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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권순긍의 유럽도시문화산책/“일어나라, 헝가리 인이여!”―부다페스트Budap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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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긍의 유럽도시문화산책
“일어나라, 헝가리 인이여!”―부다페스트Budapest
부다페스트는 한국 사람들에게 흔히 어두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1956년 소련과의 항쟁을 다룬 김춘수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때문이다. 이 시가 군사정권 시절 ‘반공시’로 둔갑해서 ‘강요된 베스트셀러’인 교과서에 실리는 바람에 부다페스트 하면 ‘소녀의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어둡고 칙칙한 이미지를 형성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랜 기간 동안 소련의 위성국으로 소위 ‘공산권’ 국가였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이미지가 공고해졌다. 1989년 소련이 붕괴되고 개혁, 개방이 진행되어 헝가리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비로소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다. 사실 ‘동구권’ 국가 중에서 1989년에 우리와 가장 먼저 정식으로 수교한 나라가 헝가리인 것이다.
부다페스트에 살다
하지만 부다페스트는 그런 어둡고 칙칙한 도시가 아니다. ‘다뉴브의 진주’라 부를 정도로 밝고 아름다운 도시다. 다뉴브 강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위치해 아내의 말처럼 ‘기념비적인’ 도시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에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기품이 있으면서도 육중한 느낌을 준다. 어찌 보면 비엔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다뉴브를 끼고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어 시원하고 경쾌한 인상을 준다. 이점이 또한 언덕 위의 왕궁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과 석조다리 등 비슷한 구도를 갖추고 있는 프라하와는 다른 점이다. 실상 부다페스트는 건국 1000년을 맞아 19세기에 ‘새로 조성된’ 도시다.
부다페스트는 유럽의 여느 도시와는 다르게 구시가지가 따로 없다. 굳이 구시가지를 찾는다면 왕궁의 언덕에 있는 부다 지역이겠지만 여기에 모든 유산들이 집중된 것이 아니다. 워낙 전쟁을 많이 겪고 침략을 빈번하게 당해 유산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문화유산이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구시가지가 따로 없는 것이다. 13세기에 몽고의 침입을 시작으로 16,7세기에는 오스만 트루크의 침략을 받았고, 그 뒤에는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으며,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중심에 있어 그 포화를 직접 받아야 했다. 그 뒤에는 소련의 지배를 받는 위성국이 되었다가 1989년에 비로소 헝가리공화국으로 독립하였으니 이들의 역사는 침입과 항전으로 점철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의 십자로에 있으면서 이렇게 많은 침략과 전쟁을 겪었다는 것은 역으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항전을 했는가를 증명해준다. 그래서 헝가리는 유럽의 여느 민족보다 자존심이 강하다. 지금은 비록 인구 천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지만 한때 오스트리아와 같이 이중제국을 형성하여 유럽의 반 이상을 지배했던 과거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농담이 ‘배고픈 나라’라는 말이다. 나라이름이 영어의 ‘헝그리Hungry’와 비슷해 이를 빗대어 말하면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게다가 이들 민족이 마자르Magyar족이어서 우리말의 ’머저리‘와 발음이 비슷한데 이를 말했다간 다시 볼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만큼 지금 가진 것은 적어도 자존심이 강한 나라가 헝가리이고 그것이 마자르 인의 민족정신이다.
부다페스트는 우리에겐 특별한 곳이다. 그냥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1년 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페스트의 명동인 바치Váci 거리에 살면서 아내와 둘이서 어디든지 같이 가고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정말 부다페스트는 우리에게 고향처럼 정겨운 곳이 되었다. 지금도 그곳이 눈에 어른거릴 정도다.
아침에는 둘이 아침을 먹고 다뉴브 강을 따라 겔레르트 언덕이나 세체니 다리 건너 부다 왕궁이나 어부의 요새까지 산책하곤 했다. 그러면서 이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들을 부지런히 눈에 담아 두었다. 심지어는 거리의 귀퉁이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나 벽 위의 낙서까지도 눈여겨보았다. 게다가 내가 근무했던 엘테대학교가 국립박물관이 있는 박물관 거리에 있어서 매일 페테피 샨도르 거리를 걸어 다니며 이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부다페스트는 뒷골목 구석구석까지 정말 얘기할 것이 많다. 뭐랄까? 전생에 우리가 살았던 곳을 방문한 것 같이 묘한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다.
