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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특집/김구용문학제/권경아/해설/검은 하늘에 피는 꽃-장이지의 <연꽃의 입술>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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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특집/김구용문학제
권경아
해설/검은 하늘에 피는 꽃-장이지의 <연꽃의 입술> 작품세계
1.
장이지는 첫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서 세계에 대한 절망으로 ‘울음’ 섞인 슬픔을 보이며 어둡고 쓸쓸한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으나 그 끝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정하고 있었다. “비칠대는 길을 지나” 안국동 거리를 향하면 “진열장에 터키석처럼 놓여 있는 울음들”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혼돈의 과일들’이니 ‘그믐밤의 취기’니 ‘진흙 속의 욥’이니 ‘거위 아리아’니 ‘뒤집힌 함지咸池’니 하는 울음의 이름들”을. 그러나 시인은 “내 안의 함지에서 울음을 길어다 주는, 이 세상에서 내 울음을 혼자만 들어주는 소녀 같은 것을 상상”(「안국동울음상점」, <안국동울음상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울음을 혼자만 들어주는 그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절망은 완벽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울음 또한 처절한 절규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두 번째 시집 <연꽃의 입술>은 첫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어둡고 오염된 세계에 대한 인식이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거리에는 시위 행렬의 파고波高”가 높고 “소음이 낭자”하며 “태엽 감은 절망”(「연蓮」)이 뛰쳐나오고 있다. 이러한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시집의 전체에서 발견된다. <안국동울음상점>의 「용천역 부근」이나 「몬스터 몽타주」에서 보여주었던 용천역 열차폭발사건이나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당대 현실에 대한 관심은 「수몰 지구」, 「‘좀삐’의 여인들」, 「용산, 영도零度」 등의 시편에서 좀 더 구체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특히 당대 현실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더욱 심화되고 확대되어 나타나 동시대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고 있다. 즉 시간의 흐름을 넘나들며 인간이 경험하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이지가 그리고 있는 시대의 아픔은 단지 그 시대의 인간들이 느껴야했던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대 인간들의 고통은 지나간 역사 속의 그들이 경험했던 고통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것은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통과 슬픔인 것이다. 장이지의 시들에서 그려지는 지나간 시대의 고통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장이지는 첫 시집에서 “울음의 끝에는 포옹도 있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연꽃의 입술>은 시인이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끌어안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어두운 혼돈의 세상을 “표표히 떠가게”(「연꽃 프로젝트」) 해줄 ‘연꽃’. 그가 꿈꾸는 연꽃의 삶이 곧 시임은 물론이다. 어두운 세계를 표표히 흘러가기 위한 시의 연꽃을 띄우는 것. 이것이 검은 하늘에 피는 장이지의 연꽃이다.
2.
반쯤 흘러내린 뇌수가 자꾸 거슬린다.
담장이 끝나는 지점엔 무엇이 버티고 있을까.
고양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눈이 멀어도 좋으니 그걸 한 번만 보고 싶어.
죽어서도 궁금한 데는 약이 없다.
그러니 뇌수 냄새가 진동하도록 힘쓸밖에.
고양이들을 꼬드겨야지.
난 고단백 영양식이란다, 나비야.
내 영혼을 달고 달려라, 나비.
황야엔 긴 담장의 길과 담장 아래 빈 들과,
멀리 떡갈나무 숲과 녹지 않은 눈,
썩어가는 시체 한 구와
이 모든 것을 매끄럽게 문지르는 달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담장 위를 들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간다.
―「담장 위의 소풍」 부분, <안국동울음상점>
첫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어둡고 절망으로 가득하다. 담장 위를 들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가고 있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리고 있는 들고양이를 보며 시인은 “발이 위기의식으로 벼려져온 탓”이라 말하고 있다. 평생을 위기의식으로 살아온 들고양이에게 추락은 낯설지 않은 것인가. 담장이 끝나는 지점엔 무엇이 버티고 있길래 그를 그토록 질주하게 하는 것인가. “황야엔 긴 담장의 길과 담장 아래 빈들”이 있다. “반쯤 흘러내린 뇌수”, “썩어 가는 시체 한 구”, 뇌수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긴 담장 위나 담장 아래의 빈 들. 어디든 뇌수 냄새가 진동하고 있기에 그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은 없다.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담장 위를 달리고 있는 들고양이가 불안해 보이는 것은 단지 그의 추락만을 염려해서가 아니다. 담장이 끝나는 지점엔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것. 또 담장 위나 아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불안하게 질주하고 있는 들고양이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어두운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불안한 것이다.
