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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서평/양경언|/부로 말하지 않는 미덕, 충실히 말하는 자세-이장근, 문충성의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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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814회 작성일 12-05-30 20:53

본문

서평/양경언

함부로 말하지 않는 미덕, 충실히 말하는 자세-이장근, 문충성의 시집 읽기

 

 

시인의 몸속에는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말”(「서시序詩」)이 떠다닌다. 그것은 말이되, 아직 발화되지 못한 말이다. 시인의 손은 어둠 속을 유영하듯 흐르는, 그 말을 더듬는다. 박형준 시인은 자신이 더듬은 말을 말하지 않고 ‘그린다’. 시인의 몸속을 떠다니는 말들은 시인에 의해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묘사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사유와 감성의 언어들은 이미지가 된다. 박형준의 사물들은 언제나 “자신의 상을 빚느라”(「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여념이 없으니, 박형준의 시가 우리를 압도하는 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묘사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물이라고 하고 사물이 모여 풍경을 이룬다고 할 때, 박형준의 시는 사물과 풍경을 고유한 상으로 빚어 이미지의 형태로 제시한다. 이 같은 묘사의 방법은 감정을 과잉된 자기고백의 언어로 ‘토로’吐露하는 여타의 진술의 방법과는 다르다.

 

나무의 음악은

언제나

새들의 영혼으로 오는 것

이윽고

백 명의 연인들이

잎사귀 속에서

춤을 추게 해다오

―「스케치북」 부분

저녁의 눈 위에서

죽어가는 새가 경련을 하며

날아가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눈을 얼마나 움켜잡았는지

다리 전체가 의지가 된 새는

더운 김을 올리고 있는 모퉁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은빛으로 멍 들고 있었지

―「저녁의 눈」 부분

 

박형준의 시에서 ‘스케치북’이라는 사물과 ‘그린다’는 행위는 시의 구성하는 매우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백지 위에 언어를 그려 ‘사물의 그림’으로서의 시를 완성한다.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니, 어린 나무가 이제 막 어둠에서 벗어났고 아침 창가로 햇빛이 쏟아진다. 새의 지저귐이 나무의 음악을 만들고, 바람의 움직임은 잎사귀의 춤을 이끈다. 시인은 이 아침의 충만함에 경의를 표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을, 잎사귀 속에서 백 명의 연인들이 춤을 추는 정경으로 완성한다. 시공간이 역전되어 배경이 겨울 저녁의 골목이어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눈은 저녁의 눈 위에서 죽어가는 새의 모습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미세한 몸의 경련, 날아가는 시늉을 하고 있는 날개, 눈을 세게 움켜잡은 다리의 의지, 가까스로 뿜어내는 가쁜 숨과 더운 김. 이들은 모두 눈 위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죽음의 형상들이다. 박형준의 시에 대하여 ‘묘사의 힘’이라고 소개할 때, 우리는 그의 묘사가 발휘하고 있는 모종의 아우라 혹은 그의 묘사가 우리에게 환기하는 정서적인 감응, 그러니까 그 ‘힘’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박형준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의, 그 아침과 저녁의 무심한 풍경을 이처럼 경쾌한 사랑의 춤으로, 절실한 죽음의 몸짓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

말 속에 손을 집어넣어봅니다

사물은 어느새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어머니

반짝거리는 외투

나를 감싸고 있는 애인

오래 신어 윤기 나는 신발

느지막이 혼자서 먹는 밥상이 됩니다

―「서시序詩」 부분

 

