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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작시/유현숙/700년 전의 약속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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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숙
700년 전의 약속 외 1편
당신에게 가져 갈 서책 한 권과 모필 한 자루와 연적 한 점과
미완의 악보를 베고
물 밑에 가라앉은 폐선에서 잤습니다
내 몸에 물결무늬가 돋습니다
칠백 년을 칠백 겹으로 접은 물주름입니다
늑골 사이에 바람 가득 찬 심해어들 숨소리가 깊습니다
당신,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지요
지금도 낡은 모국어로 바다의 휘파람을 받아 적는지요
칠천 오백 리 뱃길이 닳고
앞치마와 앞섶에 놓은 자수가 다 헤졌습니다
내가 잃은 것이 기억 속에 가라앉은 항구인지 모국어인지
휘파람들이 긴 행을 이룬 악보인지
나는 모릅니다
칠백 겹으로 주름 진 물속에 누워 당신을 꿈꾸지 않은 날
없습니다
내 몸속 깊은 곳을 흔드는 낡은 묵음들을 주워 듭니다
이제야 칠백 년의 잠에서 나를 깨웁니다
물주름 진 몸 껍데기를 천천히 당신 앞으로 돌려 세워도 되겠습니까
씨동백
선운사에 왔다
동백은 붉디붉은 꽃숭어리를 왈패처럼 피워 올린다
사색死色이 깊다
작년에 진 동백씨를 산새들은 아직도 쪼고
노파의 흐트러진 머리칼 같은 안개는 산머리에서 흘러내리고
나는 대웅보전, 막돌 초석 위에 얹힌 두리기둥의 배를 만지고
얼마나 간절하면 죽어 꽃으로, 새로, 바람으로
다시 나는 걸까
뼈 삭는 기도가 하늘에 닿는 일 있어
내 안에도 내원궁 이르는 길 있어
이 허방에서 붉은 노을을 지고 올 늙은 산객山客을 기다리는 것인가
옆구리를 푹푹 파내며 도리가 되어 누워 있는 것인가
유현숙∙2001년 <동양일보>와 2003년 ≪문학ㆍ선≫으로 등단. 시집 <서해와 동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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