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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작시/박혜연/캥거루 케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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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캥거루 케어* 외 1편
나는 주머니 안에서 나왔다 태반이 없는 어미의 안쪽 주머니는 나를 오래도록 품지 못했다 아직 배아 상태였던 나는 태고 적부터 유전된 피의 속삭임에 따라 움직였다 눈도 뜨지 못한 채 생기다 만 앞발을 들어 젖내 나는 살 쪽을 움켜잡았다 미세한 바람에도 요동치는 몸은 날개보다 가벼웠다 한 호흡이 한 세상인 듯 여러 생을 걸쳐 어미의 바깥 주머니에 도착한 나, 비로소 날개를 접었다 나는 최초 자궁 외 임신에 성공한 배아였다
현실이란 벽을 뛰어 넘어온 꿈 나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뒷다리에 힘을 길렀다 뜨거운 피, 저기 멀리 여우나 비단뱀 혹은 독수리의 날카로운 이빨이 보일 때면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했다 하지만 주머니는 항상 몸 가까이 있었고 순간적으로 힘이 솟았다 끓는 피, 점차 힘이 실리는 꼬리는 뒷다리와 함께 크고 강해졌다 시속을 뛰어넘어 달릴 때면 푸른 초원은 나의 책갈피가 되었다 책갈피를 넘길 때마다 또 다른 세상이 돋아났다 환호하는 피, 그쯤 내 배 아래 부분에도 작은 주머니가 생기고 어느 새 초원이 그 속에 들어와 푸른 인큐베이터를 만들고 있었다
* 아기를 엄마 배 위에서 체온을 느끼며 자라게 하는 방법.
바람의 이유
내 안에서 바람이 풀려나와
너는 그 바람을 잡고 나에게로 왔다
풀리는 것들은 부드럽고 강하다
햇살이 풀려서 나무가 자라고
바다가 풀려서 섬이 자라고
내가 풀려서 네가 자란다
나는 풀리는 혀로 너를 핥는다
나는 풀리는 눈으로 너를 읽는다
나는 풀리는 귀로 너를 듣는다
너는 풀리면서 꽃으로 피고
너는 풀리면서 수평선 별로 뜨고
너는 풀리면서 사랑을 한다
네 속에서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을 잡고 내게 돌아올 것이다
바람은 바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서 불어오는 것이다
내 속에서 네가 돌아왔듯이
네 속에서 내가 돌아올 것이다
박혜연∙2007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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