어두운 세계에 대한 불안한 인식은 「버스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빨리 버스가 오지 않으면 잡아먹힐 것이다”. 어둠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반드시 버스를 타야만 한다. 그러나 버스는 오지 않는다. 사실은 “아주 오래 전에 버스에 탔”기 때문이다. “난 네가 두고 간 너의 이미지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웃고 있는 ‘그’. 이미 버스를 탔으나 버스를 타지 못한 ‘나’의 이미지는 영원히 어둠속에 서 있을 것이라는 것.
예술은 타락이야. 삶을 망치는 거야.
평생 돈도 벌지 않고 가정도 없이 진창에 구르다 쓰러지는 거야.
저기 하늘을 보렴. 물먹은 별이 보이지?
슬픈 일이 있어야 하는 거야.
하급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야말로 ‘군대식 얼차려’를 주며
그날 천변 갈대밭에서
삼 학년 형은
함부로 멋진 말만 일삼았지만,
하얀 입김을 토하며 본 하늘엔
별도 없는 적막……
냇물이 흐르고 흐르는 소리만
갈대밭이 가벼이 서걱대는 소리만
아직까지 소곤대지만,
속았다는 분노도 아니고 다만 더 모질어지자는 것인데.
매번 약해빠진 등으로 책상 앞에 앉아
매문賣文할 글이나 쓰는 한 누덕진 삶의 기교야.
요놈아, 시란 제일로 모질어야지.
그 문예반 형은 무엇이 되었겠니?
화염병을 던지다 죽었으면 더 멋졌을 텐데
멋대로 사랑에 미쳐 자살해버린
그 형은 이제 무엇이 되었겠니?
찌그러진 냄비에 삼양라면을 끓이며
창으로 이어진 은하계의 머언 먼 별빛을
타락론으로나 경청하면서
엄지발가락으로 콧구멍이나 후비며 하는 생각,
그래 슬픈 일이 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잉?
저기 하늘을 보렴. 별이 보이지?
―「하늘을 보렴」 전문
<안국동울음상점>에서 그려진 어두운 세계는 <연꽃의 입술>에서도 여전히 어둡다. “예술은 타락이야. 삶을 망치는 거야”라고 함부로 외치던 삼 학년 형의 말은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이 진정 진실인지 아닌지 모호하기만 하다. 예술은 타락이 아니며 삶이라고 믿었지만 “매번 약해빠진 등으로 책상 앞에 앉아 매문賣文할 글이나 쓰는 한 누덕진 삶”을 살아가며 시인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멋대로 사랑에 미쳐 자살해버린” 문예반 형이나 “찌그러진 냄비에 삼양라면을 끓이며” 별빛을 바라보고 “엄지발가락으로 콧구멍으로 후비”는 ‘나’의 모습. 시인에게 드는 생각은 “속았다는 분노도” 아니다. “다만 더 모질어지자는 것”. 어떠한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삼 학년 형이 “슬픈 일이 있어야 하는 거야”라고 하며 “저기 하늘을 보렴. 물 먹은 별이 보이지?”라고 했던 말과 “찌그러진 냄비에 삼양라면을 끓이며” 별빛을 바라보고 “엄지발가락으로 콧구멍으로 후비”며 스스로 하는 “그래 슬픈 일이 좀 있어야 하는 것인디, 잉?”하는 말은 서로 다르지 않다. 삼 학년 형이 바라보던 “물먹은 별”이나 시인이 바라보는 “별”이나 모두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저 하늘의 별이라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그려지고 있는 세계는 어둡고 쓸쓸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 어두운 세계를 더 이상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더 모질어지자는 것”. 그것은 비록 어둡고 슬픈 삶일지라도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자 하는 의지와 같다. ‘울음 끝의 포옹’. 시인은 세계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국제시장 입구
오망이 꿀꿀이죽 무쇠솥 위로도
허기진 눈꽃이 풀풀 날리느니,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는 밥이 내리느니.
