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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정우영의시평/정우영/관념에서 뽑아 올리는 감성의 시들-이민호 시집 <피의 고현학>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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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115회 작성일 12-06-2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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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봄호)정우영의시평

정우영

관념에서 뽑아 올리는 감성의 시들-이민호 시집 <피의 고현학> 탐색

 

 

1. 너희가 진정 관념시를 아느냐

현대사회는 어지럽다. 수많은 관계들이 서로 얽혀서 어느 한 면으로는 그 실체를 짐작할 수 없다. 관계만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들, 관념과 관념들, 사물과 관념들도 복잡한 망을 형성하고 있다. 숱하게 밀려오는 정보는 또 어떤가.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들이 밀고 들어와 우리의 눈과 귀를 잡아끈다. 그야말로 현대사회는 감각과 이성이 입체적으로 중첩된 복잡계複雜界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현대사회에서는 직관直觀과 직시直視가 통하지 않는다. 투시透視와 광각廣角의 시야를 요구한다. 나와 너, 그리고 그(혹은 그것)를 포괄하는 다층과 입체의 시야를 발달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야가 물질과 현상 쪽이 아니라 관념과 상상 쪽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발 딛은 땅은 위축되고 머리만 우주를 헤매는 모양새이다. 현실의 복잡계가 오히려 현실을 관념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시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최근 우리 시의 주된 흐름은 이와 같은 현실 복잡계를 반영하고 있다. 시가 어려워지고 다의성을 띄며 관념에다가 또 관념을 중첩시키는 방식이 난무하는 게 단적인 예이다. 난해한 시들이 지속적으로 씌어지는 게 돌발 상황이 아닌 셈이다. 이는 어쩌면 현실 복잡계의 당연한 대응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시가 난해해졌다고 시를 탓하는 것은 어리석다. 시만 혼자 뚝 떨어져서 숲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면 시도 또한 복잡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난해한 시들을 시적 소통 단절의 주범이라고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실은 주범은 따로 있다. 나는 이들을 ‘비문시非文詩’라고 부른다. 이들 시 같지 않은 시들에서는 해석과 소통 불가의 모호한 비문들이 끊임없이 나열된다. 언뜻 무언가 다른 세계를 도입한 것처럼 비치지만 착각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웅얼거림만이 연속될 뿐이다. 이들 시에는 현실 복잡계의 단면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단지 비문을 얽어 놓았을 따름이다. 나는 이러한 비문시들이 시를 왜곡시켜서 시의 영역을 굉장히 줄여 놓았을 뿐만 아니라, 독자와의 간극도 벌려 놓았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민호의 시를 주목하고 싶다. 관념이 승하지만 비문시가 아니며 현실 복잡계의 단면은 상당히 예리하다. 감성 쪽이 아니라 이성 쪽으로 마음의 감각을 높여가므로 시를 읽어내기 쉽지 않지만 울림은 깊다. 관념을 끌어들이되 관념에 주눅 들지 않고 그 관념을 밑돌 삼아 새로운 감각을 진작시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사유思惟를 통해 감성을 풍요롭게 하는 그의 시들을 만나러 간다. 무게감이 만만찮아서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등허리가 뻣뻣해진다. 나긋하고 부드러워져야 하리라.

 

2. 푸코와 데리다 그리고 햄스터

이민호는 스스로, “시는 내게 와서 학으로 전락하였다”고 쓴다. 그 학은 어떤 학인가. 그가 시집에 올린대로 고현학考現學, 곧 현대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학적 고찰인가. 어떤 학문學問이라기보다는 시를 배우겠다는 의지의 수사修辭인가. 나는 그의 학을 다르게 본다. 그는 이 둘을 포괄하는 사유 혹은 관념의 시학을 펼쳐 보이고자 하는 것 아닐까 싶은 것이다.

 

어린 딸년의 친구 엄마가 아기를 가졌다고 햄스터 두 마리를 대신 키워 달라 부탁한 것은 폭염이 시작될 무렵. 새 생명에게 광기의 역사와 자기모순에 빠진 언어로 새 세상을 보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눈물겨운 모정. 원형감옥 속에서 수컷 한 놈은 폭력이라는 이름의 시를 쓰며 쳇바퀴를 돌리고 또 한 놈의 수컷은 돌출된 앞니로 그 시를 발기발기 조각내 삼키고는 겨자씨 같은 관계들만 배설. 그러니 가을은 멀지 않으리. 지난겨울을 뼈아프게 지내고 힘겹게 봄을 맞았던 인수봉 정수리가 뜨거운데. 어서 쇠창살을 깨뜨리고 딸년 몰래 햄스터를 놓아 주어야지. 주섬주섬 해체된 의미를 맞춰가며 수줍게 밤을 기다리면 환약 같은 햄스터 똥 알알이 지독히 냄새나는 거기서 무슨 우담바라가 사뿐히 피고는 삼천 년 만에 우리 딸년의 눈물 어린 수레바퀴를 돌릴 그리운 사람들이 몰려오리라.

