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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작시/조윤희/행방이 묘연하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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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희
행방이 묘연하다 외 1편
유난히 실하던 한 개의 열매가 있어 한 계절 다 가도록 눈독들인 한 개의 열매 단풍잎, 은행잎, 우르르 한꺼번에 몸살 앓던 그때 잎 떨구고 서있는 나무에 한 개의 열매
마치 내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듯 내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 한 며칠 매달려 있어 아슬아슬 지켜보다가 언제까지 눈에 담아둘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손을 뻗어보나 하다가 그냥 두고 보자 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열매 주변 뜨락 샅샅이 흝어보아도 흔적 찾을 수 없어 못내 궁금해지는 열매
손을 탄 것일까 바람에 날아간 것일까
때 이른 눈발이 휘날리다가 비가 되었다가 밤이 되었다가 비 내리는 밤으로 찾아 나섰다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물방울 열매를 바라보다가
후두둑 떨어지는 낌새에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추스르고, 달래고, 얼러보다가 어느 늦가을 나의 행방이 묘연하다.
솟구치거나, 가라앉거나
제대로 눈 뜰 수 없는 한낮의 폭염이 내리쪼이는 거리에서 나는 손차양 하나로 나를 가리고 앉아 아스팔트 위로 내달리는 소음들의 질펀한 질주 지켜보는 도심의 거리
내가 도로에 납작하게 눌려 지나간 바퀴들에 눈이나 흘기면서 뾰족한 수가 없는 나는 마지막 외마디 같은 일갈로 바퀴에 구멍이나 한 번 내보고 싶은 소망 하나로
오늘도 무연히 일어서려는 나를 다시 눕혀 담금질하듯 두드리고 두드려서 납작하게 납작하게 두드리고 두드려서 낮은 포복으로 아주 낮아져서 나를 버리고
버려진 나를 벼려 못이라도 되어 세상에 펑크 내고 싶은 한낮의 아스팔트 위의 나는 오래된 아스팔트 아래 시원의 푸른 바다 속으로 자맥질하는 꿈을 꾸는 나는
조윤희∙전남 장흥 출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모서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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