“이 세상에 오지 않은/말”은 시인의 몸으로만 감지되는, 아직 시로서 발화되지 않은 말이다. 그 말이란 마치 도구적 성격을 초월한 사물, 그러니까 특정한 목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자족적인 사물과 같다. 그 말이 시라는 형식으로 발화되는 순간, 그자체로 단순한 사물은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어머니”가 되고, “오래 신어 윤기 나는 신발”이 되고, “느지막이 혼자서 먹는 밥상”이 된다. 이 같은 형상화를 통해 사물은 시의 언어로 전화되고, 작품이 된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박형준의 사물들은 그것이 어머니가 되고 신발이 되고 밥상이 되는 순간, 그러니까 외투의 형상으로 애인의 형상으로 그려지는 순간, 무목적적이고 자족적인 사물이 아니라 서정적인 사물 혹은 마음의 풍경이 된다는 사실이다. 박형준의 사물은 객관적인 풍경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지만 시인에 의해 새롭게 상상想像된 풍경으로 그렇게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니 박형준의 묘사는 무엇보다 자아화 된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물을 자신의 안목으로 재점화再點化 하는 ‘사물의 그림’으로서의 시는 그리하여 수사修辭가 많고 문체文體가 정교하다. 이 같은 감각을 통해 박형준의 시 속에서 사물의 무늬는 시인의 고유한 문채文彩로 새롭게 발현된다.

 

저녁노을은

꽃의 창문

죽은 새의 울음이 비치는

그림자가 상처를 입는다

―「봄의 숨결」 부분

 

사물 속에 빛나는 고통처럼

또 저녁이 온다

(…)

수평선의 빛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

―「저녁 빛」 부분

 

사물의 무늬가 시인의 문채로 다시 태어났으니, 그 문채는 자아의 인력으로 새롭게 개시된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예컨대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고목은 “알코올보다 강한 추억의 냄새”(「들판의 나무 한 그루」)를 흘리며 그곳에 있고, 재개발 지역의 집들은 자기 안에 강하게 몰두한 채 “스스로를 견고한 고독으로”(「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채워가고 있다. 그들의 존재론에는 시인의 감성과 의지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들판의 고목과 재개발 지역의 집들은 ‘그것 자체로’ 혹은 ‘있는 그대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감각과 관념을 통해 새롭게 현상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에는 슬픔의 서정이 깊게 침윤되어 있다. 시인의 겪고 있는 뼈아픈 그리움의 통증은 지금 저물어가는 저 수평선의 잔광에서도 고통을 경험하게 한다. 시인에게 세계의 사물은 오로지 고통으로서 찬란하며 저녁은 “사물 속에 빛나는 고통처럼” 그렇게 오고 있다. 배경이 꽃이 지는 창가, 노을이 지는 저녁으로 바뀌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봄바람에 여린 꽃잎들이 떨어지는 풍경이 시인이 시선을 통해 찰칵, 한 장의 사진으로 찍혔다. 사진 속, 시간이 정지한 허공에서는 꽃잎이 움직임을 멈춘 채 점점이 번지고 있다. 이 같은 낙화는 ‘죽어가는 새’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그 풍경에서 상처를 읽어낸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와 사무치는 그리움의 통증으로 미만彌滿<?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한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에서 사물과 풍경은 다름 아닌 고통과 상처로 자아화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자아의 인력으로 풍경화 된 주관적인 묘사가 결과적으로 시적인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의 절절하고 격렬한 감정은 사물과 풍경에 이입되어 있지만,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사물화 하는 묘사 장치를 통해, 강렬한 감정의 열도는 언어적인 중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의 상처와 고통이란 날 것의 감정으로, 직접적인 푸념으로, 토로되지 않는다. 시인의 경험하고 있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와 영혼의 허기와 그리움의 통증은 ‘아프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았으나 아픔을 오롯이 감당하고 있는 견고한 이미지로 현상되었다. 그러니 박형준의 시에서는 사물이 아프고, 풍경이 아프다. 박형준은 쉽사리 ‘아프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뼈저리게 ‘아픈’ 말들을 백지 위에 ‘아프게’ 그려낸다.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오래도록 매듭을 풀지 못한 질문이 있다. ‘문학적이다’란 표현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을 일컬어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이들에게는 그 같은 질문들이 우문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해석이 광범위해지기 때문이다. ‘문학적인 것’의 정체를 묻기 전에, 문학이란 영역 하에 실제로 행해지는 우리 시대의 구체적인 정황들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때 셈해지는 가능성들로 ‘문학적인 것’의 역할까지 세워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는 필자에게 턱을 괸 채 시선을 던질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문학을 다만 미적양식화의 한 길로만 묶어 놓고 싶지 않은 욕심이 앞설 뿐이다. 풀지 못 했다기보다는 풀기 어려워 안 풀고 지나친 매듭을 다시 던져보려 한다. 질문을 세분화해보자.