―「푸코와 데리다」 전문, 시집 <피의 고현학>(2011, 애지, 이하 같음)

 

푸코와 데리다가 누구인가. 현대 사상을 대표하는 프랑스 철학자들 아닌가. 그런 그들이 이 시에 와서 햄스터가 되었다. 충격적이다. 시인은 아마 그 무렵, 푸코의 「광기의 역사」와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공부하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일단 햄스터에게 그 이름을 붙임으로써 아연 시의 긴장을 높여 놓았다. 긴장만 높아진 게 아니고 시를 읽어가는 데도 이 둘의 관념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시의 행로를 되짚게 만든다.

“원형감옥 속에서 수컷 한 놈은 폭력이라는 이름의 시를 쓰며 쳇바퀴를 돌리고”라는 시구에서는 푸코와 더불어 시를 읽는 나도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또 한 놈의 수컷은 돌출된 앞니로 그 시를 발기발기 조각내 삼키고는 겨자씨 같은 관계들만 배설.” 하는 시구에서는 데리다와 함께 나도 겨자씨 같은 관계들을 배설하기 위해 끙끙거린다. 철학과 시가 동일 궤에서 감정 이입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 진단의 진폭과 시적 공간의 울림이 상당히 깊게 울리며 조응하게 된다. 햄스터의 쳇바퀴 안에 우리 삶의 진실이 그대로 담기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햄스터의 쳇바퀴와 지구의 쳇바퀴는 뭐가 다른가.

그는 “환약 같은 햄스터 똥 알알이 지독히 냄새나는 거기서” 사뿐히 피는 우담바라를 보며 삼천 년을 살아낸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딸년의 눈물 어린 수레바퀴를 돌릴 그리운 사람들이 몰려”올 것임을 믿는다. 삼천 년이라는 세월을 견뎌야 하는 눈물겨운 낙관(?)인데 그게 또 그럴싸하다. 광기의 역사와 “주섬주섬 해체된 의미를 맞춰가며 수줍게 밤을 기다리던” 그인 까닭이다.

햄스터에서 푸코와 데리다를 읽어낸 시인은 도마뱀에서는 또 다른 면모를 짚어낸다. 물론 여기서도 핵심은 사유라는 의미망이다. 그 망을 중심으로 도마뱀은 “몽당꼬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볼록 눈알은 주름 잡힌 눈꺼풀을 조였다 풀었다” 한다.

 

파르르 몸을 떨더니 몽당꼬리를 들었다 놓았다 볼록 눈알은 주름 잡힌 눈꺼풀을 조였다 풀었다(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머리부터 세운 갈기가 목덜미로 내려갈 때는 두툼한 얼굴이 영락없이 꼬숩게 솔잎 묻은 추석 송편이다(지푸라기처럼 얌전하다) 어둠을 닮은 보호색이 잔등을 타고 검푸르게 밀려가다 꼬리쯤에서 툭 떨어진다(턱! 가슴이 답답하다) 어디론가 굴러갈 듯 꼬리 저편 허공을 말아올리다 그만 자꾸 널브러진다

(왜 몰랐을까? 꼬리가 몸을 버렸다는 사실을!)

―「도마뱀의 잠꼬대」 전문

 

이 시는 겉과 속을 동시에 읽어가야 한다. 겉은 도마뱀이지만, 속은 시인인 까닭이다. 시인의 속내를 통찰하지 않으면 도마뱀이라는 외적 형상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의미망의 열쇠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괄호 속 지문이다. 괄호 속 지문을 바탕에 깔고 시편을 새롭게 구성해 보면 시인의 심상이 읽힌다. 보다 더 직접적으로는, “왜 몰랐을까? 꼬리가 몸을 버렸다는 사실을!”이다. 이 진술에 ‘도마뱀의 잠꼬대’라는 제목을 잇대어 보자. 의미가 전도된 현실 속에서 도마뱀이 “꼬리 저편 허공을 말아올리다 그만 자꾸 널브러”지는 형상이 보일 것이다. “턱!” 숨 막히도록 “가슴이 답답”한 상황이다. 왜 아닐 것인가. 꼬리는 잘려져 딴 몸인 것을.

