈매기
정지용
이름도 알 수 없는 간밤의 수많은 간이역들을 깨우고 달려온 목포발 보통열차가 막 철교를 통과하여 용산역으로 들어가던 오늘 아침,
그보다 빠른 속도로 그 옆을 먼저 비켜 달려간 성북행 전철이 러시아워대의 지하 서울로 기어들어가던 오늘 아침,
그리고 신경질나게 느린 속도로 사육신 묘지 앞을 지나 밀리고 밀린 제1한강교로 들어서는 오늘 아침,
나는 보았다 출근길 시내버스 속에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얼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둔부와 치골이, 치골과 둔부가, 둔부와 둔부가, 치골과 치골이 서로 곤두서게, 빽빽하게 맞닿은 사이에서
나는 보았다
제1한강철교 철제 아치 사이로 날아든 갈매기 한 마리를 나는 보았다 보았는데
서울역, 갈월동, 남영동 미8군 본부 앞에서부터 노량진까지 차량이 밀려 있는
인내와 순종과 관용과 무관심과 체념과 적응력의 이 긴 대열 속에서
이 연체의 시간 속에서 일천구백오십년 북으로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피난민들과
일천구백육십일년 남으로부터 북상했던 해병 제공공사단 병력들이
내려가고 올라갔던 제1한강교, 철제 아치 위를 유유히 지나 동부 이촌동과 반포 아파트 쪽으로 가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를
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꼭 그의 죽음의 자기 예고의 풍향과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저도 먹고 살려고 바둥대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라고만 생각했지만
그는 잘못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잘못 날아왔었다
그는 잘못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잘못 날아왔었다
아, 이렇게 정지된 순간에, 제1한강교에서 반포 아파트 쪽으로 바라본 한강은
얼핏 보면 바다 같고
자세히 보면 사이비 바다다
장산곶, 백령도 용기포, 대청도, 장자도, 소연평도, 주문도, 교동도……
혹은 어청도, 궁시도, 흑도, 가덕도, 백아도, 선미도, 소야도, 장봉도……
혜화동 영세 출판사 사무실에 붙은 백만분지 일 우리나라 지도에서 나는 그의 海圖를 찾는다.
황지우의 첫 시집이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그의 첫 시집이 아직도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의 첫 시집이 갖고 있는 첫 번째 미덕으로 악이나 잘못된 관념에 물들지 않으려는, 즉 자신에게마저도 속지 않으려는 그의 자세를 꼽는다.
황지우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는 공감의 시인이다. 그는 잘잘못을 따져 교정하려는 시인이 아니라 잘못된 것 마저 품고 가려는 시인이다. 그것은 이해의 태도가 아니라 공감의 태도다. 하지만 품고 가되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속지 않으려 노력한다. 따라서 그의 시속에서 그가 취하는 자세는 언제나 철저한 회의주의자의 자세이며 불안에 시달리는 자세이며 세계와 같이 아파하고 함께 무너지는 자세이다.
그런데 세계와 함께 무너질 때마다 그는 불덩어리로 타오르는 새의 형상을 자신에게서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날지 못하는 무거운 존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는 새를 꿈꾸는 존재가 된다. 그는 무겁디무거운 자신의 몸(흙)과 넋(물)을 태워 대기 속으로 올려 보내는 불의 시인이 된다. 그 불은 새의 형상으로 타오른다. 그리고 그 새는 때로는 서풍 앞에서 괴로워하는 은사시나무의 떨림을 느끼는 존재로, 또 때로는 명부에 날개를 부딪치는 자신의 호명을 듣는 존재로, 혹은 물 위에 뜬 묵시의 꽃잎을 응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정작 내가 자세히 읽고 싶은 시 속의 새는 위의 시들에 등장하는 무섭고도 감동적인 새가 아니라 다소 일상적인 체험을 다룬 「제1한강교에 날아든 갈매기」라는 시에 등장하는 새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새에 내가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시집이 나온 지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도 여전히 우리 삶의 수위가 그 주위에서 정체하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를 구원해 줄 세상 밖이란 것은 없고 언제나 이 지독한 세상 안에서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할 문제들에 우리가 늘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천형의 빚이 있음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앞서 언급한 새의 이미지를 다룬 세 편의 시도 같이 인용한다.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西風 앞에서」 전문