부풀려진 말들과 이미지들이 사방에 난무한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공허가 밀려올 때, 우리가 일컫는 ‘문학적인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펙터클의 기능에 편승하며 혹은 그에 방어하며 말들의 퇴적으로 기교를 형성하는 것이 문학적인 행위의 전부인가. 말들과 이미지들이 ‘어떻게’ 행위 하는지만 좇다가 그에 조응하는 ‘무엇을’ 소거해버리는 일은 과연 타당한가. 우리는 ‘무엇을’ 일컬어 ‘문학적인 것’이라 감별하는가. 스펙터클한 시대의 곤궁이란 어쩌면 그 틀에 갇혀 구체적인 삶의 리듬을 다양한 형식으로 담아내려는 노력들을 일시에 세련된 기술이라고만 소급하여 오해하게 하는 데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형식의 확장만이 문학적인 행위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기에 문학이 무엇을 위해 역할 하는지 마저도 애매해지는 지금 여기, 우리가 던질 질문은 그 애매함을 파고들 수 있어야겠다.

넘쳐나는 말들과 이미지들 속에서 ‘무엇을’ 신뢰할 줄 몰라 신뢰란 방식마저 가장 먼저 불신해버리는 우리들을 다시금 돌아보며, ‘문학적인 것’이란 말의 진의를 물을 때 우리는 이장근과 문충성의 시로부터 어떤 태도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시에는 지금 여기를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견고한 자세가 깃들어 있다. 이는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다고 절망하지만 말고, 기교들이 행위하며 담아내려는 희미한 ‘무엇’의 정체에 대하여 더욱 들여다보라는 권유로 읽을 수 있다. 이들의 시 세계를 이룬 말들은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그 방향성이 중요하고, 말들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그 위치가 중요하다. 시가 무엇을 위하여 역할하고 있는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문학적인 것’이 어디 멀리에 있지 않다. ‘문학적인 것’이란 곧 생이다. 문학은 생의 표피로 자리하고, 생은 문학의 살flesh로 자리하는 곳에 이들의 시가 있다. 그러므로 삶과 문학이 서로에게 필요충분조건의 관계를 이루는 시에서 시어들은 생의 조각보들과 같다. 시어들이 이루는 조각보 만들기quilting로부터 뚜렷하게 부상하는 현실을 우리는 ‘읽는 것’이 아니라 ‘만지는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함부로 지나치지 않을 권리:이장근의 <꿘투>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이장근 시에서 ‘나’는 항상 옆을 쳐다보고 있다. 옆으로 가닿은 시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들과 나란히 서 있다는 의미다. 때문에 이장근의 시에서 살고 있는 대상들은 ‘나’라는 주어에 의해 조명될 때, ‘나’의 목적어로 동원되기 보다는 또 다른 ‘나’들로 존재한다. 또 다른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므로 대상이 느꼈을 법한 감정은 고스란히 ‘나’의 감정으로 다가온다. 사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내’가 무언가를 쳐다보고, 그 무엇에 대해 감응할 때 품는 감정은 ‘나’의 것인지 내가 쳐다본 ‘무엇’으로부터 촉발된 감정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착종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 서로가 서로를 전염시킨 바로 그 감정만이 다만 중요해지고, 나란히 선 ‘나’와 내 옆의 대상은 ‘또 다른 나’들이라는 집합체를 이루며 하나의 풍경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장근의 최근 시가 보여주고 있는 시적 풍경의 구성이다. 그리고 이 구성을 가능하게 한 입장이란 ‘그들은 곧 나다’라는 정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버스안은 삐까쏘 그림입니다

