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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신작특선/유혜영/봄보르봄봄봄봄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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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320회 작성일 12-06-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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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영

봄보르봄봄봄봄 외 5편

 

 

저년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끝장났다 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쳐나갈 때 이미 알았습니다. 아른아른 속살 비치는 노리끼리한 물항라저고리를 입고서, 산수유나무에 걸터앉아 아리까리한 웃음을 안개처럼 흘리더니, 매화나무 가지마다 보기만 해도 침이 주르르 흐르는 허연 허벅지를 번쩍번쩍 들어 턱턱 걸더니, 벚꽃나무에 올라가 속곳도 입었을까말까 아슬아슬한 연분홍 치마를 훌렁훌렁 까제켜대더니, 그예, 앵두나무 우물가 동네처녀들 술렁술렁 우물 속에 빠진 달을 건져 담 봇짐에 싸들고, 야반도주 넘어가는 뒷산 오솔길, 그리운 진달래꽃으로 흐드러져 달빛을 머금은 새 즈려즈려 밟히고 있더이다.

 

 

 

 

칼자루

 

 

훈이네 집 식칼이 골목을 뛰어다녀요. 훈이를 업고 허둥지둥 도망치는 그녀가 도마 위에 오른 고기 같아요. 골목은 뛰어도뛰어도 도마 위에요. 등 위에서 아이의 두 팔이 팔랑팔랑 나비처럼 날고 있어요. 골목이 나무의 속성으로 쑥쑥 자라나요. 이 골목 저 골목 가지를 늘여요. 나무는 아이보다 빨리 자라고 아이보다 크게 자라요. 기저귀를 찬 팔랑나비가 나뭇잎에 앉아요. 가방을 멘 팔랑나비가 이 가지 저 가지로 날아다녀요. 아이를 품은 골목이 이십사 시간 불침번을 서요. 어메가 아이에게 마지막 선물로 줄 꽃밭을 찾아 뛰고 있어요. 그녀를 따라서 세월이 덧없이 따라 뛰어요. 턱시도를 입은 팔랑나비를 꽃잎에 내려놓자마자 휙, 그녀가 뒤돌아서서 달려요. 웃자란 골목이 부랴부랴 가지치기를 해요. 두루마리처럼 풀어지던 세월이 두르르 말려요. 쫓아오던 칼날이 시퍼런 서슬에 이냥 베어서 칼자루 떨어트려요. 칼자루를 움켜쥔 늙은 훈이 어메가 늙은 훈이 아베를 베었어요. 비로소 나무가 골목을 열어요.

 

 

 

 

매직타임:중독

 

 

펑펑, 양귀비꽃잎 위로 눈이 내려요.

제 손바닥으로 파란 하늘을 가리고

송이송이 꽃 속으로 검은 눈이 내려요.

살을 에는 어둠이 몰려와요.

환각처럼 호주머니에서 새끼를 쳐요.

순식간에 눈뜨고서도 코 베이어요.

 

눈에 홀린 꽃잎이 눈 밖으로 미끄러져요.

눈 밖에서 오는 눈은 덮을 수가 없어요.

눈 위로 부는 바람이 양귀비의 치마를 들춰요.

눈발이 양귀비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요.

 

오들오들, 꽃잎이 빈 박스를 덮어요.

모두가 떠나버린 빈 박스의 시간은

살아서도 죽어버린 꽃잎의 무덤이에요.

꽃이 피었다, 환호성이 들리는 곳이 봄이에요.

봄으로 가는 길이 눈 속에서 깊어요.

소복소복 꽃길을 지우며 눈이 내려요.

 

 

 

 

매직타임:괜찮다

 

 

그녀가 마법의 틀로 들어간다. 그녀에게 걸린 주술은 괜찮다이다. 그녀의 팔다리를 벌려 묶어놓고 예리한 칼로 내리친다.

철거덩, 팔이 잘린다. 괜찮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팔이 잘리면, 갇혀있던 꿈들이 팔을 내밀고 저요저요, 꿈에도 그리운 천수관음으로 날아간다. 마흔 두개의 팔이 천개의 손을 편다. 반짝반짝, 손바닥마다 뜨는 지혜의 천안天眼이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어느새 천개의 손이 그녀의 꿈을 주워들고 있다.