금순아, 하늘에 파랗게 언 네 얼굴.
바다에 살얼음 깐 거울을 보고 있느냐.
흥남 부두 엘에스티 고동 울리는데
빙경氷鏡 속에서 돌꼇잠을 자는 시간이여.
울어도 울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검은 바다.
얼어서 검어진 네 손에 입김을 불던
오라비를 찾느냐.
그 꽝꽝한 거울 속 눈보라를 헤치며, 헤치며.
파도가 살갗을 에는 바다에 너를 버리고
삼팔따라지로 구르고 굴러
국제시장이다. 달러 장사치이다.
쪽을 찐 호남 안깐을 너처럼 안고 숨죽여 울던 밤이여.
―「굳세어라 금순아·1-국제시장 1955, 눈꽃」 부분
시인은 세계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나 상처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고통이나 상처를 아파하며 슬퍼하며 그러한 삶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갚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서 이러한 인식은 당대의 삶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굳세어라 금순아」 연작시편들은 1955년, 1960년, 1983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부제로 하고 있다. 시대를 살아가며 경험해야만 했던 슬픔과 고통. 이 시에서 금순이의 슬픔과 고통은 비단 금순이만의 고통은 아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의 고통과 슬픔이며 또한 이 시대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이기도 하다는 인식. 이 시가 단지 개인의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55년 전쟁의 잔해 속에서 일어서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삶, 산업화의 채찍 속에 “미싱을 돌리고 날품을 팔”아야 했던, 모진 세월을 지난 후에야 헤어졌던 혈육을 끌어안을 수 있었던 83년의 이산가족 찾기의 현장. 시인이 금순이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만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어둠과 슬픔, 고통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 속 시간을 통해 세계의 어둠과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제의 억압을 지나 해방을 맞이하고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재일동포의 삶을 그리고 있는 「Line」에서도 드러난다.
지구의 마지막 잔존자들은
저물녘 연꽃의 입술 아래에서 가난한 마음을 여민다.
신은 오늘도 못 오신다는 전언과 함께
칠보자개의 저녁 하늘을 보내시고……
아름답고 푸른 카시오페이아 성좌 근처에서는
지구인들의 높고 쓸쓸한 우주선이
시든 꽃잎처럼, 떨어지는 꽃잎처럼
관음보살의 허물어진 눈 속으로 사라져간다.
세계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신의 자장가를
지구의 잔존자들은
몸 전체가 조리 모양의 귀가 되어 듣는다.
그게 아니라면……
세계의 바깥이 없는 것이라면……
산천이 끊어질 듯 울어도
그 눈물 닦아줄 손 없을까봐.
지리멸렬의 시간을
별빛은, 멀고 적요한 데서 날아와 반짝이고.
―「구원久遠·12-세계의 바깥」 부분
세계의 어둠을 끌어안으며 삶을 끌어안는 삶의 방식은 이 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지구에 남겨진 마지막 잔존자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신을 기다린다. 그러나 “신은 오늘도 못 오신다는 전언”만이 전해진다. 대신 보내준 “칠보자개의 저녁 하늘”, “세계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신의 자장가”만을 들어야하는 지구의 잔존자들. 그러나 진정 “세계의 바깥”에 있다는 신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세계의 바깥이 없는 것이라면…….”
세계의 바깥이 진정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구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잔존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속았다는 분노도 아니고 다만 더 모질어지자는 것.” 그렇다. 시인은 모질게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3.
시인이 택한 방식은 모질게 모질게 살아가는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 시집은 이렇게 모질게 살아가는 시인의 삶의 기록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보내는 전언과도 같다.
당신은 존재를 토함으로써 한 음音을 얻습니다.
시이라 링고는 시이라 링고를 토해야 합니다.
성대가 타버리거나 존재가 파멸할 때까지
삶은 무딘 송곳으로 우리를 꿰뚫고자 할 것입니다.
눈에 헛거미가 잡힐 때까지 목청을 단련해야겠지요.
저는 저의 몽당연필로 겁劫의 파지를 내겠습니다.