내 어깨에 여자의 가슴이 달립니다

남자의 날갯죽지에 내 팔 한 짝을 달아줍니다

눈코입귀가 바쁘게 퍼즐을 맞춥니다

(중략)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꿈을 꾸러 갑니다」 부분

 

어떤 이에게는 출근길, 어떤 이에게는 등굣길,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퇴근길일 수 있는 아침 일찍 버스 안 풍경은 각자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사정들로 콜라주 되어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마치 “삐까쏘”의 그림처럼 기이하게 엉켜있는 사람들을 본다. 만원 버스인 것 같다. 서로가 밀착된 포즈 때문인지 손을 의도적으로 뻗지 않더라도 버스 안 사람들은 각자의 아침 사정들을 서로에게 기입할 수 있다. (일정한 시간대에 버스를 타본 사람들은 안다. 낯설지만 또 한편 낯익은 얼굴들이 내 하루의 일부분을 함께하는 기분을. 도착지로만 상대를 짐작할 뿐, 그 누구도 서로를 캐내려 하지 않는 버스 안에서 ‘나’와 ‘너’는 무겁지 않은 소속감을 통해 ‘우리’가 된다.) 이 때 만들어지는 온기. 서로가 서로의 정체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버스 안 사람들은 어쩐지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응원군 같다. ‘나’는 “무슨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들 속에서 무한히 “변할 수 있”는, ‘그들 속의 나’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지나칠 수 있는 것조차도 곧 ‘나’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내’게 거의 모든 것에 관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뜻하며, 거의 모든 것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말아야할 권리 역시도 있음을 뜻한다. (심지어 한 채널의 주파수를 잡기위해 흘려보내야 하는 라디오의 각종 잡음조차도 시인에겐 ‘주파수들 중의 하나’이다. ‘잡음’은 ‘그렁그렁 목이 쉬어서’ 부르는 노래일 뿐이다.) 이 권리는 어떤 독재자의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 드는 데에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권리는 ‘아스팔트에 혓바늘처럼 돋아난 민들레’ 옆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그를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행사하는 것이고 (“민들레에게 부치는 답장이라고 쓴다/아스팔트에 혓바늘처럼 돋은 민들레/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소년이/나였었다고 쓴다”-「시인의 말」 부분. 시집의 첫 장을 장식하는 ‘시인의 말’은 시인의 태도를 구현해낸 한편의 또 다른 시다. ‘시인의 말’ 역시도, 시인의 시들 속의 시다), ‘학명을 얻지 못한 성장판’을 달아놓은 듯 자꾸만 자라는 ‘굳은 살’을 보며 모두의 직립 사이에서 꿋꿋이 그 자신의 기울기를 번식시키는 익명의 존재들을 떠올리는 데에 행사하는 것이다(「바퀴가 자란다」). 이 권리를 행사하는 시 속 ‘나’들이 저 자신의 언어를 ‘너무 말랑말랑 하다’며 의심한다해도 (「노란 눈동자」) 우리는 알고 있다. 이장근의 시에서 등장하는 ‘내’가 어떤 대상들 옆으로 밀착해서 다가갈 때 만지는 것은 옆으로 나란히 있을 때에야 경험할 수 있는 상대의 아픔이고, 그 때 빚어지는 것은 그 아픔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따뜻함이라는 것을. ‘나’와 ‘그대’가 옆으로 섰을 때 포개지는 그림자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아픔을 표상하지만 그림자들의 공명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곧 생을 향한 “바동거리는 몸짓”의 일부일 수 있음을(「꼬리의 근성」). 요컨대 ‘나’는 “슬픔을 박차는 꼬리의 근성을 믿는” 존재다. 동시에 슬픔을 품은 바닥에 햇빛을 모아서 쪼여줄 수 있는 ‘볼록렌즈’의 시선을 갖춘 존재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중이죠/볼록렌즈 시절 빛을 모아 불태운 것들/폐허에 돋아난 싹에 빛을 골고루 나눠 주는 길이죠”-「반생이」 부분). 무엇도 함부로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나’의 권리는, 어떤 삶들을 자세하게 부각시킬 수 있도록 거기에 볼록렌즈를 갖다 대는 방식으로 행사되는 것이다. 그리고 볼록렌즈 저 편에는, 돌아보면 시가 될 수 있는 -‘문학적인’, 너무나도 ‘문학적인’-현실의 정황들이 펼쳐진다.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꿘투다

