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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작시/손제섭/숫돌․2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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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섭
숫돌․2 외 1편
숫돌에 시간을 지우던 사내가 있었다. 숫돌에 마음을 벼리던 사내가 있었다. 천지 기댈 곳 없던 사내가 있었다. 세상을 피해 가고 싶었던 사내. 먼 곳에 마음을 묻어 두고 온 사내가 있었다.
사내의 양손과 두 어깨는 늘 필사적이었고, 예리하게 선 날 끝에서는 시퍼렇게 시간이 흘러나왔다. 조롱에 갇힌 새처럼 남쪽 나뭇가지를 그리며* 일생을 입을 꽉 다문 채 낫을 갈던 사내가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태 만에 찾은 송백리 옛집. 육신의 짐을 벗어 던진 듯 숫돌이 나뒹굴어져 있다. 산그늘이 내려오자 성큼성큼 대문을 들어서는 아버지. 숫돌을 일으켜 세우더니 막무가내 낫을 갈고 있다.
*허균의 시 「억감호億鑑湖」에 나오는 구절.
버찌가 익어 갈 무렵
몽롱해진다 버찌야
이 나무 아래 서면
그림자와 침묵 뿐
문득 보인다. 버찌야
점점 살이 차오르는
몸뚱이에 새긴 문신
고양이가 지나간다. 버찌야
도돌이표처럼
그 사이 그려지는 삽화 한 장
얼굴 하나 파묻는다. 버찌야
적막하고 캄캄한 길
초록 비 오는 이 나무 아래
손제섭∙2001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 <그 먼 길 어디쯤>, <오, 벼락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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