피 흘리는 글씨가 절벽을 내놓을 때면
우리 그날엔 천국을 구걸하지 맙시다.
그러나 곱게 가지는 말고
절망에게 복수하고 갑시다.
비명의 프렐류드를 바람에 섞어두고
가장 지독하게 더러운 재가 되어
마구 흩날립시다.
―「시이나 링고」 전문
“존재를 토함으로써 한 음音”을 얻어내는 당신. “성대가 타버리거나 존재가 파멸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삶은 무딘 송곳으로 우리를 꿰뚫고자 할 것”이기에 우리의 삶은 고통과 슬픔으로 관철될 것이기에. 그러나 시인은 결코 “천국을 구걸하지” 않는다. 천국을 구걸하지 말자고 말하고 있다. 가더라도 “곱게 가지는 말”자고. “절망에게 복수하고 갑시다”라는 말 속에 담긴 장엄함. 절망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이 “가장 지독하게 더러운 재가 되어 마구 흩날리”자는 시인의 말은 근엄하기까지 하다. 가장 지독하게 더러운 세계에 가장 지독하게 더러운 재가 되어 마구 흩날림으로써 복수를 하겠다는 시인의 말은 이 어두운 세계에 어둠으로 절망으로 살아냄으로써 어둠을 이기겠다는 의지로 다가온다.
거리에는 시위 행렬의 파고波高를 불꽃이 넘실대고 있었다.
시리우스의 벽을 꿰뚫는 백색 눈이
눈꺼풀도 없이 개화開花했다.
소음이 낭자한 환시幻視가 빗속에서 날개를 폈다.
대도시가 허락하지 않는 피난처가 열렸다.
대도시의 부비트랩에서 태엽 감은 절망이 뛰쳐나왔다.
대도시는 표류했고 대도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전전긍긍하던 당국은 그럭저럭 넘어갔다.
텔레비전 위를 벌레가 지나가자 쇳가루가 피었다.
신문 위를 벌레가 지나가자 쇳가루가 피었다.
기댈 것은……
심원한 하늘에 연좌蓮座가 떠 있었다.
허물어진 자리는 허물어진 대로였다.
연꽃 위의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흰 눈썹의 하늘을―
연꽃이 입술을 열자 구원久遠한 빛이.
―「연蓮」 부분
절망을 절망으로 살아가며 절망을 이겨내려는 「시이나 링고」의 인식은 이 시에게 새로운 인식으로 나아간다. “부식腐蝕의 계절”, “세계의 신음”만이 타는 듯 흘러든다. 그 신음은 “비의 혼음混淫으로 대지에 얼룩을 남”긴다. 세계의 모든 골목에 비가 내리고, 거리에는 “시위 행렬의 파고波高를 불꽃이 넘실대고” 있다. “소음이 낭자한 환시幻視”가 빗속에 가득하고 대도시의 부비트랩에서는 “태엽 감은 절망”이 뛰쳐나왔다. 대도시는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여전히 어둡고 절망적이다. 그러나 이 어둠의 세계에서 시인은 새로운 광경을 목격한다. “심원한 하늘에 연좌蓮座가 떠 있”는 것이다. “연꽃 위의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분명히 떠오른 연좌. 연꽃 위의 남자가 앉을 자리. 그 자리는 비록 허물어진 자리이지만 분명 연좌인 것이다. “허물어진 자리는 허물어진 대로”라는 것은 하늘에 떠오른 연좌가 우리의 삶 자체라는 인식인 것이다. 비록 연꽃 위의 남자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연좌의 “연꽃이 입술을 열자 구원久遠한 빛”이 비치고 있다. 그 연꽃의 입술에서 비치는 그 빛이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믿음. 연꽃 위의 남자가 아닌 어둡고 허물어진 우리들의 삶이 곧 우리의 구원이라는 인식인 것이다.
<연꽃의 입술>은 ‘울음 끝의 포옹’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긴 울음 뒤에 피어난 연꽃. 장이지의 연꽃은 삶이며 곧 시이다. 시의 연꽃을 피우며 세계를 표표히 흘러가고 있는 그의 시세계를 연꽃의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권경아
2003년 ≪시와 세계≫로 등단. ≪시현실≫, ≪리토피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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