(중략)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는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꿘투」 부분

 

‘권투’가 아니라 힘을 꾹꾹 눌러 담아 발음하는 ‘꿘투’가 보인다. 이 된소리의 삶은 타당하다.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결같이 버티는 근성과 멋없고 촌스럽다 할지언정 쭉쭉 힘차게 왼손을 뻗어내는 악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ㄱ’이 홀로는 절대 낼 수 없는 소리가 ‘ㄲ’과 같이 낱자들이 포개졌을 때에야 비로소 알차게 만들어지듯, 끈질긴 관장님의 운동이 그의 삶을 신뢰하는 ‘나’의 시선과 합쳐질 때에야 비로소 생의 어떤 근육은 가시화된다.

배고픔에 지친 노인이 누군가 잠시 놓아둔 컴퓨터 모니터를 손수레에 싣다 경찰에 걸렸을 때 변명하지 않고 입술만 꽉 다물고 있는 모습, “눈빛만 요란한” 노인의 허기진 생(「저공비행」), 세상에 던지는 하나의 물음표처럼 보이던 사채 빚에 허덕이다 목을 맨 여자의 생(「전설의 도시」), 전생이 ‘게’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불균형적으로 걷고 있었던 폐휴지를 줍는 노인의 생(「게걸음」)……. 이 모두가 세상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그 무게를 모두 받아내고 있는”, “밑에 깔려 있는 없는 것들”임을(「수평의 함정」), 그들 모두 은유적으로 변모하고 있을 뿐 비슷한 사회적 위상에 있음을 시의 화자는 가시화하고 있다. 하지만 한 편, 그들이 생을 버티고 있는 힘 자체가 이 세상을 이루는 근육의 일부이므로 마냥 방관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하는 것이다. 변명하지 않는 노인의 꽉 다문 입술 속에, 부정한 세상을 죽음으로 고발한 여인의 결의에, 불균형적일지언정 꿋꿋이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노인의 걸음걸이 속에 밑바닥 생들이 만들어내는 근성과 악이 꼿꼿하게 살아있다. 하여 밑으로부터 키워낸 이 근육들로 불의가 들끓는 세계에 타협하지 말아야 함을 시 속의 ‘나’들은 말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전경들에게 쫓기던 그도

아스팔트에 누워버렸다

껌처럼 납작하게 붙었지만

낚싯바늘 같은 손에 낚여

어디론가 끌려갔다

보이지 않는 줄이

팔딱이는 그를 거칠게 당겼다

높은 곳에 잡혀간 그는

누구의 식탁에 올랐을까

껍질이 벗겨지고

살점이 해체될 때에도

한쪽 눈을 되돌리지 않을 것이다

―「상류보다 깊은 하류」 부분

 