가까운 나라, 형제의 민족
유럽에서 혈통상, 언어상, 풍속상으로 우리의 가장 유사한 민족이 헝가리를 이루고 있는 마자르족이다. 이들은 유목민족으로 우랄산맥으로부터 이곳에 왔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훈Hun족으로 동훈족이 몽고족이고, 서훈족이 마자르족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그들은 극구 부인한다. 헝가리를 표기하는 ‘Hungary’가 바로 훈족이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훈족의 용맹한 추장 아틸라Attila가 마자르족의 선조라고 하여 지금도 헝가리 사람 중에 아틸라란 성姓이 있다. 여러 모로 아시아의 유목민과 비슷하지만 유럽에 비해 훨씬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중앙아시아나 몽고벌판에서 그들의 조상이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런데 헝가리의 민속학자인 버라토시 벌로그 베네테그가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동아시아에 왔다가 1929년에 <여명의 나라, 한국>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거기서 우리를 ‘형제의 민족’이라 부르고 일제 식민지 지배에 신음하는 한국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물론 지금 그들의 모습에서 동아시아 민족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인종의 섬’이라 부를 정도로 특이한 민족이었는데 유럽의 십자로에 위치해 있어서 수많은 혈통이 뒤섞여 지금은 유럽인들과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인류학적 화석인 언어를 보면 우리와 같은 어족인 ‘우랄 알타이어’에 속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말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름을 표기할 대도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그 뒤에다 쓴다든지 주어 동사의 어순이 같다는 것이 그 한 예다. 유명한 음악가인 리스트의 경우에 유럽식으로 표기하면 ‘페렌츠 리스트’가 되지만 헝가리는 ‘리스트 페렌츠’로 표기한다. 이런 마자르어와 유사한 유일한 나라가 핀란드로 이들을 묶어 ‘핀우구르어’라 부르기도 한다. 수많은 민족이 오갔던 유럽의 십자로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만큼 여느 유럽어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언젠가 세계자연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헝가리의 호르토바지Hortobágy 대평원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는 오랜 동안 도시화가 안 된 마자르 유목민들이 살던 곳이었는데 사는 모습이 몽고와 유사해 깜작 놀랐다. 머리에 쓰는 모자며 말을 타는 모습이며 심지어 밀납으로 만들어 전시한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비슷했다. 집의 형태도 몽고의 겔과 비슷해 나중에 헝가리 사람에게 혹시 몽고족과 같은 혈통이 아니냐고 했더니 펄쩍 뛰면서 무슨 소리냐고 부인했지만 그곳에서 보았던 인상은 늘 남아있다. 더군다나 이들은 우리와 같이 엉덩이에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곳의 목동들이 먹던 음식이 헝가리를 대표하는 ‘구야시Gulyás’로 우리의 육개장과 비슷하다. 소고기에 감자, 양파 등을 넣고 마늘과 고춧가루에 해당하는 파프리카 가루를 듬뿍 넣어 얼큰하게 끓여낸 것이 정말 우리의 입맛에 맞는다. 이곳을 여행하다가 마땅하게 먹을 게 없어 구야시를 시키면 실패하는 법이 없다. 다만 빵을 같이 주는데 육개장에 빵을 찍어먹는 식으로 생각하면 된다. 파프리카가 흔히 아는 것처럼 단 것이 있고, 우리의 고추처럼 매운 것이 있는데, 매운 것은 우리의 고추와 똑같다. 약간 단맛이 나는 고추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늘은 사실 우리가 자랑하는 육쪽마늘보다 훨씬 질이 좋고 깨끗하며 맛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가져오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나는 게 이들의 마늘이다. 우리는 이 마늘과 고춧가루를 가지고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드물게 마늘과 고춧가루를 먹는다는 사실이 우리와의 친연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번은 헝가리의 학생들에게 우리의 김치와 고추장을 먹여주며 ‘한국의 맛’이라고 가르친 적이 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자기네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며 튜브에 들은 파프리카 잼을 가져왔는데 맛을 보니 우리의 고추장과 비슷했다. 다만 단맛이 나며 우리처럼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우리의 음식은 얼큰하고 시원한데 그런 맛이 아니었다. 서구인들의 입맛에 맞춘 것이리라. 이렇게 언어와 음식, 풍속 등이 우리와 유사한 것이 많아 헝가리에 오래 살다보면 별 불편한 일이 없다고 한다.
이런 음식물이나 생필품을 사기 위해 우리가 자주 갔던 곳이 부다페스트의 중앙시장인데 정말 가볼만한 곳이다. 부다페스트의 남쪽 바치 거리가 끝나고 자유의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헝가리의 졸너이 타일로 지붕을 장식한 마자르 양식의 체육관과 같은 육중한 건물이 있는데 바로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유서 깊은 재래시장이다. 안에는 모든 식자재들이 갖추어져있어 장보기에 적합한 곳이다. 온갖 야채와 과일, 고기, 소시지, 향신료 등 없는 게 없다. 헝가리는 구릉이 대부분인 유럽에서 평야가 발달한 곳으로 특히 야채와 과일이 유명해 우리는 그것을 사러 자주 들르곤 했다. 어느 곳의 유적 못지않게 그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중요하기에 재래시장도 관광의 필수코스가 될 수 있다. 사실 재래시장이야말로 그곳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남대문 시장에 관광객이 많이 오는 이유도 그것이다. 이 중앙시장은 부다페스트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는가를 알기 위해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유럽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
원래 중앙아시아의 우랄산맥 주변에서 살던 마자르인들의 7개 부족이 서진을 해서 지금의 헝가리 지역인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한 것이 896년이며 그 해를 헝가리의 개국으로 삼는다. 그 마자르족을 이끌었던 왕이 아르파드Árpád이고, 이 역사적인 사건을 ‘고향점거’라 부른다. 그들의 조상이자 훈족의 왕인 아틸라Attila가 애초에 차지했던 땅이었기 때문이라지만 원래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변방으로 파노니아Panonia로 불렸던 곳이다. 부다페스트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아퀸쿰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다뉴브 강가에 로마제국 당시 사람들이 살던 집터와 거리 그리고 병영터와 신전 등 로마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로마시대의 유적을 전시한 아퀸쿰 박물관이 있어 둘러보기가 좋다.
정착 당시 아르파드 왕은 원주민의 족장에게 말을 선물하고 대신 흙과 풀과 물을 달라고 하여 그곳을 차지하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전설은 전한다. 주몽이 송양의 비류국을 접수하기 위해 궁궐에 썩은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 오래 전부터 그곳에 살았다 하여 땅을 빼앗은 우리의 고구려 건국신화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하지만 뛰어난 기마술로 전쟁과 약탈을 위주로 했던 이들이 다뉴브 강가에서 차분하게 경작을 하며 살기는 어려웠다. 서유럽 나라들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다가 955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에게 참패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생활방식을 바꾸고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서 유럽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정착해서 60년 동안 무려 43번의 약탈전쟁을 벌였으니 서유럽 사람들이 마자르족이라면 얼마나 치를 떨며 무서워했겠는가. 오죽했으면 기도문에 마자르족의 화살로부터 지켜달라는 문구가 있을 정도였다.
