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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특별초대석/백인덕/해설/극구隙駒와 작약雀躍;시정신의 존재적 양태樣態―임강빈 시인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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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82회 작성일 12-06-2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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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특별초대석/백인덕/해설

극구隙駒와 작약雀躍;시정신의 존재적 양태樣態―임강빈 시인의 작품세계

 

 

1.

한 시인의 ‘시 세계’는 언제쯤 그 세계의 확장(수평적 경계와 수직적 심도)을 멈추게 되는 것일까? 작품(언표된 것), 혹은 그것들의 배면(상상력의 세계), 아니라면 독자의 기대 지평 등이 고정되어 버렸을 때. 우리는 무엇으로 한 시인의 ‘시 세계’의 전모, 아니 일부분이라도 그것이 ‘당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십여 년 전, 한 연구자의 글에는 당시 이순耳順을 넘긴 임강빈 시인의 위상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이른바 토속적인 관점으로 다가가는 박용래의 자연탐닉의 자세라든가 무위자연의 관념으로 유유자적인 삶의 품위를 지탱하는 한성기의 자연적 성찰에 대비할 때 임강빈의 대자연적 자세는 다분히 서구취향의 관점을 부각시키면서 자연 속에 존재로서의 의미를 반영하는 신선하고도 고적감이 넘치는 자연의 속성을 발현하는 경계에 닿아 있다”고. 이러한 정의는 어렵지 않게 다음과 같은 시인의 말에 연결된다. “시는 어떤 개념이나 도식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인 만큼 시의 전개에 있어서도 어떤 공식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시의 매력은 비유와 상징의 교묘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배후에 깔린 상상력의 무한성에 있다. 때문에 나는 시의 전개에 있어 포괄적인 조화와 언어의 절제에 민감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시’에 대한 개인적 정의를 ‘전개와 매력’이라는 두 개의 층위로 나누어 드러내는데, ‘전개’는 좀 더 확장해서 본다면 ‘시 쓰기(형식)’는 ‘조화와 절제’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이고, ‘매력’, 다시 말해 ‘시의 주제와 쓰임(내용)’은 ‘상상력의 무한성’을 드러내는데 치중했다는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임강빈 시인의 이러한 자세의 흔들림 없는 견지堅持는 시인을 ‘절제와 중용의 시인’, 또 최근에는 ‘여백과 겸양의 시인’이라 평가할 수 있게 한 기본 요인이며, 앞서의 평가들은 그 자체로 시인의 시적 인식과 시적 성과 모두에 매우 합당한 평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번에 집중조명을 통해 소개되는 일곱 편의 작품도 그 한결같음이 우선 돋보인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인이 이미 ‘산수傘壽’를 넘기셨다는 것(필자는 보잘 것 없는 필력으로 임강빈 선생님의 시집 해설을 무모하게 맡았던 적이 있다. 그때 ‘미수米壽’를 바라보고 계셨으니, 시인에 대한 필자의 인식은 ‘이순’, ‘미수’, ‘산수’처럼 그 간격이 결코 작지 않음을 사족으로 밝힌다.)과 ‘시작 메모’에서 밝히고 있는 바 “다시 시만 생각할 작정이다”라는 두 개의 요인을 더 추가해서 앞서의 ‘평가’들을 재확인 해볼 수 없을까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시인의 기왕의 ‘존재론’에 ‘늙음’이라는 생물학적 요인과 ‘작정’이라는 심리적 요소를 덧붙여 ‘이순’에서 ‘산수’까지 시인의 후반기 ‘존재론’을 다시 써 보고 싶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노란 은행나무에 이끌려

그 앞에 섰다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다가

노인은 속삭였다

―눈부신 청춘이구나

―나도 한때는 있었다

 

청춘은 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다

힘껏 즐겨라

 

벌써 노란 잎새가

공중을 선회하고 있다

 

허리를 다시 펴며

노인은 무어라 말을 건넸으나

귀가 멀어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은행나무와 노인」 전문

 