여기서 내가 관심 기울이는 부분은 “꼬리가 몸을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에서 몸통과 꼬리라는 기존의 관념이 돌연 해체된다. 몸을 살리기 위해서 몸이 꼬리를 자른 것이 아니라, 꼬리가 스스로 몸을 버렸다는 것이다. 가치 전도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통렬하지 않은가.

‘몸통을 형성하는 기존체제와 관념들이여, 이젠 안녕!’ 하는 듯하다. 그게 아직 ‘잠꼬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문제이긴 하지만, 곧 현실화되지 않겠는가. “꼬숩게 솔잎 묻은 추석 송편”과도 같이.

 

3. 아득하고 아득하여라

「도마뱀의 잠꼬대」에서 확인된 이와 같은 가치 전도의 현실은 「외발로 서있는 詩」에 이르러서는 보다 구체적인 정황으로 드러난다. 문명과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되고 있는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해저물녘 연립주택 공사판 여기 저기

삽들이 나뒹굴고 있다

파산했으리라

몇 놈은 드러누워 무딘 삽날을 뒤척이며 불꽃을 일으키고

또 몇 놈은 엎어져 맨 땅에 이마를 뭉개고

신음도 없이 피 흘리지 않으며

모두들 내팽개쳐져 있다

그런 나날 속에서

 

손목 부러진 삽자루를 가만히 일으켜

흙무덤에 꽂아 주었다

―「외발로 서 있는 詩」 전문

 

파산의 그늘이 쓰리고 쓸쓸하다. 아무런 희망 없이 무너져 내린 이의 신음이 고여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삽들 나뒹굴고 있는 “해저물녘 연립주택 공사판”을 가만히 떠올려 보라. 누가 보이는가. 절망과 좌절에 침윤된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는가. “무딘 삽날을 뒤척이며 불꽃을 일으키”는 놈, “엎어져 맨 땅에 이마를 뭉개”는 놈, “신음도 없이 피 흘리지 않으며/모두들 내팽개쳐져 있”는 저 삽들이 다 이 땅의 노동자들 아닌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피폐한 삶이 서럽게 아프다. “해저물녘 연립주택 공사판”이 이끌어낸 노동 소외의 그늘이 짙다.

이런 현실로 끝나고 마는가 한탄할 때, 시인은 “손목 부러진 삽자루를 가만히 일으켜/흙무덤에 꽂아” 준다. 이것은 제의祭儀인가, 아닌가. 나는 아니라고 여긴다. 그는 저 삽자루에서 외발로 서 있는 시를 보지 않는가. 그럴 때 시는 무엇일 것인가. 나는 새로운 싹, 새로운 희망이라 느낀다. 오래된 창창한 거목들이 다 스님의 지팡이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저 손목 부러진 삽자루에도 새로운 가지가 돋을 거라 믿는다. 그러고는 ‘외발로 서 있는 詩’의 힘 빌려 오래도록 창창할 것이다.

그러나 둘러보면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아득하고 아득하다. “왕십리 산동네/재개발지역”의 아슬아슬한 원시가족처럼.

 

둘러앉아서 한 송이 포도를 나눠 먹으며

조금 있으면 우리 모두는

자줏빛 혓바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어린 것들이 반달 같은 혀뿌리를 길게 빼고

너도 어서 내놔라 아빠야

너도 어서 내놔라 엄마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을 테다

춤추며 노래하며 발광하는 가을

 

집은 왕십리 산동네

재개발지역

조금 있으면 우리 모두는

―「원시가족」 전문

 

고대시가인 「구지가」에는 희망이 실려 있다. ‘거북아, 구워 먹지 않을 테니 머릴 내놔라’ 하고 외치는 바람에는 현실 타개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기원祈願으로 읊는 노래 소리가 그래서 처연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다르다. “어린 것들이 반달 같은 혀뿌리를 길게 빼고/너도 어서 내놔라 아빠야/너도 어서 내놔라 엄마야/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을 테다”라고 발광하는 가을은 처연하다 못해 참담하다. 삶터를 빼앗기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최후의 만찬’으로 포도를 나눠 먹고 있는 현실 아닌가. 왜 하필 포도일까. 포도에는 성혈의 피와 아빠, 엄마의 피 같은 목숨이 상징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포도 한 송이로 배고픔이 가실 것이며 포도 한 송이로 내일이 밝아질 것이랴. 하여 아이들은 재촉하는 것이다. “너도 어서 내놔라 아빠야” 네 피를, 너도 어서 내놔라 엄마야” 네 목숨을, 하고. 이렇듯 가족의 목숨마저 쟁탈하는 여기에 사랑이 있을 것이며 보람찬 미래가 보일 것인가.