그 일을 주도했던 사람이 게제의 아들 이스트반István이었다. 그는 아버지 게제의 후원에 힘입어 마자르족 최초의 세례를 받았고(그 세례명이 이스트반이다.), 1000년에 헝가리 초대 왕이 되자 로마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왕관을 하사받음으로써 이제는 약탈을 일삼는 변방의 야만인이 아니라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유럽의 국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기에 그 범주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우리가 보통 동유럽이라 부르는 국가들을 그들은 ‘중앙유럽’이라 부르는데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로만 가톨릭이다. 그래서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은 중앙유럽이라 부르고, 그리스 정교를 믿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을 동유럽이라 엄격히 구분한다.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마주 하고 있는 옛 수도 에스테르곰Esztergom에 가면 게제와 이스트반이 건립했다는 당시의 왕궁터와 성당이 있고 로마교황의 왕관을 하사받는 이스트반 왕의 커다란 석상이 그 터를 지키고 있다. 말하자면 이스트반에 이르러 진정으로 헝가리가 기독교 국가로서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896년이 헝가리 땅에 마자르족이 정착한 해라면, 1000년은 부족 공동체가 아닌 어엿한 국가로서의 군사적, 외교적 틀을 갖춘 해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트반은 실질적으로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인 셈이어서 가장 높은 단위인 헝가리의 만 포린트 지폐에는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부다페스트가 헝가리의 수도가 된 것은 13세기 중반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를 에스테르곰에서 부다로 옮겼기 때문이다. 다뉴브 강은 로마제국 시대부터 유럽의 국경이었고 이 때문에 늘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달리 말하자면 ‘유럽의 방패’로서 그 힘든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 역할은 오스만 투르크 침입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 헝가리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헝가리는 러요시 2세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을 겸하고 있었는데 1526년 헝가리에 침입한 오스만 투르크 군대와 싸우다 모하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죽게 되었다. 이에 따라 후계자가 없었던 탓에 왕위는 자연스럽게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이에 따라 오스만 투르크는 헝가리의 중남부를 지배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의 북부를 지배하면서 헝가리는 두 나라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터키의 지배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연합군이 1686년 부다성을 탈환하고 터키를 완전히 몰아낸 1699년까지 무려 170여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헝가리 전역이 쑥대밭이 되면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확실히 수행했던 셈이다. 그렇다고 헝가리가 독립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계속되어 완전히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벗어나 합스부르크 이중제국이 성립된 1867년까지는 터키 지배의 2배에 해당하는 340년의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완전한 독립은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된 때에 이루어진 것이니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40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러기에 헝가리의 문화 속에는 터키의 잔재와 특히 합스부르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일어나라, 헝가리 인이여!”
헝가리 저항의 빛나는 전통도 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시기에 만들어졌다. 첫 번째 시도는 18세기초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라코치 페렌츠 2세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엔 1848년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이 오스트리아에도 전파되어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가 인스부르크로 도망가는 일이 벌어지자 헝가리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나 코슈트 러요시가 이끄는 혁명군이 조직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49년 헝가리의 독립군이 합스부르크 황제군에 대항한 독립전쟁에 패함으로써 독립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서 1848년 3월 15일은 우리의 3.1절처럼 이들에게도 ‘시민혁명의 날’ 혹은 ‘독립의 날’로 기억된다. 그 중심에 헝가리의 민족시인 페퇴피 샨도르Petöfi Sándor(1823~1849)가 있다. 그날 오스트리아 당국에 대하여 검열제도 폐지를 비롯한 12개 조항의 요구서를 낭독했고 독립선언서격인 페퇴피 샨도르의 유명한 시 「민족의 노래」를 낭송하여 독립의 의지를 불살랐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페퇴피는 이렇게 전한다.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사기충천하고 용기백배하여 필벅스(카페이름)로 돌아왔다. 카페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요커이는 선언문을 낭독했고, 나는 「민족의 노래」를 낭독했다. 모두들 환호하며 반겼다.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대학으로 가서 더 많은 젊은이들을 규합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9시경 비를 맞으며 의과대학으로 출발했다. 의대에서 12개 조항과 「민족의 노래」를 낭독하면서 짧은 모임을 가졌는데 이때 대학의 젊은이들이 대거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를 마친 다음 한 무리는 공대로, 다른 한 무리는 인문대로 가서 학생들을 규합하기로 했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이들은 사람들을 규합해 인쇄소를 접수하고 12개 조항을 인쇄하여 군중들에게 나눠주고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국립박물관 앞에 모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때 낭송된 시가 ‘독립선언서’에 해당되는 저 유명한 「민족의 노래」다.
일어나라, 헝가리 인이여, 조국이 부른다!
지금이 그때이니, 지금 아니면 결코 때가 오지 않으리!
노예가 되겠는가, 아니면 자유민이 되겠는가?
이를 묻노니, 그대들 대답하라.
(후렴)
우리 헝가리 인은 하나님 앞에 맹세하오!
맹세하오! 더 이상 노예가 되지 않겠네.
그래서 박물관 거리에 있는 국립박물관은 이 「민족의 노래」를 낭송하고 독립운동의 기치를 올렸던 장소로 유명하다. 해마다 3월 15일 독립기념일이 오면 이 장소에 모여 그날의 상황을 재현한다. 우리도 독립기념일에 그 장소에 갔었는데 선동적인 목소리로 시의 앞부분을 낭송하면 모두가 맹세한다고 뒷부분을 낭송하여 화답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편의 시가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는지 이 「민족의 노래」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근무했던 엘테대학도 그날 시위에 참가했던 문과대학이고 마침 박물관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늘 이곳을 다니면서 그날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페퇴피 샨도르는 이렇게 독립의 불길을 지피고 그 스스로도 독립전쟁의 전사로 참여한다. 그 가족을 선배 시인인 뵈뢰시머르티에게 부탁하고 홀연히 전선으로 나가 독립전쟁에 자신의 피를 바친다. 우리의 이육사나 윤동주처럼 자신의 시에 독립의 염원을 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래서 부다페스트에는 헝가리 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민족시인 페퇴피 샨도르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특히 바치 거리에서 국립박물관에 이르는 길에는 페퇴피 샨도르 거리가 있고, 다뉴브 강에는 가장 아래쪽에 페퇴피 다리가 있으며, 강변에는 그의 역동적인 동상이 우뚝 서서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그 동상은 팔을 높이 치켜들고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일어나라, 헝가리 인이여!‘라고 절규하는 듯하다. 우리가 살던 집이 바로 그 근처여서 거의 매주 이곳을 지나다니며 페퇴피를 대면하곤 했다. 이 위대한 독립전사이자 시인의 동상에는 늘 헌화가 그치지 않아 헝가리 사람들의 마음속에 페퇴피가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혹은 ‘적과의 동침’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는 헝가리의 독립정신은 제국 내에서도 두드러져 결국 합스부르크 이중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일을 주도했던 사람이 헝가리의 총리를 지낸 대귀족 출신의 안드라시Andrássy Gyula(1823~1890)다. 1866년 안드라시는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고 비엔나로 엘리자베트 황후를 찾았고 황후는 독립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이 야성적인 사내에게 흠뻑 빠졌다. 안드라시의 생각은 요제프 황제가 헝가리 왕이 되어 헝가리를 온전히 통치하고 헝가리 역시 동등한 자격으로 이중제국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황후도 여기에 동의해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게다가 프로이센과의 쾨니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참패를 당하면서 비엔나로 진격해오는 프로이센군을 피해 황후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다페스트로 피신했는데 도저히 더 물러설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황후는 요제프에게 “루돌프(아들) 이름을 걸고 부탁하는데, 이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지는 말아주세요.”라고 편지를 보냈다. 결국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아내마저 헝가리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요구하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요제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타협에 동의하고 말았다. 드디어 1867년 2월 17일 마차시 성당에서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의 헝가리 왕 대관식이 거행되어 안드라시가 요제프에게 헝가리 왕관을 씌워주고 “국왕폐하만세!”를 부름으로써 이중제국이 성립되게 되었다. 당시의 장면이 기록화로 전해지며 성당의 성유물관에는 헝가리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보내준 엘리자베트 황후의 상이 보관되어 있다.