횟집 수족관의 바닥에 붙어 있는 광어가 모든 눈을 하늘로 치켜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시 속의 ‘나’는 전경들과 싸우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스스로 바닥이 되어”, 밑바닥을 마치 수호하는 듯한 태도로 아스팔트 위에 “납작하게 붙어 있던” 그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 광어처럼 “누군가의 식탁”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밑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의 태도를 ‘나’는 잊지 못한다. 그는 당당했다. 이 버팀의 삶 역시, 타당한 것이리라. 타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우아한 생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 우아한 시어(詩語 혹은 詩魚)들은 전혀 주눅 든 모습이 아니다. 당당하게 “깊은 하류”를 향한다. 우리가 이장근의 시를 읽으면서 시의 화자가 시에서 다루는 대상들과 나란히 옆에 서 있다고 느꼈다면 그 옆의 정체는 곧 ‘밑바닥의 생’들이 꿈틀대는 곳이었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나’의 시선은 종래에는 ‘밑바닥’으로 가닿는다. 밑바닥 생이 시적인 상황의 살flesh로서 구체적으로 현시될 때, 이들이 만들어내는 근육의 힘을 우리는 함부로 지나치지 못한다.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 옆에 나란히 서는 건 우리가 이장근의 시를 읽으며 행사해야 할 권리인 것이다.

 

함부로 망각하지 않을 권리:문충성의 <허물어버린 집>

이장근의 최근 시가 밑바닥 생들의 옆에 나란히 서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있다면 문충성의 최근 시는 잃어버린 생들을 ‘지금-여기’로 불러내기 위해 기억의 회로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의 이전 시들에 비해, 시를 읽을 때 유난히 시어들 사이에 놓인 공백들이 눈에 띈다. 어쩐지 시어들이 장황하게 쓰이지 않도록 언술된 시어들을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만 같다. 어렵게 자리한 시어들은 그들 사이에 놓인 공백을 골짜기 삼아 겨우 그 말들의 울림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상은 아무래도 시인이 견뎠을 그간의 삶의 무게 때문이지 않을까.

무엇이 그렇게 무거운가. 상실한 과거가 무겁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지만,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기에 결코 해갈되지 않은 과거는 시인의 삶에 자꾸만 얹히는 것이다. 시인에겐 일종의 책무였던 듯하다. 사라진 과거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시인의 가슴팍에는 자꾸 갈증이 고였던 것이다. 그 괴로움의 흔적들이 시집의 사이사이에 흐르고 있으므로, 우리 역시도 시인이 끝내 놓지 못한 어떤 상황의 희미한 윤곽에 자꾸 메이게 된다.

 

2009년 6월 1일 새벽 6시도 되기 전인데

일어났습니다 멀리

표선 앞바다

밀고 써는

금빛 풍경

그때

오늘이 열렸다고

새벽이라고

솔부엉이

홀로

울었습니다

그대 뭐 하러 왔니?

모든 게

너무 늦지 않았니?

그렇게

서럽게

서럽게

그렇게

번역할 수 없었습니다

부엉부엉!

―「그렇게」 전문

 

시의 화자는 제주도의 표선 앞바다에서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 우두커니 홀로 있는 듯한 ‘나’의 상황마냥 쓸쓸히 배치된 시어들 사이로 솔부엉이가 홀로 울고 있다. 뭐 하러 왔냐고, 모든 게 너무 늦지 않았냐고.

나의 언어로 세계를 한 번에 움켜잡을 수 있을 때 이를 일컬어 서정의 힘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절대 가닿을 수 없는 지점이 잔여로 남아 나의 언어가 결코 세계를 체화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이는 서정의 좌절이라 할 수 있겠다. 위의 시에서 홀로 울고 있는 솔부엉이 앞에서 딱히 변론을 내세우지 못한 ‘나’의 상황 역시도 서정의 좌절일까. 어쩌면, 서정의 좌절은 예고된 것 일 수 있다. 상황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게 될 때, 우리는 위의 시에서처럼 결코 나의 언어로 해석할 수 없는 존재, 나의 언어로는 절대 독해할 수 없는 시간이나 상황, 감정에 맞닥뜨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영문도 모른 채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지만, 그 죽음의 사정 역시도 역사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아야 했던 과거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한 과거를 지닌 이들에겐, 과거를 번역할만한 언어가 당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시인의 경우엔 4.3이 그러할 것이다.