하나의 ‘대상’으로 ‘사물’이 고정될 때, 사실 지각은 별로 문제될 게 없다. 우리의 감각은 항상 열려있으므로 지각되느냐, 아니냐는 대상의 노출 여부와 관련될 뿐, 주체의 의지나 상황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각된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인식이란 근본적으로 ‘차별화’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주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감성적일 것이냐, 이성적일 것이냐’로 갈라지게 된다. 물론 주체의 선택에 따라 인식 내용이 변하고 종국에는 ‘주체-대상’의 관계가 변하고, 인생이 바뀌고, 세계가 요동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은행나무’는 일차적으로 ‘노인’에게 인식된 ‘대상화된 사물’이다. ‘노란’이란 시어에서 바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은행나무는 한창 단풍이 들어있다. ‘절정의 단풍’은 곧 ‘헐벗어 견뎌야 하는 겨울’이 온다는 고지이다. 하지만 ‘노인’은 “눈부신 청춘이구나”하면서 감탄의 시선을 떼지 못한다. 아마도 작품 속 ‘노인’의 연륜은 지혜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무진장 ‘단풍 듦에서 짐으로까지’의 한해살이가 아니라, 은행나무의 전 생애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곧 그 나무가 ‘청춘의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작품에서 이차적으로 ‘대상화되는 존재(사물)’는 ‘은행나무와 노인’, 나아가 둘의 ‘관계’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작품의 밖에 있다고 보이는데, 이는 “노인은 무어라 말을 건넸으나/귀가 멀어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알아듣지 못하는 쪽이 ‘은행나무’라면 앞의 ‘청춘’과 모순을 형성하고, ‘노인’ 자신이라면 ‘말을’ 건넨다는 표현과 호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한때는 있었다”는 부분은 작품 속 ‘노인’의 말이기보다는 ‘노인의 말’(“눈부신 청춘이구나”)에 대한 시적 화자의 ‘독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작품, “아, 얼마 남지 않은 시간/딱 한 번이라도/참새처럼 뛰고 싶어라(「깡충깡충」)”라는 바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차이라면 시적 화자가 문면에 드러나는 경우에는 ‘∼처럼’ 비유가 형성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철저하게 ‘화자’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시의 경우, “-눈부신 청춘이구나” 다음에 “-나도 한때는 있었다”를 연접시켜 이런 전략을 보여준다. 또한 “-”가 각기 다른 발화자나 내용을 표시할 때 주로 이용된다는 점도 이를 확인해 준다.

시인의 시적 인식이 ‘절제’를 지향해 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위의 작품 분석은 어떤 ‘의미’를 덧붙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굳이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나 ‘시의 경제성’ 운운하지 않더라도, ‘절제’가 시적 어휘, 즉 수사적 측면에서 주로 거론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그런 인상이 확산되어 시적 특질로 다시 거론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임강빈 시인의 경우 ‘절제’는 이런 수사적 측면이 아니라 ‘인식론적’ 측면에서 논의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할 일이 별로 없는 사람

너나할 것 없이 큰 골칫덩이다

 

사는 날까지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기도 지겹다

 

베란다 구석에 시들어가는

누런 이파리와 마주쳤다

 

그 화분에 분풀이하듯

물을 듬뿍 주었다

 

그것뿐

오늘 하루 큰일 했다 싶다

―「큰일」 전문

 

이 시에는 ‘누런 이파리’가 등장한다. “할 일 별로 없는 사람”은 화자의 인식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유일하게 ‘누런 이파리’라는 자연적 사물이 ‘대상화’ 된다. 시인은 말라가는 ‘누런 이파리’에 “물을 듬뿍 주었다”는 것인데, 마치 ‘분풀이하듯’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오늘 하루 큰일 했다 싶다”는 만족감을 토로한다. 여기서 ‘감정이입’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감정이입이란 “주체의 정감을 대상에 옮겨 넣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주체는 대상에 집중하고 관조하게 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체의 정감을 대상에게 ‘옮겨 넣거나’ ‘받아들여서’ 결국 자아를 대상으로 변하게 하고 대상을 자아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이 포괄적인 정의마저도 앞의 작품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누런 이파리’가 ‘할 일 별로 없는 사람’과 유비적으로 치환될 수 있으려면, ‘집중과 관조’가 필요한데 시인은 ‘마주쳤다’라는 우연성을 애써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이어 “분풀이하듯 물을 듬뿍 주었다”는 구절에서는 ‘할 일 없는 사람’과 ‘누런 이파리’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둘 다 ‘물을 먹이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자’는 ‘큰일을 했다’고 자못 뿌듯해 한다. 이런 화법에서 반어irony나 우의allegory의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비약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신화적이거나 전근대적인 시인이라고 스스로 규정한 적이 없다. 이는 역으로 시인이 단 한 번도 ‘현대시인’이라는 점을 부정한 적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임강빈 시인은 대상에 대한 집중과 관조를 통해, ‘절제’된 시적 전개를 꾀하기보다는, ‘절제’된 시적 인식을 통해 필요한 최소한의 ‘대상’을 재인식의 목표물로 포획,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새로운 평가가 덧붙여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2.

시인의 ‘존재론’을 생각한다.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존재론적인 시인가’가 아니라, ‘존재로서의 시인’을 생각한다. 그의 ‘사명과 의무’, ‘호명과 응답의 관계’, 그의 ‘비상과 추락’을 생각한다. 물론이다, 계기는 임강빈 선생님의 예의 짧은 ‘시작 메모’를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걸 ‘인식’하거나, 그에 대처할 아무런 ‘지혜’도 지금은 없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시와 결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 있다/실제로 요 몇 년 동안 시와 멀리 했다/의도적으로 그리 했다/그랬더니 신체에 이상이 생겼다/여기저기 크고 작은 병이/우후죽순 돋았다(「시작메모」)”고 선생님은 아픈 전언傳言을 보내오셨다. 물론 “다시 시만 생각할 작정이다”라는 강한 ‘결의’가 ‘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랑과 죽음’, 혹은 ‘삶과 사랑과 죽음과 예술’을 모든 ‘정신활동’의 원형적인 주제로 상정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주제들은 생의 기울기를 따라 경중輕重을 달리하며 새롭게 찾아든다. 가령 ‘죽음’의 경우, 김종삼 시인의 시 세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원죄의식-연민-실존의식-자긍’ 등으로 부침浮沈을 거듭하며 시인의 인생을 관통해간다.

