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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독자시읽기/박성호/꿈을 찾아 현실 유영-송찬호, 「고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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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시읽기/박성호
꿈을 찾아 현실 유영-송찬호, 「고래의 꿈」
고래의 꿈
송 찬 호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길 듣는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뻘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쏜살같이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꿈이 하나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 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2009, 40∼41쪽.
송찬호의 시작품을 읽기 전, 송찬호 시인의 이력을 먼저 살펴본다. 송찬호 시인은 1959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경북대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금호강」, 「변비」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10년 동안의 빈 의자>(문학과지성사,1994), <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 2000),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2000),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이 있다. 2000년 동서문학상과 같은 해 김수영문학상, 2008년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시집 중 최근 시집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의 시집을 꺼내든다. 귀퉁이가 접힌 페이지를 펼쳐보니, 「고래의 꿈」이 편의점 삼각김밥의 크기로 접혀있다. 꿈. 고래의 꿈이란 뭘까. 시를 정독하며 반문한다. 셰뮤얼 존슨의 방식을 활용해 꿈의 반대말을 노트에 적어본다. 범박하지만 꿈의 반대말은 현실이라고 쓴다. 그러나 시를 다시 읽고 나서 바로 수정한다. 꿈의 반대말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말에 스스로 만족해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라캉의 전언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루어 질 수 없는 막연한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는 말을 수긍하기에 이른다. 그 욕망은 얼핏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달리 보면 이미 경험했던 것으로의 회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꿈은 인간의 본성을 잡아끌고, 현실의 삶을 환상 속으로 잡아끄는 마력을 발생시킨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래서 꿈은 꿈’이고, ‘그래도 꿈은 꿈’일 테지만, 송찬호의 시에서 이야기하는 꿈은 과거의 꿈도, 그렇다고 미래의 꿈도 아닌 현재 진행형의 꿈의 상태로 읽힌다.
언젠가 가수 바비킴의 노래 ‘고래의 꿈’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왜 하필 고래의 꿈일까?’라고 반문하곤 했다. 반복적으로 흥얼거리다보니, 바다라는 넓은 장소에서 가장 큰 꿈을 품을 수 있는 바다동물은 고래가 제일 적합하다는 개인적 결론에 이른다. 고래는 바다생물 중 유일한 포유류라 할 수 있다.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는 점에서 고래는 매우 매력적인 동물임에 틀림없다. 옛날에는 뭍에서도 생활을 하였다고 하니, 어쩌면 태초의 유목민으로 불려도 좋을 듯하다. 바비킴의 노래 속에서 유영하는 고래가 송찬호 시인의 시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고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할수록 멀어지는 꿈을 꾸고 있다는 다소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다시 송찬호의 시 「고래의 꿈」으로 돌아와, 시를 재독한다. 「고래의 꿈」 속의 시적 화자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고래의 꿈을 꾸는 것보다는 고래를 꿈꾸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언젠가 고래를 만날 날을 생각하며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는 것이다.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습과 고래가 등에서 뿜어내는 물줄기의 모습이 닮았다는 상상력에서 잠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상상이 동심을 유발하는 시인의 고도의 전략(?)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노상 꿈은 유치한 것이 아닌가라는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작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유독 화분이 지니는 의미가 커 보인다. 화분은 고래와 시적 화자를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화분은 안테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시적 화자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고래의 꿈에 한 발 더 나아가게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형상화한다. 화분에서 물이 뿜어져 오르면 오를수록 시적 화자의 방은 심해가 된다. 심해에 잠긴 화자는 이제 고래 방송국과 주파수를 맞추면서 그들의 허밍에 귀 기울인다. 고래 방송국을 즐겨듣다가 방송이 들리지 않을 때는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아득히 멀지만 화자에게 고래는 놓을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시적 화자가 얼마나 고래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은 시적 화자의 행동에 대해 다소 냉소적으로 일관한다. “고래는 사라져 버렸어”라고 말이다. 화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어떤 사람들의 충고에도 꿈은 흔들리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 화자는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다는 소식과 농게 가족이 새 뻘집으로 이사를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화분에서 분수가 많이 자란만큼 시간은 흐르고 고래의 꿈을 좇던 화자도 어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미심장하게도 꿈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과거는 늘 현재 속에 존재하면서 현재를 진행시킨다. 송찬호 시인의 「고래의 꿈」 속의 시적 화자도, 나도 모두 이미 한번 쯤 경험했을 꿈을 찾아 현실을 유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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