헝가리의 총리인 안드라시는 그의 외교적 역량을 인정받아 이중제국의 첫 외무부장관이 되어 어려운 난제들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국민군을 조직하여 헝가리의 주권확립에도 노력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오스트리아나 헝가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결국 두 나라가 다 이득을 보는 윈윈전략이 된 것이다. 안드라시는 이일로 급진파의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헝가리를 제국 내의 식민지 상태에 있는 여느 나라와는 다르게 주권국의 지위에 놓음으로써 헝가리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이런 저항과 외교적 노력이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 순응했던 보헤미아와는 다른 것이었고 결국 헝가리의 자존심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공적으로 부다페스트의 이스트반 대성당에서 영웅광장에 이르는 ‘세계문화유산’의 아름다운 길을 안드라시 거리로 불러 그를 기린다.
여러 가지 정국의 변화로 인해 황후 엘리자베트는 답답한 비엔나의 황실보다도 헝가리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많은 시간을 부다페스트 교외에 위치한 괴될뢰Gödöllöi 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우리도 교외선을 타고 그곳에 가 보았는데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별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소박했다. 엘리자베트는 비엔나의 화려하고 요란스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자신만의 조용한 시간을 주로 보냈던 것이리라. 이중제국의 외무부장관인 안드라시와 애인관계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고 서로를 진정 이해하는 친구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헝가리 국민들도 엘리자베트를 좋아해 시시라는 애칭으로 그녀를 부르고 진정 자신들의 왕비로 여겼다. 다뉴브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에 엘리자베트 다리와 요제프 다리가 있었는데, 요제프 다리는 ‘자유의 다리’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엘리자베트 다리는 그 이름이 그대로 유지된 것을 보더라도 시시가 헝가리 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다리를 건너 부다 쪽으로 가면 의자에 앉아있는 엘리자베트의 동상이 있고, 왕궁 주변에는 ‘시시Sisi’라는 카페도 있어 헝가리 인들의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중제국의 불편한 동거는 1918년 1차 세계대전에 패함으로써 끝나게 된다. 하지만 1920년의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헝가리는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에게 국토의 2/3에 해당하는 땅을 내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특히 루마니아에게 넘어간 트란실바니아는 마자르 족이 살고 있었던 곳이기에 국토도 넘어가고 국민들도 뺏기는 이중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마자르의 자존심, 이중제국의 영광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1956년 헝가리 혁명과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헝가리의 절망감과 복잡한 민족문제는 그 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편에 서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부다페스트는 2차 세계대전의 격전장이 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같이 소련의 지배 하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운이 없을까? ‘머피의 법칙’처럼 하는 것마다 일이 꼬여 계속 잘못된 선택을 했고 결국 몰락의 길을 자초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저항의 정신과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 마자르 족이 그냥 소련의 지배에 묵묵히 순응하지는 않았다. 1956년 제 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시발로 헝가리 국민들은 독자적인 국가정책 수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소련은 17개 사단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0월 23일 시위가 시작되어 11월 4일에 소련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는데 사망자만도 2,500명에 이르고 부상자는 13,000명에 달할 정도로 격렬했다. 이 헝가리 혁명을 통해 민중들의 요구를 수용한 사람이 수상 임레 나지Imre Nagy(1896~1958)였다. 그는 헝가리의 독자노선을 추진해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고 헝가리를 중립국화 하는 등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했지만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2년 뒤 비참한 죽음을 맡게 되는 비운의 정치가다. 하지만 현재 헝가리 국민들의 염원을 담은 그의 동상은 국회의사당 뒤 코슈트 러요시 광장에서 자유 광장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물끄러미 사람들을 쳐다보는 개혁적인 정치가의 허망한 모습은 보는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소련제 탱크 앞에 좌절된 민주주의의 꿈을 보는 듯하다. 1989년 헝가리 공화국이 수립되고 처형이 위법이라고 판결됨에 따라 임레 나지는 명예를 회복하고 국민의 영웅으로 부활했다.
이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을 소재로 쓴 시가 저 유명한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다. 이 시는 이렇게 비장하게 시작된다.
다늅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數發의 쏘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처음 부다페스트에 가면서 1961년 ≪사상계≫에 실린 그 시를 복사해 갔다. 그래서 헝가리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어주고 한국이 얼마나 헝가리에 관심을 가졌는가를 얘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의 소재가 됐던 당시 부다페스트에서 죽은 소녀의 사진을 찾으려고 시도를 하기도 했다. 과연 그 사건이 정말인지 알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1956년’은 헝가리사람들에게 특별한 해여서 기록 사진이 많았지만 결국 총탄을 맞아 죽은 소녀의 사진은 찾지 못했다. 2500명 정도가 사망했으니 그 속에 어린 소녀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이 시를 자세히 보니 김춘수는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을 한국의 상황과 일치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한강의 모래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까,/죽어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잡히는 것 아무것도 없는/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갔을까”라고 한강에서 죽어간 소녀를 애도하고 있다.