 

암으로 고생하는 시인을 찾아갔다

이것저것 추억은 아름답지만

진작 위로할 말은 찾지 못했다

 

억울하다, 빨리 승부가 났으면 좋겠다

 

환자의 독백이 문득문득 이어진다

얼마나 지루하면 저럴까

 

수족관 수초 사이로 유영遊泳하는

느낌표만한 구피

그 자유로움을 서로 쳐다보다가

오늘 문병도 싱겁게 끝났다

 

시간은 길다

운동시합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얼마든지 바뀌지만

진검승부는, 딱 한 번

그 승부가 쉬 끝날 것 같지 않다

―「문병」 전문

 

시인의 어조語調는 사뭇 차분하다. ‘관조觀照’의 축어적 의미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이다. 그렇다면, 시적 의미에 있어 그 반대항은 ‘투사投射’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 방법이 다 ‘서정적’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작품의 묘미妙味는 시적 언술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시인의 거의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표면에 드러난 것은 거의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보이다. 물론 이 작품을 ‘지기를 문병하는 시인의 초상’ 정도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정황을 이미지로 환치해 보는 것으로 작품 이해가 끝나도 무방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마지막 연이 너무 길고 무겁다는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다른 방향의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면, 앞의 작품의 핵심적인 시어는 ‘느낌표만한 구피’와 ‘진검 승부’가 될 것이다. “시간은 길다”라는 직접적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비록 ‘암 환자’의 시간은 짧아 보이지만, ‘구피’에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길면 길게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화자는 ‘자유/부자유’의 문제에서 ‘의식/비의식’의 문제로 중심을 옮겨간다. 이는 “승부가 쉬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마지막 행에 이르러 더욱 명료해진다. 시인에게는 아직도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할 ‘진검 승부’가 남아 있고, 충분한 의지와 시간이 비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강빈 시인의 마지막 ‘진검승부’란 무엇을 의미할까? 선생님의 생과 시의 행로와 궤적을 생각할 때, 요란하고 번쩍이고 질척이는 그 무엇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남들은 나이가 들수록

눈이 보이기 시작하고

귀가 트인다고 한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아둔해서 그런가

아직 나에겐

그런 기미가 없다

마냥 까맣다

 

한 가지 재주가 있다면

시 쓰는 일이었다

만지작거리다가

시 한 편이 됐다 싶을 때

 

그 순간의 희열

그런 날은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그 즐거움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떠나려 한다

―「떠나려 한다」 전문

 

남들이 나를

시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랑할 것 없이

팔푼이 시인으로 족했다

 

그런 나를 키운 것은

원고청탁이었다

멀리서 청탁이 왔다

 

아, 반갑다

실낱같은 고마움

그 원고청탁이 약속처럼 끊겼다

 

나는 늙었고

그럴 때가 되었다

―「자위」 전문

 

시인의 ‘존재론’을 다시 생각한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시인은 ‘규범적 문법을 넘어서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규범적 문법’은 ‘국어문법론’이나 ‘국어대사전’ 같은 곳에 있는 규칙과 활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어법’이나 ‘관례convention’를 지칭한다. 우리의 생활은 이러한 규칙과 관례에 의해 그 안전함과 효율성을 보장받는다. ‘밥’ 달라는 말에 끝없이 ‘꽃’만 제공하는 부모는 결코 그 아이를 양육할 수 없다. 그래서 ‘일상어법’은 친숙하고, 편안하다. 하지만 이 ‘친숙함과 편안함’이 시인이란 존재에게는 더할 수 없는 ‘족쇄이며 굴욕’이 된다. 그것은 ‘사물’을 죽이고, ‘상황’을 재빨리 오해해버리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임강빈 시인은 이를 염두에 둔 듯하다. “아둔해서 그런가”나 “팔푼이 시인으로 족했다”라는 표현은 시에 대한 시인의 ‘엄격성과 순수함’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 ‘아둔’하거나 ‘팔푼이’가 지난날의 제 ‘말’에 의지해 오늘을 살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극구隙駒’와 ‘작약雀躍’, 한 시인의 ‘시 세계’가 아닌 ‘시 정신’의 면모를 더듬어 보겠다며 필자가 앞머리에 붙여 본 선생님의 ‘시어’이다. “문틈 사이로 달리는 말을 봄”과 “매우 기뻐 날뛰며 좋아함”이라는 뜻이라 한다. ‘극구’에도 ‘작약’이 없었을 리 만무할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시인이 되었고, 시인으로 ‘존재’를 궁구窮究하면서 다시 시인이 되었고, 이제 ‘다시 시만 생각할 작정’으로 새로운 시인이 되셨다. 어떤 가르침을 주실지 절로 기다려지고, 기대 되지 않을 수 없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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