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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작시/정겸/안경을 맞추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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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겸
안경을 맞추며 외 1편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
사막의 뿌연 먼지 속으로 한 무리 얼룩말 떼 지나간다
무뎌진 창끝처럼 속도를 잃은 늙은 사자 한 마리
먹잇감 놓치고 헐떡거리며 나무 그늘 아래 눕는다
눈꺼풀 자꾸 무거워지고
벌어진 입가에 작은 경련 일어난다
젊은 사자들의 앙칼진 공격에
앞발 쳐들며 저항하지만
뽑힌 갈기털 낙엽처럼 흩어진다
이내 고개 떨어뜨리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진다
신입사원이 작성한 공격적 마케팅 전략보고서
6포인트 작은 글씨들
가물가물하다
아니 잘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자리를 비워달라는 묵언의 시위일지도 모른다
슬그머니 일어나 복사기로 향한다
200%로 확대해서 더듬더듬 읽는다
안경을 맞추며
나의 수명 조금 더 연장한다
길에서 마주친 신사임당
퇴짜 맞았다
찬바람 부는 새벽 인력시장 장작불 사그라지고 있다
잔불 정리는 오늘도 조적공 이 씨 몫이다
전봇대 쳐다보며 하루 종일 걸었다
그 흔한 ‘잡부 급구’ 전단지마저 보이질 않는다
화풀이 겸 전봇대 조준하여 잠시 실례하는 사이
은행나무 낙엽 사이로
누런 지폐조각 언뜻 보였다
슬그머니 발로 밟고 사방 둘러본다
다리가 약간 후들거린다
순간, 10㎏짜리 쌀 한 포, 라면 한 상자
그리고 삼겹살 두 근
푹 패인 눈에 아른거린다
몰래 주워 후미진 구석에서 살짝 펴 보았다
아뿔싸, 친절한 신사임당 여사
대리운전 광고 모델로 협찬 중이다
뿌리 깊은 나무들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정겸∙경기 화성 출생.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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