한강의 소녀는 도대체 누구이며, 왜 죽어갔을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4.19에서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급박한 형국이었고 그 과정에서 이 소녀는 희생된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부다페스트에서 죽은 소녀와 한강에서 죽은 소녀를 일치시켰던 것이다. “부다페스트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라고 하여 김춘수는 반공이 아니라 탄압에 항거하는 저항의 의미로 부다페스트에서 죽은 소녀의 죽음을 얘기한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고 말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얘기하면서 우리의 자유에 대한 저항을 말했던 것인데 냉전시대 교과서에서는 ‘한강 소녀’ 부분이 빠지고 부다페스트에서 죽은 소녀만 부각되어 ‘반공시’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일종의 교과서 왜곡인 셈이다.
부다페스트의 상처와 영광, 왕궁의 언덕
부다페스트는 다뉴브 강을 끼고 동쪽으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전반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 페스트 지역을 보면 앞이 툭 터진 평야를 볼 수 있다. 여기에 도시가 형성된 것은 몽고의 침입으로 첫 도읍이었던 에스테르곰이 공격을 받아 황폐해진 뒤다. 1241년 벨라 4세가 도읍을 이곳으로 옮기고 부다 왕궁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에서 부다 왕궁처럼 수난을 많이 당한 건물도 없다. 잦은 전쟁으로 왕궁은 늘 수난을 당해 부서지곤 했다. 파괴와 재건이 반복된 왕궁이야말로 상처와 영광을 간직한 헝가리의 역사 그 자체다.
부다의 황금시기는 15세기 후반 마차시Mátyás(1440~1490)왕 시절이다. 헝가리에 르네상스를 꽃피우고 부다 왕궁을 르네상스식으로 재건하여 유럽에서도 최고의 건물로 손꼽힐 정도였다. 지금 부다 왕궁의 모습이 그때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마차시 왕의 강인한 모습은 헝가리 1,000포린트 지폐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왕궁 안에 있는 미술관에는 그의 두상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 왕궁의 모습은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과 2차 대전이 끝난 1950년대에 재건된 것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위주로 하여 고딕에 바로크식까지 가미되었다. 왕궁에 들어서면 마자르족을 이끌고 이곳에 왔던 건국의 영웅 아르파드를 낳았다는 독수리를 닮은 투룰상이 ‘왕의 칼’을 발에 쥐고 다뉴브를 향해 날아오를 듯 버티고 서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르파드의 어머니가 투룰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르파드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새는 왕가의 상징으로 왕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뉴브 강 쪽 왕궁의 앞뜰에 말을 탄 청동상이 있는데 바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자였던 유진 왕자로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1세를 섬겼던 인물이다. 이 청동 기마상은 1697년 그가 지휘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군이 오스만트루크에게 젠타에서 대승한 것을 기념하여 1900년에 세워진 것이다.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이니 두 나라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는 의미에서 이 청동상이 제작되었을 것이다.
왕궁에는 현재 헝가리 국립미술관,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 국립 세체니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어 옛 영광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왕궁의 언덕’이라는 바르 헤지 위에 우뚝 솟은 왕궁의 모습은 그 자체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특히 해질 무렵이나 야간에 유장한 다뉴브를 배경으로 우뚝 선 왕궁의 모습은 웅장하고도 의연하다. 사자상이 조각된 세체니 다리와 부다 왕궁은 바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다페스트의 상징이다. 특히 저녁이나 야간의 모습이 더욱 그렇다. 만약 한 장의 사진으로 부다페스트를 설명한다면 야경으로 보는 세체니 다리와 부다 왕궁일 것이다. 밑으로는 다뉴브 강이 흐르고 사슬처럼 조명이 점점이 박힌 세체니 다리와 저 멀리 우뚝 솟은 부다 왕궁이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장면이야말로 바로 부다페스트의 확고한 상징이자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처음 비엔나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헝가리로 들어오는데 부다페스트 상공에 이르자 저 아래로 사슬처럼 조명이 밝힌 세체니 다리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다뉴브 강위에 점점이 박힌 세체니 다리의 조명! 정말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그 다리의 조명을 보고 비로소 부다페스트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왕궁에서 마을이 있는 부다 지역으로 가다 보면 18,9세기의 고전주의 혹은 바로크 풍의 집들이 즐비한 동네가 나오는데 우리Úri거리이다. 그곳 중심에 흰색으로 단아하게 지어진 옛 부다 시청 건물이 있으며 주변으로 온통 당시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18,9세기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언젠가 이곳에 갔다가 200년 된 빵집에 들어가 우리의 들깨를 넣은 것 같은 헝가리 전통 빵을 샀던 기억이 있다. 그 맛도 맛이지만 집과 동네의 분위기가 그 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아서 감회에 젖은 적이 있다. 그 거리에서 광장으로 나오면 그 중앙에 삼위일체 탑이 있다. 이곳은 중세에 시장이 있었던 곳인데 이 탑은 1691년 페스트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18세기 초에 시위원회가 세웠다고 한다. 꼭대기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삼위일체 탑의 앞에 고딕 양식으로 우뚝 솟은 건물이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유서 깊은 마차시 성당이다. 고딕 양식의 외관과 졸너이 타일로 장식된 마자르 양식의 지붕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원래 이 성당은 부다페스트로 도읍을 옮긴 벨라 4세에 의해 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파괴되어 14세기에 현재의 모습처럼 고딕식으로 재건되었다. 본래 이름은 ‘성모 마리아 교회’인데 마차시 왕에 의해 80m에 이르는 고딕식 마차시 탑이 세워지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마차시 왕가의 문장과 왕의 머리카락이 보관되어 있기에 마차시 탑으로 불려진 것이다. 오스만 트루크 시대에는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었지만 그 뒤 이중제국 시절 예전의 건축자재를 다시 사용해 지금의 고딕식 건물로 재건축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마차시 성당은 헝가리의 자존심이다. 여기서 수많은 왕들의 대관식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마차시 왕의 결혼식이 거행된 곳도 여기이며, 합스부르크 이중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요제프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 영광의 날 리스트는 「헝가리 대관 미사곡」을 작곡해 직접 지휘를 하기도 했다. 이민족의 침략에 저항하여 민족혼의 불을 당겼던 곳도 바로 이 마차시 성당이다. 그래서 특이하게 지금도 주일의 대미사를 마친 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헝가리의 「애국가」를 합창한다.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애국가」를 부른다니! 이 얼마나 희한한 광경인가! 하지만 부다페스트에선 그것이 자연스럽다.)