철거덩, 다리가 잘린다. 괜찮다.

여기저기 걸리던 다리가 잘리면, 그녀는 무수한 다리들이 서로 발목을 잡고 거미줄처럼 엉긴 그물 속을 빠져나간다, 그녀가 팔짝팔짝 뛰어 하늘까지 닿는다. 달나라를 지나고 금성, 화성으로 간다. 우주 한 바퀴 휘돌면서 은하로 간다. 은하 저 편에서 만나고도 지울 이가 두 팔을 벌린다.

철거덩, 목이 잘린다. 괜찮다.

둥둥 떠다니는 그녀의 얼굴은 해맑다. 선홍빛 입술은 금방이라도 함박웃음이 터지겠다. 반짝반짝, 혜안慧眼으로 본다. 한 송이 함박꽃이다. 날마다 피어나도 꽃인 줄 모르던 향내가 수억 광년을 날아간다. 나풀나풀 나비가 은하를 건넌다. 목이 잘린 그녀가 웃는다. 살아있다. 부랴부랴 잘라진 틀을 다시 맞춘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걸어 나온다.

 

 

 

 

매직타임:황제

 

 

벼들이 황금모자를 썼다. 농군들이 황금땀으로 잠방이를 적실 때마다, 황금비가 오고 황금햇살이 내리더니 노란 황금 들판이 펼쳐졌다. 마법의 주술이다. 모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꿈의 주문을 외운다. 수리수리 마 바 하, 수리수리 마 바 하. 모자 속은 깊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더욱 깊어서 어느새 수억 광년을 날아가 별을 꺼내온다. 조심조심, 부질없는 욕심이 들어가면 마법은 깊고 깊은 모자 속 수렁에 잠겨 다시 나오지 못한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마술황제가 되지못한 까닭이다. 조상 대대로 먹고살아온 잘 익은 벼의 황금색이 유전자의 징표다. 황제들은 황금을 입고, 쓰고, 걸고 위세를 높인다.

 

아나 농부님네, 마술나라 지니들이 몰려들어 쿵덕쿵쿵덕쿵, 황금 찌어 밥 짓고, 떡 찌고, 술 빚어 잔치잔치 벌리네. 얼씨구절씨구, 지화자 좋네. 황금밥 먹고 황금똥 누네.

 

 

 

 

별밤*

 

 

별밤지기는 빨간 우체통에서 별을 딴다. 별빛은 약간의 잡음으로 수줍었지만, 맑은 하늘을 통과한 주파수는 콩닥콩닥 골목길 사과나무집으로 곧장 달려간다. 사과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사연입니다. 별밤지기가 알콩달콩 별을 띄우는 밤, 얼굴을 붉히며 사과꽃이 핀다. 아삭 깨물면 짜릿하게 혀끝을 적시는 단물을 꿈꾸며, 별빛이 흐드러진 꽃잎을 잘근잘근 씹는다. 꿈이 쑥쑥 자란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꿈이 사과나무를 친친 감는다. 온몸이 달아오른 나무가 뜨거운 입김을 훅훅 불어댄다. 사과가 붉어진다. 한마디 말이 그리워 빨갛게 익는다. 철없이 익은 사과를 따려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나무 위로 둥실둥실 올라간 그녀는 어디 있나요. 별들에게 물어봐,

 

*별밤 : MBC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시작메모

용기가 필요한 시간

 

 

시를 왜 쓰느냐는 질문에 답을 못한지 오래 되었다.

야무지게 대답했던 치기 어린 시절도 없지는 않았다.

 

시가 넘어진 세상을 일으켜줄 성도 싶었다.

아픈 상처 호호, 불어줄 성도 싶었다.

끝없는 기쁨도 주고, 희망도 주고, 눈물도 닦아줄 성 싶었다.

내가 세상 떠나고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도 내 시가

누군가의 휘파람 속에서 살 수 있으리라 믿기도 했다.

 

삼라만상이 모두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시라는 것,

나의 시가 시 중 가장 재미없는 문장이라는 것,

기가 막혀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로 변했다.

 

시를 쓴다는 것이 고작, 어찌 하면

빠뜨리지 않고 잘 받아 적을 것인가였다니.

 

내가 써놓은 시를 다시 읽는 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요즈음이다.

 

유혜영

2007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풀잎처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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