사정이 이러한 탓에 식구들이 “조금 있으면” 갖게 될 “자줏빛 혓바닥”이 내게는 섬뜩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다음 행에 이어지는 “어린 것들이 반달 같은 혀뿌리를 길게 빼고”는 또 어떤가. 목매달아 죽는 집단 자살의 전야 같아서 나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조금 있으면 우리 모두는” 하고 처절하게 떨고 있는 이 가족, 이 원시가족에게 정녕 따뜻한 삶터는 요원할 것인가.

「원시가족」에서 시인은 「구지가」를 끌어오더니 「삼양동 헌화가」에서는 「헌화가」를 빌려온다. 고전시가가 문득 우리 현실에 내려와 시의 배면에 깔리는 것이다. 이 낯선 구도는 시 속 시공간을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이도 저도 아닌 제삼의 공간이 살그머니 열리도록 이끄는 것이다.

 

삼양동 빨래골 오르막을 짐자전거 한 대가 휘휘 청청 오르고 있습니다. 곧 해 질 것 같은데 눈부시지는 않지만 운선처럼 어여쁜 여인이 짐칸에 앉았습니다. 사내는 참 울퉁불퉁 투박하기도 하여 허이허이 속으로 외치며 고래숨 내듯 씩씩대며 페달을 밟습니다. 여인은 아름답게 고즈넉하고 사내는 안간힘 속에 즐거운 낯빛입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저렇게 살기로 하고 만난 지도 모르지만 누가 누구의 아름다움에 반해 마음을 허락했는지는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가본 사람은 어느 정도는 알 일이 아니겠습니까. 끌고 가던 소는 팽개치고 벼랑 끝 꽃을 따 남의 부인에게 바쳤던 어느 노인의 수고가 참 아름답기는 아름답다고 전해오는 얘기도 있기는 있기 때문입니다.

―「삼양동 헌화가」 전문

 

“곧 해 질 것 같은” “삼양동 빨래골 오르막을” “휘휘 청청 오르고 있”는 짐자전거를 보라. “운선처럼 어여쁜 여인”을 짐칸에 앉히고 “고래숨 내듯 씩씩대며 페달을 밟”는 사내의 모습은 그 자체로 그지없이 정겨운 풍경이다. 「원시가족」에서 보이는 것 같은 위기감은 전혀 없다. 저 오르막을 넘기만 하면 신천지가 나타날 것처럼 사내는 바삐 페달을 밟고 있다. “여인은 아름답게 고즈넉하고 사내는 안간힘 속에 즐거운 낯빛”이다. 수로부인에게 꽃 꺾어 바쳤던 노인네와 수로부인의 현신現身일까. 아름답고 아름답다. 어쩌면 이 시는 저 「원시가족」의 전단계일지도 모른다. 오직 사랑만으로 세상을 감당하던 시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아름다운 풍광에서 자꾸만 삼양동 빨래골 오르막을 짐자전거로 오르는 사내의 땀내나는 등판을 보는 걸까. “참 울퉁불퉁 투박하기도” 한 저 등판에서 버거움과 연민을 읽으려 할까. 시는 아름다운 전설 같은 이야기와 정경만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시 바깥을 서성이며 고뇌하고 있을까. 이 시에 보이는 현실이 현실 그대로 받아지는 게 아니라, 제삼의 공간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여인은 아름답게 고즈넉하고 사내는 안간힘 속에 즐거운 낯빛”처럼 비치지만, 이 가난의 오지에 떠오르는 행복이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임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이 시의 무대가 설령 실제라고 해도 ‘삼양동 빨래골 오르막’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으로 인해 시는 판타지로 뻗어나간다. 현실이 판타지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기막힌 현장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은 비극성을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시 「파리지옥」에서는 「삼양동 헌화가」의 그러한 비극성이 보다 더 직접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된다.