마차시 성당을 나오면 그 주변에 네오고딕 양식의 뾰족 지붕을 가진 ‘어부의 요새’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몽고 쪽의 라마탑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고깔모자를 형상화한 것 같기도 한 7개의 성채는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는 건축물로 기획되어 1902년에 마차시 성당을 재건축한 슐레이크에 의해 완공되었다. 7개의 성채는 마자르 7부족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애초 18세기에 성벽이 있었던 곳을 활용하여 새로 덧붙여 지은 것으로 건물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다뉴브 강의 풍광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어부의 요새로 불리게 된 것은 이 성 아래에 어부들이 살았고 그들이 이 성채의 방어를 맡았기 때문이다. 원래 어부의 요새는 마차시 성당을 보조하는 기념물로 건축되었지만 지금은 시원한 다뉴브의 풍광과 잘 어우러져 성당보다 더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다.
마자르 인의 자존심
부다페스트는 수많은 전화를 겪으면서 도시가 파괴되었고 그 도시를 다시 재건하는 사업이 건국 1,000년이 되는 1896년에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파리가 19세기 오스만 양식에 의해 정비되듯 당시 부다페스트도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대부분 재건축되고 정비되었다. 그래서 부다페스트의 도시적 이미지는 우아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준다.
자, 우선 어부의 요새에서 내려와 다뉴브 강을 건너 페스트 지역으로 가보자. 왕궁과 페스트 지역을 잇는 그 유명한 다리가 바로 세체니 다리다. 모두가 인정하는 부다페스트의 진정한 랜드 마크다. ‘가장 위대한 헝가리 인’이라는 세체니Széchenyi István(1791~1860)백작에 의해 건설된 다리여서 그렇게 부른다. 그는 헝가리의 개혁가로 아버지와 함께 사재를 털어 다리의 건설과 과학아카데미 설립 등 1830년대의 개혁을 주도했지만 합스부르크와 타협함으로써 급진파와 갈등을 일으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헝가리의 5,000 포린트 지폐에는 이러한 공로를 기려 그의 초상을 새겨 넣었으며 다리 건너 헝가리 학술원 앞에는 그의 동상이 자신이 세웠던 다리와 다뉴브 강을 바라보고 있다.
네 귀퉁이에 네 마리 사자가 앉아있는 이 유명한 다리는 파리의 에펠탑처럼 부다페스트의 상징으로 확고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영화 「글루미 선데이」에 등장하여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탔다. 우리도 저녁을 먹고 늘 다뉴브 강변을 걸어 세체니 다리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저녁에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 이 다리 주변이어서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거리의 악사가 있어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나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했다. 음악이 어떤 장소와 만나면 그 감동이 증폭되는데 다뉴브 강의 다리 위에서 연주되는 그 곡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어두운 밤, 잔잔히 흐르는 다뉴브 위에서 들리는 그 구슬픈 가락은 정지된 풍경처럼 우리의 뇌리에 남아있다.
다리 건너 다뉴브 강변에서 가장 눈에 띄게 화려한 건물은 고딕과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국회의사당이다. 인구 천만 명밖에 안 되는 조그만(?) 동유럽의 국가에서 이렇게 거창하게 국회의사당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한참 잘 나갈 무렵인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당시 건국 천 년을 맞아 뭔가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어 마자르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고 그래서 공모한 결과 당선된 작품이 부다페스트 기술대의 교수 임레 쉬테인들의 작품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면서 비엔나의 국회의사당을 그리스 신전 모양으로 지었던 것처럼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은 입헌군주제의 발상지인 런던의 그것을 모방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런던의 국회의사당과 유사하다. 네오고딕 양식을 위주로 바로크와 르네상스 양식을 혼합하여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의 길이는 268m, 최대 넓이는 123m이며 르네상스 양식의 둥근 돔의 높이는 96m로 건국 원년인 896년과 일치한다. 외관도 화려하지만 내부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이중제국을 이루었던 비엔나의 국회의사당을 능가하기 위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내부를 장식했다 한다.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지어진 건물이니만큼 모든 자재와 기술을 헝가리 자체의 능력으로 충당했다. 기술이 부족하면 외국의 기술진에게 그 기술을 배워 현장에 적용했다고 할 정도로 민족자존의 원칙을 지켰다. 그래서 지붕에 헝가리 왕과 지도자들의 동상이 서 있으며 내부의 중앙에도 16명의 헝가리 지도자 동상이 원주 위에 서있다. 이 국회의사당이야말로 이중제국의 성립과 건국 천 년을 맞아 세계사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는 마자르 민족의 자존심과 기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것이리라. 이 웅장한 국회의사당을 보고 있으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헝가리의 영광이 느껴진다.
그 국회의사당 주변으로 네 명의 지도자 동상이 있는데 그들이 내세웠던 민족적 자존심을 세웠던 인물들이다. 시대별로 보면 남쪽에 위치한 동상이 라코치 페렌츠Rákóczi Ferenc(1676~1735)로 1703년 트란실바니아에서 농민과 합세하여 합스부르크에 대항했지만 실패하여 망명에 올랐던 인물이며, 북쪽에 위치한 동상은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1802~1894)로 1848년 합스부르크와의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인물로 이 광장의 이름을 남긴 장본인이다. 같은 북쪽에 카로이 미하이Károlyi Mihály(1875~1975) 동상이 있는데 1차 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된 헝가리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으나 다음 해 망명을 했던 인물이며, 자유 광장 쪽으로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이끌었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어 처형됐던 총리 임레 나지의 동상이 있다. 이렇게 보면 그들 모두는 마자르 민족의 자존심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헝가리 역사가 그렇듯이 비운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역사투쟁’이라고 했던가? 비록 현실에서는 힘이 약하여 졌지만 그들의 좌절과 패배는 민족의 자존심을 세운 자랑스러운 자취로 남아 마자르 인의 가슴 속에 살아있을 것이리라.
