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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작시/이제니/가지와 앵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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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가지와 앵무 외 1편
가지가 있다
가지가 하나 있다
하나의 가지 뒤에 또 다른 가지 하나가
또 다른 가지 뒤에는 앵무가 하나 온다
앵무는 날아온다 날아와서 앉는다
가지 위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가지 위에
가지 위에 앵무 하나
가지 위에 앵무 둘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나는 이곳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두 발을 얹고서
추위도 더위도 얼음도 눈물도
이 가지 위에서는 모두 똑같다
가지 위에 빨강 하나
가지 위에 빨강 둘
마중인지 배웅인지 모를 얼굴로
앵무는 가지를 가지를 흔든다
나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무 뜻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지 위에 기억 하나
가지 위에 기억 둘
누군가 손가락을 들어 나무를 가리킨다
무수한 가지들 위에는 무수한 앵무들이
어둠과 함께
눈을 감는다. 무언가 보기 위해. 무언가 듣기 위해.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색깔들.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들판들.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너는 어둠과 한 몸으로 나타난다. 어느 겨울 하늘을 흐르던 길고 긴 비행운 같은 것. 이름 모를 수풀 속 키 큰 나무들을 흔들던 머나먼 종소리 같은 것.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같은 것. 속도에 몸을 맡긴 채 체념하듯 앉아 있던 어두운 기차간 같은 것.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눈을 뜨면 그날의 양 떼들도 다 사라지겠지. 녹색 들판에서 하름하름 풀을 뜯어 먹던. 한가로이 울면서 구름 곁으로 번지던. 어둠은 증식한다. 어둠은 증발한다. 다가오면서 멀어지는 꿈. 멀어지면서 나아가는 꿈.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너는 길게 길게 수평선을 늘린다. 몸을 떠난 바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잃어버린 언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나는 내 눈 속의 어둠과 함께 간다. 너의 어둠과 함께.
이제니∙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편운문학상(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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