‘좌절된 서정’은 화자인 ‘나’에게 다그친다. 뭐하러 왔냐고, 모든 게 너무 늦지 않았냐고. 때문에, ‘나’는 ‘서럽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싶다. 그리고 서러움과 교차되는 다른 감정에 대해서, ‘그렇게’라는 지시대명사 말고는 딱히 내놓을 언어 역시 없다. 시를 이루고 있는 그 어떤 행도 완전한 통사구조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는 시어가 3연에서 두 번째로 등장했을 때, 화자는 결의라도 한 듯 강렬한 한 행의 시구를 내놓는다. “번역할 수 없었습니다.” 가 그것이다. 우리가 결코 번역할 수 없을 상황과 말들, 감정들에 대해서 세련된 언어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바에 따라 “부엉부엉!”을 기록하는 시도, 번역할 수 없는 경험을 번역할 수 없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옮겨 적는 일종의 시적 비약.

어떤 경험도 공인된 기록으로 남겨지기 위해서라면 전달 가능한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달 가능한 형식으로 번역한 경험은 보고된 말reported narrative 이상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다. 때문에 번역할 수 없는 경험을 해석이 개입되지 않는 말로 내놓는 것이야말로 ‘시적인’ 행위일 수 있다. 시인은 망각한 역사의 일부를 살려놓기 위하여 해석이 개입되기 전의 말들을 시의 현장에 풀어 넣는다.

 

섬 하나가 딱 감옥이었주마씸

건너가지 못허는 바당은 푸르당 버청

보는 사람 가슴까지 시퍼렁하게 만들었쑤게

희영헌 갈매기들 희영허게 날곡

(중략)

무싱거마씸

자유가 어디 있었쑤강

죽음이었주마씸

섬 하나가 딱

―「섬 하나가 딱」 부분

 

시인에게 있어서, 보고된 말이 ‘아닌’ 말이란, ‘사투리’를 일컫는다. 시의 화자는 4.3 당시에 섬이 전부 감옥이었고, 그때 제주를 감싸던 바다의 푸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하게 보였음을 ‘사투리’로 호소한다. 섬에는 곧 ‘죽음’만이 산재해 있었을 뿐, ‘자유’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당시의 절박함, 당시의 서러움, 당시의 괴로움이 ‘전부’를 의미하는 ‘딱’이라는 제주 사투리의 반복적인 쓰임을 통해 전해진다. “무싱거마씸”이라는 물음 속에 (표준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뭐라고요?’라는 되물음 정도 되겠다) 자조, 답답함, 울분이 가득 찬 듯 명료하게 감정이 전달되는 까닭은 사투리가 고통을 유일하게 증거하고 있는 몸의 말이기 때문이다.

폭력의 경험, 고통의 경험은 번역이 되는 순간, 이미 상징화로 포섭되고 있음을 증명하면서 당시 고통의 감각을 제대로 살려놓지 못한다. 오히려 휘발시키고 만다. 때문에 보고될 수 없는, 번역될 수 없는 고통의 경험에 상응하는 ‘시적인’ 말이란 이처럼 번역할 수 없음 자체를 드러내주는 말들일 수 있다. 시의 화자가 ‘사투리’를 통해 과거를 ‘지금-여기’에서 생생하게 증언하려드는 시편들을 위의 시 외에도 시집의 곳곳에 압도적인 비율로 자리하게 한 의도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제 아무리 상실한 과거를 사투리로 매만지려 해도, 과거가 완전히 복구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물어진 과거는 그 훼손된 모습 자체로 얼굴을 드러낼 뿐이다. 애초부터 과거를 올곧이 복원해낸다는 말은 안타깝지만 허구이다.

 

시뻘겋게 미쳐나

제주 하늘 떠돌다

시커멓게 멍든

혼들아!