천 년 뒤에 부활한, 영광의 기념물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건물들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 건국 천 년을 기념하여 재건축 되거나 새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부다 왕궁과 마차시 성당이 그렇게 재건됐으며 자존심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이 또한 건국 천 년을 맞아 새로 지어졌다. 여기에 또 기념비적 건물이 페스트 지역의 중심에 우람하게 서 있는 이스트반 대성당이다. 페스트 지역의 랜드 마크라고 부를 만한 이 성당은 헝가리 건국 천 년을 기념하여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로 헝가리에서는 가장 큰 성당인 셈이다. 역시 마자르 민족의 자존심을 살린 요제프 힐드와 미클로시 이블의 작품이다. 1848년 기공식을 가졌지만 독립전쟁으로 인하여 건설이 중단되었다가 1851년 다시 재개되어 1905년에 마무리 되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체의 모양은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중앙에 돔이 있어 그 높이가 국회의사당과 같은 96m로 헝가리 건국의 896년과 일치하며 정치와 종교가 하나일 수 없다는 제정일치의 이념을 보여준다. 사실 국회의사당과 이 성당은 부다페스트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로 96m의 높이를 건국의 해와 일치시켜 천 년 뒤에 그 영광을 정치와 종교로 각각 재현한 셈이다.
내부도 웅장하고 화려한데 이스트반 왕이 성모 마리아에게 헝가리 왕관을 바치는 모습이 오른 쪽 벽에 그려져 있다. 자신의 외아들 임레를 잃고 자신이 죽은 후 이 나라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혹은 이 나라가 가톨릭을 신봉함으로써 당당하게 유럽의 일원이 됐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기도 하다. 화려한 돔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카로이 로츠의 작품이다. 제단 뒤의 이스트반 예배당에는 이스트반의 오른 손 뼈가 보관되어 있어 동전을 넣으면 그 손이 ‘성스러워지는 오른 손’으로 바뀌어 기도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성당에서는 주말에 늘 음악회가 있어 주로 「아베 마리아」 공연을 하는데 음악적 수준은 별로지만 이 장엄한 성당에서 음악을 듣는 분위기가 기막히다. 신자가 아닌 경우에는 성당을 들어가 미사를 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음악회는 편하게 참가할 수 있어 좋다. 우리도 따뜻한 봄날 이곳에서 하는 아베마리아 저녁 공연을 보았는데 음악적 수준보다도 그 분위기가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스트반 대성당에서 영웅 광장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이 안드라시 거리다. 부다페스트에서 명소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거리로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곳이다. 이 유서 깊은 거리는 이중제국이 수립되고 당시의 총리였던 안드라시가 1868년에 오스만에 의해 정비된 파리를 보고나서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집을 헐어내고 좁은 골목을 정비하여 직선의 대로를 만들고 집들도 5층짜리 큰 저택을 지어 거리를 정비한 것이다. 집들은 대부분 네오 클래식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기품이 있으면서도 육중한 느낌을 준다. 부다페스트의 거리와 건물 표정을 전형화 시킨 것이 바로 이 거리다. 안드라시 거리는 파리의 중심대로나 비엔나의 링 스트라세처럼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거리인 셈이다.
이 거리에 있는 가장 유명한 건물이 국립 오페라 극장이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한 건물로 내부 또한 화려하기 짝이 없다. 말발굽 모양의 박스는 황금색으로 빛나며 좌석과 바닥은 온통 붉은 벨벳으로 싸여져 황금색과 조화를 이룬다. 파리나 비엔나의 오페라 극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우리도 이 극장과 얽힌 사연이 있다. 아들이 성탄절 무렵 우리가 있는 이곳에 오기로 했고 그때를 기념하여 이 유서 깊은 극장에서 오페라를 한편 볼 생각으로 예약을 하려고 했다. 해서 한 달 전에 사이트에 들어가 성탄절에 주로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의 표를 사려고 했더니 이미 다 팔린 것이 아닌가. 티켓을 살 수 있는 사이트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공연은 몇 달 전에 이미 매진된다고 한다. 소득과 관계없이 음악을 애호하는 헝가리 인들의 삶의 여유가 부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곳이 위대한 음악가 리스트의 고향이 아니던가.
길을 건너 조금만 위쪽으로 올라가면 리스트 음악원과 기념관이 있다. 그리 요란하게 꾸미지는 않았지만 리스트의 유품들을 잘 정리하여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와볼 만하다. 아내가 마침 그곳 안드라시 거리의 화실에서 유디트라는 헝가리 화가와 그림을 같이 그려 그곳을 자주 찾곤 했다. 거리나 건물들이 차분한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잘 정비되고 고색창연하여 걷기는 그만이었다.
안드라시 거리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조성된 영웅 광장이 나온다. 천 년 뒤에 부활한 영광이 마무리 되는 지점이다. 그 영광의 길은 부다 왕궁과 마차시 성당에서 시작해서 세체니 다리를 지나 국회의사당을 돌고 이스트반 대성당을 거쳐 여기 영웅 광장에 이르러 멈춰진다. 중앙의 기둥에 대천사 가브리엘 상이 우둑 솟아있고 주변에 마자르족의 지도자 아르파드와 그를 따르던 7명 족장의 기마상이 있다. 가브리엘 천사장의 인도로 이곳에 마자르 족이 정착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그 뒤로 헝가리를 빛낸 14명 영웅들의 입상이 반원형의 열주 사이로 자리 잡고 있다. 맨 처음을 장식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스트반 왕이고 그 옆으로 벨라 4세, 마차시 왕 등이 보이며, 오른 쪽 열주 사이에는 독립의 영웅인 코슈트 러요시도 보인다. 입상의 하단에는 헝가리 역사를 14장의 그림으로 표현한 부조가 있는데 맨 처음에는 이스트반 왕이 교황에게 왕관을 받는 장면이 새겨져 있고 맨 마지막에는 이중제국의 요제프 황제가 대관식을 치르는 장면이 새겨져 있어 영광의 순간들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했다.