나는 그 불 속에서 울부짖었다
살려 달라고
살고 싶다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불 속에서 죽지 못하고 나는 울었다
참을 수 없는 것
무릎 꿇을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인정했다
나는 파드득 날개쳤다
冥府에 날개를 부딪치며 나를
호명하는 소리
가 들렸다 나는
무너지겠다고
약속했다
잿더미로 떨어지면서
잿더미 속에서
다시는 살肉로 태어나지 말자고
다시는 태어나지 말자고
부서지려는 질그릇으로
날개를 접으며 나는,
새벽 바다를 향해
날고 싶은 아침 나라로
머리를 눕혔다
日出을 몇 시간 앞둔 높은 窓을 향해
―「飛火하는 불새」 전문
그때 거기서 나는 웃었다
이름을 대고 나이와 직업을 대고
꽝 내리치는 주먹
떨어지는 국화꽃잎 아래서
그때 거기서 나는 웃었다
컵의 물이 근엄한 近影에 튀었다
쓰레기통에서 자기 그림자를
파먹는 미친 개 같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黙示의 물 우에 꽃잎 몇 개가
혓바닥처럼 떠 있었다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3」 전문
위에서 인용한 아름답지만 참혹하고도 무서운 시 세 편 속의 체험은, 아무나 겪을 수 없고 또 겪었다하더라도 쉽게 시로 녹여 쓸 수도 없는 것들이다. 시인은 아픈 시절에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아프고 또 가장 늦게까지 아픈 존재다. 그의 시는 뼛속까지 정치적이지만 그때의 정치는 사회적 맥락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맥락에 관련된 정치다. 그가 박해받는 순교자가 아니라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로서 괴로워하고 있는 은사시나무의 존재감을 느끼거나 명부나 묵시의 세계를 절절하게 응시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고통이 느껴져 괴롭고도 아프다. 그 역시 세상에 감응하고 있지만 그의 시를 읽는 우리 역시 그의 시에 감응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우리도 그 사건의 현장에 같이 있는 것만 같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불편해지고 불안해지고 심지어는 통증마저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이상한 감각과 감정들이 황홀하게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러면 이제 당대에 꼭 다시 읽었으면 하는 시, 「제1한강교에 날아든 갈매기」를 읽고 잘못 달려 온 것만 같은 세상, 답답하고 꽉 막힌 이 세상 안에서 재가 아니라 여전히 불(새)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해 보자.
하지만 아무리 다시 읽어도 황지우 식의 역설로 받아들이자면, 제1한강교에 잘못 날아든 갈매기는 잘못 날아든 갈매기가 아니다. 그 갈매기는 우리가 잘못 살고 있다고 교정하러 온 것이 아니다. 강에 터를 잡은 갈매기는 바다를 잊은 존재이고 죽음의 자기 예고편일 뿐인, 시간의 희생자다. 그러나 강에 잘못 터 잡은 갈매기는 역설적으로 잊혀 진 바다의 꿈이자 그 꿈의 물질적 현현이다. 지도 위에 찍힌 가짜 빌딩과 다리들 그리고 가짜 강과 바다들, 그 위 어디쯤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가. 그런데 그 존재감은 또 얼마나 작고 불안한 것인가.
이런 작고 불안한 황홀경 속에서 시인은 지금 무상함을 느끼고 있을까, 혹은 이 세상에 잘못 점 찍혔다는 후회를 느끼고 있을까. 우리는 시인이 「제1한강교에 날아든 갈매기」라는 시에서 불규칙적으로 쉼표를 찍어나가다가 마지막에 단 한번 무엇인가 명확하다는 듯이 마침표를 찍는 행위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시에 단 한번 등장하는 마침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맺음에서 행해지는 허위와 거짓조차도 부정하지 않고, 껴안아 불쌍히 여기려는 황지우 특유의 자세일 것이다. 그의 그런 자세를 사랑이라 불러야할지 자비심이라 불러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가 쓰여 진지 30년이 다 된 지금이나 그때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전히 사이비 바다 같은 강에 불과하지만 그 사이비의 세상은 뼛속깊이 실감나게 실존적이다.
박판식∙2001년 ≪동서문학≫으로 시 등단, 2004년 시집 <밤의 피치카토>. 현재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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