 

시인들이 떼 지어 끈끈이주걱 속으로 들어갔다

지옥문이 닫히고

낯익은 이름들이 점액질로 흘러나왔다

메슥메슥

 

서로를 집어 삼킨 고통 없는 욕망

그곳에 가지 않길 잘했다

재바른 날갯짓으로

날아온 딸년

앵둣빛 빨대 주둥이를 뽑아

양 볼에 번갈아 꽂아 가며 쪽쪽

내 영혼 밑바닥까지 빨아 먹는다

 

아, 몽롱한 것이,

천국이다

 

외롭고 높은 파리목숨

―「파리지옥」 전문

 

“서로를 집어 삼킨 고통 없는 욕망”을 좇아 시인들이 “떼 지어 끈끈이주걱 속으로 들어갔다.” “낯익은 이름들이 점액질로 흘러나왔다.” 속 메슥거린다. 지옥이 따로 없겠다 싶다. ‘나’는 “그곳에 가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 “재바른 날갯짓으로/날아온 딸년”이 “앵둣빛 빨대 주둥이를” “양 볼에 번갈아 꽂아 가며 쪽쪽/내 영혼 밑바닥까지 빨아 먹는다.” “아, 몽롱한 것이,/천국이다.”

이게 과연 천국일까. 저 지옥과 여기 천국은 무엇이 다른가. 욕망을 좇아 파리지옥에 갇히는 시인들이나, 자식새끼에게 영혼 빨아먹히는 ‘나’나, 다를 게 무엇인가. 삶의 주체인 ‘나’는 사라지고 없고 점액질이나 껍데기로만 남은 우울한 자화상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렇게 보면 지옥도 비극이고 천국도 비극이다. 우울한 ‘현대’, 희망 없는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백석이 말한 바, “외롭고 높은 쓸쓸한” 시인의 자존감이 “외롭고 높은 파리목숨”으로 대체될 수밖에.

 

4. 읍揖 차린 잔치의 해원

파리목숨 같은 현실에도 물론 출구는 있다. 해원解寃이다. 그 어떤 구속 상태일지라도 심원心寃이 풀리면 바다도 출렁, 풀리는 것이다. 그와 같은 해원이 「읍 차린 잔치」에서 일어난다.

 

국수 면발에도 마디가 있다

밤새 울어 퉁퉁 불은 눈언저리가 있다

후르르 삼키며 컹컹 목이 메는 곡절이 있다

 

이집 저집 상들이 네발 달려 걸어왔을 것이다

키가 작아도 빛나도 귀퉁이 깨어져도

한마당에

머리와 다리를 접붙여 앉히고

국수 말아 먹을 슬픔이 출렁

바다를 이룬

―「읍 차린 잔치」 전문

 

나는 이 글 앞쪽에서 이민호 시인이 ‘관념을 끌어들이되 관념에 주눅 들지 않고 그 관념을 밑돌 삼아 새로운 감각을 진작시키는 것이다.’라고 쓴 바 있다. 이 시가 딱 그렇지 않은가. 이 시는 새로운 발견이다. 나는 전율한다. 국수 면발에도 마디가 있다는 것 아닌가. 나는 이제껏 국수 말아 먹는 동안 국수 마디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숱하게 목 턱턱 막히는 국수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국수 면발의 마디는 느끼지 못했을까. 국수에 감기는 곡절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컹컹 목이 메는 곡절”의 내면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집 저집 상들이 네발 달려 걸어”오고 “한마당에/머리와 다리를 접붙여 앉”아 흐느끼는 그런 곡절. “국수 말아 먹을 슬픔이 출렁/ 바다를 이”루는 그러한 곡절의 내면화가.

그런데 내가 가신 이 그리느라 “밤새 울어 퉁퉁 불은 눈”으로 국수 먹을 때, 내 “국수 면발에도 마디”가 나타났다. 곡절의 내면화가 이뤄진 것이다. 그렇게 내면화한 마음속에서 “슬픔이 출렁/바다를 이”루자, ‘읍 차린 잔치’가 보였다. 해원이 일어난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문제는 해결된 것인가. 무슨 말씀을! 현대사회의 복잡계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고리와도 같아서 어떤 문제가 풀리는 순간, 또 다른 문제를 잉태한다. 고리와 매듭이 동시에 풀리고 얽히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이 시인의 자리라고 여긴다. 그러니 시인이여, 모든 감성과 이성을 총동원하여 다시 그 해원의 실마리를 찾으라.

 

정우영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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