가브리엘 상 앞에는 무명용사를 기리는 제단이 있어 바닥의 동판에 “마자르 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그들 자신을 희생한 영웅들을 기억하며”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어느 면에서 위대한 왕이나 영웅들보다 이들이 진정한 영웅이고 이 광장의 주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상보다도 앞 쪽에 이들을 위한 기념제단을 만들었던 것이리라.
영웅 광장 뒤로 넓은 시민공원이 펼쳐져 있는데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성채가 있다. 일명 ‘드라큐라 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바이다 후너드 성으로 마차시 왕의 아버지인 야노시 훈야디가 트란실바니아에 가지고 있던 성을 복제한 것이다. 건국 1,000년을 맞아 헝가리 여러 지역의 건물들을 한 곳에 모으기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성 주변에 인공호수가 있고 그 안에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교회, 농업박물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언젠가 한국에서 원빈이 나오는 ‘악마의 유혹’이라는 커피 광고를 이곳에서 찍어 한국 사람들에게는 사진을 찍는 명소가 됐다.
이 영광의 길을 따라 유럽대륙(영국을 제외하고)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지하철 1호선이 달린다. 건국 1,000년을 맞아 1896년에 건설됐으니 1863년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셈이다. 그래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동판이 1호선이 시작되는 뵈뢰슈머르티 역에 붙어 있다. 바치 거리가 시작되는 뵈뢰슈머르티 광장에서 시작되는 이 지하철은 시민공원까지 이어지는데 갱도가 지면에 붙어있을 정도로 낮고 속도가 느려 놀이동산의 관광열차를 타는 기분이다. 우리가 바로 이 근처에 살아 늘 이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조그맣고 낡은 차량은 달릴 때마다 덜컹거리며 삐걱대고 하여 기계로 이루어진 지하철이 아닌 당시의 마차같이 정겨운 느낌이 들곤 했다. 그 1호선 지하철 역시 천 년의 영광을 재현하는 상징인 것이다.
온천 위에 세워진 도시
다뉴브 강변에 위치한 이 아름다운 도시는 강물뿐만 아니라 뜨거운 온천수도 솟아나는 곳이어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온천을 보유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하더라도 무려 118개에 이르며 하루에 공급되는 온천수는 3만t에 달한다고 한다. 목욕을 좋아하던 로마인들이 이미 1세기에 14개의 온천원을 확보하여 사용했으며, 목욕을 중시했던 터키 지배 기간에도 많은 목욕탕들이 만들어졌다. 이 당시 만들어졌던 대표적 온천이 ‘왕의 온천’이라는 키라이 온천과 루더시 온천이다.
우리는 매주 엘리자베트 다리 건너 루더시 온천으로 목욕을 가곤 했다. 이곳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물이 좋다는 곳인데 우리의 목욕탕처럼 47도가 넘는 뜨거운 물이 솟아나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주 알맞은 온천이었다. 남자를 존중하는 이슬람 방식으로 주로 남자 전용으로 욕장을 운영하는데 일주일에 하루 정도 여성 전용 목욕일이 있다. 그리고 토, 일요일은 남녀가 수영복을 입고 같이 목욕하는 날이어서 우리는 주로 그날을 이용했다.
터키 지배 시절인 16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둥근 돔에 여러 색깔의 많은 원형창이 나 있어서 그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혀주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형형색색으로 비치는 햇살은 목욕탕의 수증기와 어울려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게다가 허브 향이 나는 우리식의 습식 사우나까지 있어서 목욕하기가 그만이었다. 400년이 넘은 터키 시절의 역사유적에서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노라면 다른 시공간에 우리가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온천은 영웅 광장 뒤의 시민공원에 위치해 있는 세체니 온천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온천으로 네오 바로크 양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은 물론 엄청난 규모의 온천수영장까지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로 와서 놀기가 좋다. 우리도 조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하루 종일 논 적이 있는데 나중에 어린 조카들이 집에 가기 싫어해 억지로 데리고 나온 적이 있다. 햇볕에 일광욕을 하기 좋아하는 서구인들에게는 아주 적당한 장소다. 이곳에서는 물에 몸을 담그고 물 위에 체스판을 띄워 놓고 체스를 두는 할아버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온천은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겔레르트 온천일 것이다. 겔레르트 언덕 밑의 겔레르트 호텔에 달려 있는 온천으로 터키 지배 시절 온천이 있던 자리에 새로 건축된 곳이다. 헝가리의 역사와 신화를 표현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아르누보의 장식이 어울려 귀족적이고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는 한국에서 목욕탕을 가듯이 매주 온천을 갔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시 온천을 좋아하여 그곳에서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한번은 유럽 여러 곳에서 사는 할머니들이 이곳 온천에 단체로 온 적이 있는데 우연히 온천에서 만나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1970년대 독일에 간호사로 왔던 분들인데 지금은 이곳 유럽에 정착하여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나중에 비엔나에서 살고 계신 분과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분의 안내로 그라츠를 가기도 했는데 세계 어디를 가든지 주변의 환경과 잘 적응하여 살아가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부다페스트는 물의 도시다. 다뉴브가 유장하게 흐르고, 이렇게 많은 온천이 뜨거운 물을 뿜어내고 있다.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수많은 온천이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에 집중된 것도 특이한 일이다. 다뉴브 강 밑으로는 뜨거운 온천의 기운이 흐르는 것이리라. 어쩌면 마자르 인의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이 물에 녹아 그렇게 뜨거운 온천을 뿜어대는 것이 아닌가.
권순긍∙문학평론가. 저서 <우리소설 토론해 봅시다>, <역사와 문학적 진실>,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국고전소설>,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교육인적자원부 교과서 검정․심의의원, 대학교육협의회 대학입학전형 심의위원장 역임. 현재 한국고소설학회 회장. 세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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