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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서정시 산책/장종권/사랑한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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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 산책/장종권
사랑한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장미의 내부
벌레 먹은 꽃잎 몇 장만 남은
절름발이 사내는
충혈된 눈 속에서
쪼그리고 우는 여자를 꺼내놓는다
겹겹의 마음을 허벅지처럼 드러내놓고
여자는 가늘게 흔들린다
노을은 덜컹거리고
방 안까지 적조가 번진다
같이 살자
살다 힘들면 그때 도망가라
남자의 텅 빈 눈 속에서
뚝뚝, 꽃잎이 떨어져내린다
―최금진 시집 <황금을 찾아서>(창비, 2011. 10. 25) 중에서
사람들이 다 떠나도 끝내 사람 하나는 남는다. 사랑이 모조리 시들어도 사랑 하나 모질게 시들지 않고 남는다. 사람은 본래 반쪽이다. 하나이지만 온전한 하나가 아니다. 그러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짝을 찾으며 기다린다. 그러니 완전한 척 해보아야 쓸 데가 없다. 완성된 척 해봤자 허당이다. 혼자서는 왠지 쓸쓸하고 외롭고 불안하다. 반쪽이기 때문이다. 아직 반쪽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처 받지 않은 가슴에 피는 꽃은 덜 아름답다. 상처 받은 가슴 속에 피는 꽃이야말로 생명보다 소중하다. 아름답다. 시들어도 아름답다. 시들어도 꽃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꽃밭에서 무데기로 피는 싱싱한 꽃들이야 세상의 아름다운 꽃들이다. 그러나 꽃밭도 항상 그 꽃밭이 아니다. 그러니 꽃이라고 해서 항상 건강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꽃은 변함없이 아름답다.
노을이 덜컹거리는 꽃밭에서 벌레 먹은 꽃잎 몇 장 손에 들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온갖 비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꽃잎이어도 사랑한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다. 우리는 이렇게 미안해 한다. 죽어도 버릴 수 없는 사람 하나 남아 있다면, 죽어도 떠나지 않는 사랑 하나 남아 있다면, 우리는 아름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꽃은 끊임없이 피게 될 것이다. 피었다가 시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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