50년도 더 지나

고작 눈물 무덤들

지어냈으니

와서

보아라!

무자년 그 처참한 삶과 죽음들

나라는 어디에 있지?

백의민족은?

우리가 창조해낸

삶, 아!

그 빈 무덤들!

―「빈 무덤 -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부분

 

때문에 잃어버린 과거를 애도하기 위한 시인의 몸짓은, 그 애도가 완전히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에 지속적인 애도를 시도하면서 책무를 다하려 한다. 불가능한 애도의 시도가 종결할 수 없는 애도의 지속을 부른 것이다. 가령 위의 시에서 화자는 반복적으로 ‘돈호’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혼들을 불러낸다. “처참한 삶과 죽음들”이란 시구를 통해 우리는 4.3 당시 죽은 몸조차도 찾지 못한 혼들이 많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었던 수많은 혼들은 무덤도 없이 반백년을 떠돌았을 것이다. 화자는 그 혼령들에게 빈 무덤이라도 마련해주고 싶지만 혼들을 애태우며 불러 봐도, 빈 무덤들만 남아 있기 때문에 마냥 맘 편하게 위무를 다하지 못하는 듯하다. 혼령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멍든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뿐만 아니다. 문충성의 시들에서 분절된 통사구조가 두드러지는 이유 역시도 불가능한 애도를 지속하고, 지연시키기 위해서일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번 시집에 담긴 시들에서는 한 행에 하나의 통사를 갖추고 있는 시구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상황을 제대로 담아낼 언어를 구하지 못하는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애도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자로의 예의를 다하는 것이다. 게다가 늦가을에 비가 오는 소리든, 바람소리든 모든 자연의 소리를 ‘저승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 이들의 발걸음일지도 모른다며 시인이 사방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 역시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늦가을 빗소리」). 애도를 지속하려는 자의 습관인 것이다.

시인이 취하고 있는 애도의 몸짓은 시 쓰기가 곧 상실했거나, 억압받았던 것을 살려내는 작업의 일환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지만 쉽게 공적인 언어로 꺼내놓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시인에겐 ‘문학적인 것’의 정의일 수 있다. 문충성의 시와 마주할 때 우리는 한 명의 시인이 너무나도 쉽게 망각에 길들여지는 세상을 상대로 치열하게 맞서 싸우고 있는 시적 현장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해석이 개입되지 않은 살아있는/살아남은 몸의 말로, 불가능한 애도를 지속시키기 위한 갖가지의 전략으로, 시인은 시가 포기 하지 말아야 할 권리를 일러준다. 함부로 망각하지 않을 것, 하여 고통을 응시할 것. 살아남아, 살아있는 말이 될 것. 시인이 ‘시가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 정말이냐’고 재차 물을 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희미하게나마 긍정의 답을 내놓고 싶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런데 시가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 정말입니까

그러니까 시가 병든 사람의 삶을 고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병든 시가

정말로?

―「하늘이 병들었습니까」 부분

 

함부로 말하지 않는 미덕, 충실히 말하는 자세

‘문학적인 것’이란 어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삶 그 자체다. 우리는 이장근의 시에 그려진 밑바닥의 생들을 통해 너무나도 시적인 현실을 목격하고, 문충성의 시가 취하는 애도의 몸짓을 통해 현실에 박혀있는 시적인 감정을 경험한다. 애초부터 ‘문학적인 것’과 ‘삶’이란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동시다발적인 움직임, 역동적인 교차의 그 상태일 수 있다. 그러니 독자여, 이제 그만 사족蛇足과 같은 과장된 해석을 그만 두고 우리는 다만 함부로 말하지 않되, 충실히 말하는 시인들의 자세를 배워야 할지니. 우리의 시들이 노래를 시작할 때, 그것은 곧 삶을 노래하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곧 삶의 시작詩作이자 시작始作이므로.

 

양경언∙1985년 제주 출생, 문학평론가.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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